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간(1)(예외3--하롱베이와 앙코르와트)

2010.02.16 12:03

범의거사 조회 수:10565

 

       자연의 신비, 인간의 도전(1)

 

 

   거북이(경호)가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시로 합격한 것을 기념하고 아울러 겨울방학 동안에 기숙학원에 들어가는 말썽이(경준)를 위로하기 위하여 2003년 연말에 가족여행을 하기로 했다. 마침 12월 27일이 노는 토요일인지라 26일 하루만 휴가를 내면 25일 크리스마스와 28일 일요일을 합하여 며칠간 여행이 가능했다. 우리 집 재경원장관이 여기저기 여행사에 알아본 결과 롯데관광에서 하롱베이와 앙코르와트를 다녀오는 4박 6일짜리 상품을 팔고 있었고, 재경원장관이 서울대학교에서 3년간 근무한 것에 대한  퇴직금이 때맞춰 나와 4가족의 여행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1988년 여름 독일에서 귀국한 이래 4가족이 함께 하는 해외여행이 15년만에 성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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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24일 밤 8시 5분,  

 


   예정보다 25분 늦게 하노이 발 대한항공 여객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비행기의 도착지가 그래서인가 승객의 대부분의 여행객 차림이다. 그러고 보면 탑승구에서 김문규(경복고등학교 친구) 내외를 만난 것도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비행기 안에서 폐쇄회로 화면을 통해 보여주는 항로를 보니 서해를 건너 상해, 남경, 홍콩 상공을 지나 하노이로 연결된다. 소요시간은 4시간 30분.  

   한 잠 자고 나자 하노이 공항이다. 서울보다 2시간 늦기 때문에 현지시각은 밤 10시 35분. 공항을 나와 ‘대우하노이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푸니 어느덧 밤 12시다. 공산주의 국가로는 첫발을 디딘 곳이지만 우선 밀려오는 피로에 깊은 잠에 빠진다.  


2003년 12월 25일

   아침 5시 50분, 모닝콜에 눈을 떴다. 서울을 떠날 때부터 몸살기운이 있었는데, 간밤에 안정제를 곁들인 약을 먹고 푹 자서 그런지 컨디션이 괜찮다. 커튼을 저치고 창밖을 내려다보니 야외수영장의 맑은 물이 눈에 들어온다. 망하기 전의 (주)대우에서 베트남 정부와 합작으로 세운 이 호텔은 객실이 411개로 하노이의 특급호텔 중 규모가 제일 크고 최상급에 속한다. 시내 중심지에서 다소 떨어진 외곽에 있는데도 베트남을 방문한 주룽지와 푸틴이 투숙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당시도 제22회 동남아시안게임 장애인경기대회의 본부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침식사는 뷔페식이다. 서울에서도 먹어보았던 베트남 쌀국수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쌀로 만든 국수발에 손님이 기호에 맞게 고른 각종 야채를 얹어 즉석에서 더운 물로 살짝 데쳐 주는데,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우리 4식구는 이번 여행 내내 기회만 되면 이 국수를 즐겨 먹었다. 다른 음식들은 호텔 뷔페의 흔한 메뉴들이라 그다지 특징이 없는데, 더운 지방이라 그런지 과일이 특히 풍성하다. 그 중 ‘Dragon Fruit’ 라는 과일은 처음 보는 것인데, 단 맛이 별로 없어 인기를 끌지 못했다.

 

   아침 7시. 하롱베이를 향해 떠났다. 시내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송코이강( 紅江)에 놓인 다리를 하나 건너는데, 월남전 당시 미군 폭격기들이 192번이나 끊어놓은 것을 그 때마다 연결한 다리라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리라는 의미이다. 하노이는 한자로  河內라고 쓴다. 즉 강안에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우기(5월-10월)가 되면 송코이강이 범람하여 도시 외곽의 제방 바깥은 물에 잠긴다고 한다.  
   시내의 간판들이 대부분 불어로 씌어 있어 나름대로 프랑스 식민지였던 까닭이려니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불어와 글자가 조금씩 다르다. 집사람한테 물으니 아무래도 불어가 아닌 것 같다고 한다.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가이드한테 물어보았다. 베트남에서는 본래 중국의 영향으로 한자를 사용하던 것을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와 불어를 변형한 글자를 만들어 한자음을 표기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의 베트남어란다. 그러니 글자가 불어와 닮을 수밖에.

   베트남,  

   우리에게는 월남전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나라이다. 그러나 1975년 전쟁이 끝나고 그 이듬해 사회주의 통일정권이 들어선 이후 우리에게는 잊혀진 나라였다. 아니, 참전국으로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우리로서는 잊고 싶은 나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 하노이 정권이 1986년부터 경제개발을 위해 ‘도이모이’라는 개방정책을 표방하고, 그 일환으로 서방세계와 다시 국교를 열면서 우리와도 1992년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우리나라 기업들이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멀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면적 33만㎢(남북한 합친 한반도의 1.5배)에 인구는 7,700만 명. 공식화폐는 '동'(DONG. 1달러가 15,000동이다)인데 상점(심지어 노점상도)마다 달러를 받기 때문에(오히려 달러를 더 좋아한다) 관광객들은 환전의 필요성을 거의 못 느낀다. 이는 캄보디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구권 개척의 선두주자인 대우그룹이 수도 하노이에도 제일 먼저 적극적으로 진출한 결과 우리가 묵은 대우하노이호텔은 물론이거니와 길거리에서는 대우자동차에서 만든 차들(누비라, 마티즈, 라노스, 레간자 등)이 누비고 다니고, 특히 시내버스는 대부분이 대우차이다. 물론 쏘나타나 스타렉스 등 현대차도 눈에 띄나 대우차에는 미치지 못한다.
   대우차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삼성에니콜이다. 전자상가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노키아와 삼성의 대리점이 거의 같은 비율로 번갈아 가며 거리를 장식하고, 그 사이로 LG에어콘 대리점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 LG에어콘이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고, LG의 드봉화장품도 최고 인기상품이라고 한다. 기간통신망은 SK텔레콤과 베트남 정부가 합작하여 세운 S-Phone이 담당하고 있다. 이 간판도 쉽게 볼 수 있다.  

   하노이 시내를 벗어나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분명 고속도로로 들어섰는데 차의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은 차창 밖을 내다보는 순간 금방 풀렸다. 고속도로라고 해서 차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노니 시내나 다름없이 오토바이, 자전거에 경운기까지 다닌다. 심지어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도 눈에 띈다. 제한시속 30km를 위반하여 40km로 달렸다는 이유로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가 교통순경한테 걸려 15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면 누가 믿을까...  
   기차는 최고 속도가 시속 40km라고 한다. 그래서 하노이에서 호치민(옛 사이공)까지 38시간 정도 걸린다나. 개방정책의 바람을 타고 시장경제의 원리가 도입되고는 있으나, 기간산업 분야는 아직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차창에 어리는 농촌지역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런데 들판의 일꾼들이 맨 여자인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베트남에서는 한국과 달리 여아선호사상이 퍼져 있다. 딸은 어려서부터 일꾼으로 부려먹을 수 있고, 돈벌이에 내보낼 수 있고, 시집보낼 때는 지참금 수입(평균 120만원. 남자의 평균 월급이 7만원인 것을 생각하면 큰 돈이다)을 올릴 수 있으니 여러모로 유용한 것이다. 그에 비하여 남자는 일자리 부족으로 백수가 태반인데, 농촌에서마저도 논일, 밭일을 대부분 여자가 한다. 할 일 없는 남자들이 즐겨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름이라니 사회적 병폐가 아닐 수 없다.  

   농촌 풍경 중에 또 이채로운 것은 전봇대와 묘지이다.
   이곳의 전봇대는 우리처럼 시멘트로 만들었으되 형태가 원형이 아니라 사각형이다. 이유는 뱀이 많기 때문이다. 원형 전봇대는 뱀들이 타고 올라가 겁도 없이 전깃줄을 건드려 감전사고를 내면서 정전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사각형은 뱀이 타고 올라갈 수 가 없다. 같은 원리를 나중에 캄보디아의 집기둥에서도 보게 된다.  
   베트남 농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논이나 밭에 가매장하였다가 3년 후 정식 매장하고 시멘트로 비석을 세운다. 고속도로 변의 논,밭 가운데서 그렇게 만든 묘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죽은 자가 멀리 떠나지 않고 가족의 일터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조상 숭배는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고 않다. 서양문화와 다른 동양문화의 모습이 아닐는지....

   하노이를 출발 한 지 3시간만에 하롱베이에 도착하였다. 바로 못 미친 자그마한 마을에는 집집마다 국기가 걸려 있는데, 관광객들을 환영한다는 뜻이란다.
   그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석산의 돌을 깨는 발파작업이 한창이어서 먼지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그렇다고 이웃 주민들이 대기오염이나 소음을 이유로 반대 플래카드를 내걸거나 시위를 하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돌을 전부 캐내 아예 그 산을 없앨 거라고 한다. 이유는 원경(遠景)을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는데, 정작 그 산이 없다고 해서 바라볼 만한 원경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아이러니다.  

   하롱베이

   대한항공의 CF로 인하여 한국인에게 일약 널리 알려진 곳이다. 하롱은 한자로 '下龍'이라고 쓴다. 베이는 영어로 Bay, 즉 만(灣)이라는 뜻이다. 결국 하롱베이는 '용(龍)이 내려온 만(灣)’인 셈인데, 무슨 뜻일까?
   전설에 의하면 바다 건너 쳐들어온 침략자를 막기 위해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입에서 보석과 구슬을 내뿜어 침략자를 물리치고, 그 보석과 구슬들이 갖가지 모양의 기암(奇岩)으로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중국과의 국경 근처에 있는 넓이 1,500㎢에 이르는 만이다. 베트남 제1의 경승지로, ‘바다의 계림’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1962년 베트남의 역사,문화,과학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 그 아름다운 경관으로 UNESCO 세계유산 목록 가운데 자연공원으로 등록되었다.  

   선착장에는 관광객을 기다리는 배들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그 중 가장 멋져 보이는 배에 올랐다. 우리 일행 19명이 전세 낸 배이다. 언뜻 영화 속의 해적선 같이 보인다. 우리처럼 이 배를 타고 하루 유람을 하는 관광객을 위해서도 빌려주지만, 그보다는 배 안에서 먹고 자며 1주일씩 하롱베이를 유람하는 관광객도 주요 고객이라고 한다. 이들을 위해서 배 안에 8개의 방이 있는데, 그 안에는 침대, TV, 냉장고는 물론 샤워실까지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남자들만 7-8명이 떼지어 와 통째로 이 배를 빌어 베트남 여자들과 며칠씩 유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요지경이다.  

   배를 타고  항만으로 나갔다. 근처에 장사치 배가 따라오며 과일을 사라고 외친다. 바다의 행상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수족관을 갖추고 생선을 파는 배도 있다. 1불이면 커다란 망고를 하나 살 수 있다. 그 배들 구경을 잠깐 하고 바야흐로 섬들 사이로 들어가자 말로만 듣던 비경이 드디어 펼쳐진다.

   석회암의 구릉 대지가 오랜 세월에 걸쳐 바닷물에 침식되어 생긴 3,000여 개의 섬과 기암이 초록색의 바다 위로 솟아 있다. 날카롭게 깎아지른 바위, 절벽을 이루고 있는 작은 섬들(대부분 무인도이다), 환상적인 동굴이 있는 섬 등이 기후나 태양 빛의 변화에 따라 그 모습과 빛깔을 미묘하게 바꾸는 광경 등이 절경을 이룬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그냥 아름답다고 하는 것 외에는 표현하기가 어렵다. 마침 시간이 일러 아침 안개가 덜 거친 까닭에 더욱 신비스런 풍경을 연출한다. 정말 한 폭의 동양화 그 자체이다. 이쯤 되면 해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100여 만 명에 이른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듯하다.

   바다인지 호수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잔잔한 수면 위를 배가 미끄러져가고, 새 섬이 나타날 때마다 탄성을 지는 가운데, 20∼30가구가 모여 사는 해상 마을이 나타났다. 하롱베이에는 이런 마을이 5개 있다. 작은 바위에 밧줄로 묶어놓은 해상 가옥들이 1년 내내 파도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다.  
   이처럼 고정된 가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동하며 생활하는 선상가옥도 있다. 배 위에서 일가족이 생활하다 보니 근친상간의 문제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수입원은 하롱베이에서 나는 생선을 잡아다 파는 것이라고 한다. 만이 오염되면 곧 그들의 생활근거지가 위협을 받기 때문에, 대변은 모아다가 섬에서 처리한다고 한다.  

   수많은 섬들 중에서 Hang Sung Sot(‘놀라운 동굴’이라는 뜻)이라는 석회암동굴이 있는 곳에서 내렸다. 석회암지대에 생긴 동굴인지라 내부 모습은 우리나라의 고수동굴이나 성류굴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이곳의 동굴을 죽은 동굴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의 석회동굴은 지금도 석회암이 녹아 종유석과 석순이 생기고 자라고 있는데 비하여, 이곳의 동굴은 그런 활동이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와는 달리 동굴 안이 매우 건조하다. 군데군데 균열까지 생기고 있어 붕괴의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천장의 무늬가 물결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의아해했는데, 섬이 바닷속에 있다가 솟아올라왔기 때문일 거라고 가이드가 설명한다.

   동굴에서 나와 다시 배를 타고 띠똡(Ti Top)으로 가는 도중에 선상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비경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흐르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밥, 야채, 꼬막, 게, 새우, 생선, 춘권, 돼지갈비 등 음식이 풍성하게 나왔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배의 갑판으로 올라가자 햇볕이 따갑다. 안개가 걷혀 섬들의 모양이 또렷하다. 좌우를 둘러보며 잠시 신선의 기분을 내고 있는데, 멀리 배 앞쪽으로 띠똡의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띠똡은 하롱베이의 중심에 있는 전망대이다. 선착장에서 내려 424개의 계단을 오르면 섬의 정상에 오르고 그곳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사방으로 돌아가며 하롱베이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옾은 산에 올라가면 사방으로 이어지는 산들을 볼 수 있듯이, 띠똡에서는 사방으로 이어지는 섬들을 볼 수 있다. 섬 뒤에 섬, 섬 옆에 섬, 섬 앞에 섬..... 그 사이사이에 초록빛 바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 아쉬운 뱃길을 돌려 선착장으로 가는데, 아뿔싸, 배가 안 움직인다. 바다의 물이 얕은 곳, 모래톱에 걸린 것이다. 아니 스크루가 돌아감에 따라 흙탕물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모래톱이 아니라 진흙톱인 모양이다.
   1년 내내 유람선을 운항하는지라 뱃길을 잘 알련만 어찌타 진흙톱에 걸렸단 말인가. 하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도리 없이 지나가던 다름 배에 옮겨 타고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하롱베이에서 하노이로 돌아가는 길에 도자기마을에 들렸는데, 전시된 물건들이 도자기라기보다는 사기그릇 수준이다. 아마도 살 만한 물건이 없을 거라는 가이드의 말 그대로였다.
   하노이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위해 코리아타운이라 불릴 만한 건물로 들어섰다. 한국산 전자쎈터, 의류쎈터, 식당 등이 즐비했다. 그 중 한 곳에서 먹은 삼겹살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호텔로 돌아와 잠시 숨을 돌렸다가 단체로 발마사지를 하러 시내로 나갔다. 가격은 1인당 20불, 팁 2불이다. 본래 발마사지만 1시간 해주는데, 보너스 30분으로 전신마사지를 해준다. 한 번에 20여명이 족히 들어갈 수 있는 마사지실에서 남자손님은 여자가, 여자 손님은 남자가 마사지한다. 마사지사의 연령은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인다. “기다리세요, 안 끝났어요, 돌아누우세요” 등의 한국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 손님이 꽤나 많은 모양이다. 동굴과 띠똡을 오르내리느라 쌓였던 다리의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다.  

   마사지 후에 길거리로 나와 보니 올 때와는 달리 길이 젖어 있다. 소나기가 왔었나 하고 의아해하자 가이드가 설명한다. 지금처럼 건기에는 비가 오는 일이 거의 없어 너무 건조하기 때문에 물차가 다니면서 길에 물을 뿌린다고 한다. 하노이에 흔한 것이 물이니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겠다.

2003년 12월 26일

   하노이

   공식으로는 700만명, 비공식으로는 800만명이 산다는 하노이에서는 가로 5m 세로 18m의 3층집을 흔히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길쪽을 향해서 집을 짓기를 원하지만, 한정된 땅에 그 바램을 다 충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정부에서 궁리 끝에 전면은 5m, 측면 18m의 길쭉한 직사각형 토지를 분양한 것이다. 거기에 3층 집을 지어 1층은 상점, 2층은 생활공간, 3층은 창고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는 하노이가 아닌 시골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이웃과 떨어져 있는 독립가옥도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앞면은 노란색 페인트로 예쁘게 칠한 반면 옆면은 회색의 시멘트벽 그대로인 게 재미있다.다른 사람이 옆의 땅에다 이어서 집을 지을 텐데 굳이 돈을 들여 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침을 여유있게 먹고 9시에 하노이 시내관광에 나섰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베트남 사람들이 국부로 추앙하는 호지명(호치민)의 묘이다. 그는 1969년에 죽었는데, 냉동보관하였다가 미이라로 만들어 1975년에 조성한 이 묘소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매년 9-12월에는 미이라를 러시아로 보내 보수한다고 한다. 레닌, 모택동, 김일성, 호지명 등 현대판 미이라는 모두 공산주의자들인 게 이채롭다. 아무튼 이 호지명 묘는 하노이 사람들의 참배가 줄을 잇는 하노이 최대의 명소라니 민주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호지명 묘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어 바진광장으로 불리는데,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처형된 정씨부인을 기리는 곳이라고 한다. 이 광장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국회의사당, 외국 대사관 등의 건물과 위령탑이 눈에 들어온다.

   호지명 묘를 끼고 돌면 프랑스 식민지 시절 총독부로 사용했던 프랑스풍의 건물이 나온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건물 뒤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곳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 눈이 희둥구레졌다. 나무 하나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와 뿌리를 내려 타원형 아치를 만들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양쪽의 두 나무가 공중에서 만난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이름하여 오작교 나무이다.  
  가이드가 그 옆에 있는 전봇대를 가리킨다. 언뜻 시멘트로 만든 보통의 전봇대 같은데, 시멘트치고는 윤기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위를 쳐다보는데, 앗, 전봇대가 아니라 야자수였다.  

   정원 안으로 더 들어가면 제법 넓은 연못이 있고, 그 주위에 호지명의 집무실과 거주하던 집이 있다. 한 나라의 국부로 추앙받는 사람의 집무실과 거소치고는 참으로 검소하였다. 그가 베트남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의 일단을 보는 듯했다.
   특히 그가 거주하던 집은 단정한 목조건물인데, 그 내부 장식물이라고는 침상과 책상, 책장 등이 고작이었다. 주석궁을 짓고 온갖 호사를 부리던 김일성과는 천양지차였다. 같은 공산주의자라도 사람 차이가 이렇게 나는 것일까...

   호지명 묘 근처에는 일주사(一柱寺. 한 기둥 사원)가 있다. 기둥이 하나인 사원이라는 뜻이다. 1049년 리타이똥 황제가 세운 목조 사원으로 커다란 기둥을 하나 세우고 그 위에 연꽃을 형상화한 건물을 지은 독특한 양식의 절이다.
   그런데, 1954년 프랑스군대가 불을 지르는 바람에 그 후 복원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시멘트기둥으로 바꾸는 바람에 지금은 볼품이 없어졌다. 유서 깊은 절에 불을 지른 프랑스인이나 목조건물을 시멘트로 복원한 베트남인이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노이의 명물은 건물이 아니라 씨클로이다. 자전거의 앞에다 인력거를 단 자전거택시이다. 씨클로를 타면 한 시간 동안에 하노이의 구시가지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운전사들의 운전솜씨가 귀신이 곡할 정도이다. 큰 길로, 시장으로, 골목길로, 번화가로...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하노이의 내밀한 속살을 볼 수 있다. 요금은 5,000원(단체 2,000원) 정도이다.
   씨클로를 타고 구시가지의 곳곳을 둘러보는데, 분명 공산주의 국가이건만 특이하게도 크리스마스 장식물을 내건 성당이 눈에 띄었다. 이 역시 프랑스 식민지 시대 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하루에 두 번 미사를 본다고 하니 묘하다.

   하노이의 거리는 오토바이 천국이다. 오토바이는 사람만 타는 것이 아니라 돼지나 닭도 싣고 다니고, 어찌 보면 실을 수 있는 것은 다 싣는 것 같다. 일가족 5명이 한꺼번에 타고 다니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본다.
   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면 복면을 한 사람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자들이 그렇다. 대낮에 웬 복면강도가 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활개를 치는가 싶지만, 사실은 첫째는 얼굴이 햇볕에 타는 것을 막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지독한 매연 때문이라고 한다.
   오토바이는 휘발유가 아닌 경유(디젤)를 사용하는데다, 배기가스정화장치가 달린 것도 아니어서 그 매연이 보통 심한 게 아니다. 잠시 길가에 서 있노라면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물론 이에 익숙한 하노이 사람들은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눈치이다.

   자동차는 그 오토바이 사이에 가끔 끼어드는 낯선 존재이다.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그리고 사람까지 뒤엉킨 길은 이방인에게는 혼돈 그 자체이건만, 용케도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잘도 비켜 다닌다. 대신 자동차의 최고속도가 시속 30Km로 제한되어 있긴 하다.
   충돌을 피하려니 꼭 필요한 게 경적이다. 빵빵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다 내는 것 같다. 자동차에 속도계는 없어도 경음기는 반드시 있는 이유이다. 씨클로를 타고 1시간 관광을 하는 동안에 하도 시끄러워 귀가 멍해진다. 그렇지만 이들은 누구 하나 짜증을 내지 않는다. 역시 그만큼 익숙해진 탓이리라.  

   옆면에 “경기대학교”가 씌어 있는 대형버스, “샛별유치원”이 새겨져 있는 봉고차가 눈에 띈다.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차들이다. 그런데 왜 한글을 지우지 않을까? 한글의 존재 자체가 그 차가 고급품임을 나타내는 징표라니 어쩌랴. 그래서 일부러 한글을 써넣는 차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동문”이 “자동곰”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5-60년대에는 중고 미제차들이 그런 식의 대접을 받았으리라.

   씨클로에서 내리자 베트남 여인이 특유의 운반도구(천칭처럼 생긴 것으로 어깨에 메고 다닌다)에 바나나를 잔득 담고 다가온다. 1불을 내니까 바나나 한 무더기를 내준다.
   그 운반도구를 한번 들어보려고 했다. 어이쿠, 꿈쩍도 안한다. 옆에서 도와줘 간신히 어깨에 메었는데, 금방 내려놓아야 했다. 무게가 무려 60Kg이나 된다. 베트남 여인이 보여주는 어깨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다. 이 무거운 운반도구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장사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자이다. 남자들은 오토바이에 싣고 다니든가, 오토바이가 없으면 백수로 지낼망정 그런 일은 안 한다는 것이다. 이곳의 여자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사는 날이 언제나 올까.

   하노이에서 제일 큰 호앙키엔 호수가에 있는 한식당에서 해물탕으로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캄보디아의 씨엠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이다.
   이동 도중에 짬을 내 길거리에서 모자를 하나 샀다. 베트남 전쟁 때 월맹군 정규군이 썼던 둥근 챙의 모자이다. 가격은 3불. 제법 튼튼하게 만들어 오래 주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작은 것이 흠이지만.  

   비행기의 이륙시각은 활주로 사정상 예정보다 다소 늦어지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하노이에서 오후 3시 출발 예정인 씨엠립행 베트남항공은 오히려 출발시각 5분전에 공항을 떠났다. 참으로 이례적이다.
   하노이는 베트남의 수도이고 씨엠립은 캄보디아 북서부의 작은 도시인데, 하노이에서 씨엠립으로 가는 베트남항공의 승객은 한국인이 대다수이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비행기가 궤도를 잡자 곧 기내식이 나온다. 씨엠립까지 2시간밖에 안 걸리는데 기내식을 주는 것은 낭비적 요소가 짙다. 점심 식사를 한 지 얼마 안 되는 거북이와 말썽이는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포도주만 마신 후 잠에 곯아떨어진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