어떤 등산(덕유산)

2010.02.16 12:00

범의거사 조회 수:11131


                         어떤 등산

               

   백동선생,
 

    그 동안 잘 지냈나?
   지척에 있으면서도 자주 보지 못함은 바쁜 세태 탓인가, 아니면 그대와 나의 게으름 탓인가? 구암선사는 어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이. 나의 아픈 팔만 아니었어도 예전처럼 함께 산에라도 몇 번 갔으련만 올해 들어서는 아직 한 번도 산행을 같이 하지 못했네그려. 참으로 미안하네.  

 

   백동선생,
 

     그대도 스키를 잘 타니 익히 알겠네만, 스키장에 슬로프가 있지 않나. 곤돌라나 리프트를 타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스키를 타고 질주하며 아래로 내려오는 곳 말일세. 그 스키장 슬로프는 아무렴 겨울에 존재가치를 뽐내는 거 아니겠나. 그런데 말일세, 그 슬로프를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게 가능하겠나?

     무주스키장에 가면 실크로드라는 슬로프가 있는 것 그대도 알지? 해발 1,520m 지점에서 출발하여 750m 지점까지 내려오는 총거리 6.2km의 국내 最長 슬로프 말일세.
  그 슬로프를 내가 한 여름에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갔다면 자네는 나더러 머리가 돌았다고 하지 않으려나 모르겠네.^^  

 

        2003. 6. 14.
 

     작년에 이어 올 여름에도 이곳에서 열린 민사집행법연구회(강제집행에 관심이 많은 전국 법관들의 연구모임이라네) 정기세미나에 참석차 무주리조트를 찾았다네.
  아직은 휴가철이 아닌데도 賞夏客들로 제법 붐비더군. 용평과 더불어 국내 최대 규모의 자리를 다투는 무주스키장이 이제는 사계절 휴양지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지라 1년 내내 人波로 들끓는 모양일세.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데는 서서히 확산되어 가는 주5일제 근무도 一助하지 않을까 싶으이. 
     

      2003. 6. 15.

 

     전날 밤 세미나 후 늦게 잠이 들었건만 창살을 비추는 환한 햇빛에 아침 일찍 잠이 깼다네. 창문을 열고 덕유산의 풋풋한 공기로 가슴을 가득 채우자 피로가 싹 가시더군. 같은 방에서 잔 사법연수원 제자 출신 판사(전보성)의 얼굴도 환한 모습이었다네. 어느 새 샤워까지 한 이 친구는 참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하여 내가 많이 아낀다네.
  로비에서 만난 또 한 명의 총애하는 제자 출신 판사(조병구)의 모습에서도 신선함과 활력이 넘쳐났지. 둘 다 장차 우리나라 사법부의 동량재가 될 인물들이라네.  


    그럼 산행이야기를 간단히 적어보겠네.

 

              * * * *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후 설천하우스 쪽에 있는 등산로의 출발지점으로 갔다. 세미나 참석 법관의 대략 반 정도가 덕유산 등산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그 중에서 다시 2/3 정도는 곤돌라를 이용하여 설천봉까지 올라가기로 하였기 때문에 막상 두 다리를 이용하여 산을 오르기로 한 사람은 7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전주에서 온 여판사도 1명(최유정) 있었다. 실크로드의 슬로프 하단은 초보자코스와 겹치는 까닭에 경사가 매우 완만하다. 그 슬로프의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40분.

     평소 산을 좋아하는 내 꿈 중의 하나가 히말라야에 가서 트래킹을 해보는 것이다. 신문이나 TV에서 그 트래킹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저기에 가볼 수 있을까' 하며 부러워하곤 했다. 그런데 아쉬운 대로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무주스키장 실크로드의 슬로프를 따라 난 길을 걸으며 그 트래킹을 연상했다.
  우리 일행이 출발한 곳의 고도가 해발 750m인데, 서울의 남산 높이가 262m, 청계산 높이가 618m, 관악산 높이가 632m인 것을 생각하면 이미 상당한 고지대에 올라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여기서 해발 1,520m까지 5-10도의 경사면을 따라 초원지대를 걸으면서 히말라야의 트래킹을 떠올린다 하여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일 것도 없으리라.
  만일 멀리서(또는 공중에서) 우리 일행이 걷는 광경을 찍어 신문에 내고 히말라야에서 트래킹하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순진한 사람은 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한 웃음이 난다.

 

     아무리 완만한 길이라 해도 일반 등산로와는 달리 햇빛을 가릴 수 있는 나무가 전혀 없고(스키장 슬로프의 성격상 나무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계속 오르막길이니 출발 30분만에 땀이 나고 숨이 찬다. 최판사의 애절한 눈길에 쉬어가기로 한다. 급할 것도 없지 않은가.
  날씨가 흐린 덕분에 직사광선이 바로 내리쬐지는 않지만, 그래도 구름을 뚫고 내려오고 있을 햇빛을 피할 그늘이 그립다. 엉덩이를 받치고 앉을 바위 하나 없는 것도 아쉽기기만 하다. 결국 잠시 숨만 돌리고 다시 출발할 수밖에.          

 

     처음에는 일직선으로 나 있던 길이 꼬불꼬불해지기 시작한다. 슬로프가 초보자 수준을 벗어나 중급자 수준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 지난 겨울에 이곳을 스키타고 내려올 때 급커브가 참 많았지... 당시에는 다소 위험하다는 생각과 스릴을 느끼는 묘미가 있다는 생각이 겹쳤었는데, 오늘은 위로 거슬러 걸어 올라가려니 꼬불꼬불한 게 거리는 멀어도 힘이 덜 들어 한결 좋다. 대관령이나 한계령 등 높은 고개에 난 길이 하나같이 꼬불꼬불한 것은 그래야 차가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치가 걸어서 올라가는 데도 적용되는 것이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경사가 심해지고 그에 맞추어 걷는 속도가 자연스레 느려지는데, 이미 나이 40을 훌쩍 넘긴 두 사법연수원 교수(김기정, 노태악)는 아직도 넘쳐나는 힘을 주체 못하는 듯 쉬지 않고 내달아 어느 새 뒷모습이 안 보인다.
  '나도 전에는 그랬다'는 소리를 해봐야 공감은커녕 '나이 든 사람들은 의례히 옛날에 황금 송아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핀잔이나 듣기 십상이기에 '내 분수를 내가 알아야지' 하며 마음속으로 체념할 따름이다.  

 

     산행 시작 1시간이 지나 능선 위로 올라서자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친다. 저 멀리 덕유산의 정상인 향적봉이 구름 속에 자태를 드러냈다 숨겼다 하고 그 주위로 덕유산 자락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덕유산은 전라북도 무주군과 장수군, 경상남도 거창군과 함양군에 걸쳐 있다. 主峰인 향적봉(1,614m)을 중심으로 해발 1,300m 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을 향해 장장 30여㎞에 뻗쳐 있다. 北덕유산(향적봉)에서 南덕유산(1,507m)에 이르는 주능선의 길이만도 20㎞가 넘는 거대한 산이다. 덕이 많고 너그러운 어머니 같은 산이라 해서 '덕유산(德裕山)'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이 산은 청량하기 그지없는 계곡과 유장(悠長)한 능선, 그리고 전형적인 肉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산악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 정상에 있는 주목과 철쭉, 원추리 군락지가 봄, 가을 산행의 운치를 더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유명한 무주구천동계곡 덕분에 여름철에도 봄, 가을 못지않게 각광을 받는다. 그 계곡물의 차가움이 실로 대단하여 한 여름에도 발을 담그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29년 전 여름, 그러니까 1974년 7월에 처음 무주구천동에 왔다가 그 길고도 깊은 계곡과 맑고도 차가운 물에 감탄한 기억이 새롭다.  

 

     능선을 따라 걷기를 30여 분, 설천봉 정상의 곤돌라 탑승장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까지 제법 가파른 50여 미터의 마지막 깔딱고개를 눈앞에 두고 조병구 판사가 갑자기 뛰어간다. 이어서 전보성판사가 그 뒤를 따른다. 군법무관 시절에 훈련받던 기분으로 달려 올라가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20여 미터 쯤 갔을까, 둘 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는다. 해발 1,500m나 되는 곳에서 비탈길을 뛰어오른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도 그들은 아직 젊기에 그런 시도라도 해보지만, 쩝 내년이면 知天命이 되는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설천봉 정상에 도착하여 찻집에 들어가 따뜻한 한방차를 시켜 놓고 있으려니 곤돌라를 타고 15분만에 편하게 올라온 판사들이 찻집으로 들어선다. 인솔자인 이우재 판사는 가족들도 동행하였다.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 온 송혜정, 이정민 두 여판사도 보인다. 그들이 등산복과 등산화를 구비하지 않고도 해발 1,520m의 고지에 쉽게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문명의 힘, 곤돌라 덕분이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행하는 이 곤돌라는 지금처럼 스키철이 아닌 때에는 오로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다. 1회 탑승요금이 10,000원(성인)이니 무주리조트 측으로서는 적지 않은 수입원이리라.
 

     곤돌라 덕분에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설천봉 정상은 해발 1,520m나 되는 높은 산봉우리의 원형은 흔적도 없고 유원지 그 자체이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마련하려고 한 탓인지 곤돌라 탑승장 말고도 여기 저기 축대를 쌓고 기와집을 지어 놓았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그 집들의 형태가 너무 倭式이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마치 오오사카(大阪)의 성을 보는 느낌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우리 고유의 전통양식은 마다하고 그런 어설픈 흉내를 냈는지 알 수 없다. 쯧, 산을 망가뜨린 것만으로도 큰 죄이거늘....  

 

      설천봉 정상에서 향적봉까지는 20분 거리이다. 이제까지의 슬로프와는 달리 이 20분 거리는 말 그대로 등산로이다.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갈 수 있는 좁은 등산로를 따라 양 옆으로 관목이 우거지고 곳곳에 야생화가 피어 있어 눈길을 끈다. 평지의 목련꽃은 봄이 감과 더불어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곳의 산목련은 지금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간다는 주목들도 곳곳에 눈에 띄고, 구상나무(학명 :
Abies Koreana Wilson)도 보인다. 한라산, 지리산, 무등산, 덕유산 등 우리나라의 남쪽 지방에서만 자라는 이 나무는 작년 가을 지리산 종주길에서 처음 보았는데, 그 때 많이 대하였던 까닭에 눈에 익숙하고 일견 반갑기도 하다.

 

     길이 험하지 않아서일까 가족이나 연인 등산객이 줄일 잇는다. 심지어 등산화나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은 사람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비록 쉬운 코스이긴 하지만 그래도 해발 1,600m가 넘는 산을 오르면서 너무 자만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발을 삐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산에서는 모름지기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탓일까.


     향적봉 정상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아직 11시가 안 되었다. 정상은 풀 한포기 없이 온통 바위뿐이다. 덕유산의 꼭대기임을 알리는 표석 외에 돌을 쌓아 만든 탑이 하나 있다. 늘 하는 대로 얼른 돌을 하나 집어 들어 그 위에 올려놓고 산신령님께 감사를 드린다. 무사히 올라올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맙고, 내려갈 때도 아무 탈 없이 잘 가게 해달라고.    
 

     흔히들 향적봉 정상에 오르면 적상산, 마이산, 가야산, 지리산, 계룡산, 무등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분명 사방을 돌아가며 무수히 많은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여기서 또 한번 실감하게 된다. 어느 산이 적상산이고 어느 산이 지리산이란 말인가? 단지 이정표에 씌어진 것을 보고 이쪽은 백련사 방향, 저쪽은 중봉 가는 길...하는 식으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나 할 따름이다.  


     향적봉과 중봉(1,594m) 사이는 키 작은 관목과 풀들로 덮인 초원지대이다. 5천여 평에 달하는 면적에 주목 5백 그루 정도를 심어 군락지를 복원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실로 무모한 짓일 수 있는데, 29년 전 여름 대학교 1학년 때 무주구천동에 왔다가 혼자서 백련사를 거쳐 덕유산 정상에 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본다. 7월 하순의 한창 더운 때여서인지 그날따라 등산객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이 높은 산을 혼자서 올랐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 근처에 도달했을 때 눈앞에 펼쳐졌던 푸른 초원지대와 그 가운데 수줍은 듯 숨어있었던 샘터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낼 수가 없다. 그 곳이 어디인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 저기가 거기인가, 아니면 저기가 거기인가....          

      한 여름이긴 하지만 1,614m나 되는 산의 정상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땀이 들어가면서 등골이 서늘해지기 마련이다. 기념사진을 찍고 사방의 경치를 조망하는 사이에 서서히 한기(寒氣)가 느껴진다. 더구나 하늘의 대부분이 구름으로 가려있지 않은가. 이우재판사가 가져온 과일을 깎아 먹고 하산을 서둘렀다. 대부분 빈 손으로 올라왔는데, 산행총무를 맡은 탓에 일행의 간식거리를 챙겨온 이판사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따름이다.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것처럼 無味한 산행도 없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다. 무주리조트로 되돌아가야 歸京차량이 있는 걸 어쩌랴. 설천봉에서 무주리조트로 내려가는 곤돌라 안에서 산행의 소감을 물었더니 최판사 曰,

     "이런 등산도 있네요"

  쉽게 해보지 못할, 그러나 두 번 하고 싶은 마음은 안 드는, 좋은 경험이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