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 충남(안면도, 간월도, 천리포수목원, 아산온천)

2010.02.16 11:53

범의거사 조회 수:10642


禪師님,

어느 새 성큼 여름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오랜만에 인사 여쭙니다.
두루 평안하시온지요?

  충주에 근무할 때는 가족들과 함께 지낸지라 주말이면 ‘산따라 길따라’ 山川景槪를 즐기러 다닐 수 있었는데, 이 곳 한밭에서는 부임한 지 벌써 4개월이 되도록 그럴 여유를 가질 수가 없어 늘 아쉬웠답니다. 주말이면 가족들 보러 한양 땅에 올라가야 하니까요.
  그러던 차에 계속 검증을 갈 일이 계속 생기는 바람에 부족한 대로 충청남도의 몇 군데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같은 道內에 있는데도 한밭에서 장항을 가려면 전라북도의 군산을 거쳐서 가는 것이 빠르고 길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곳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안면도 꽃박람회장에서는 꽃보다 더 많은 人波에 기가 질리기도 하였지요. 

  그래도 1년생 채소로만 알고 있었던 가지가 5년생 나무로 둔갑하여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가 하면, 역시 1년생 과일임이 분명한 토마토가 3년생 나무로 탈바꿈하여 줄기가 휘어질 정도로 열매가 빼곡하게 열려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함과 동시에, 힘들게 다리품을 팔고 거기에 비싼 입장료까지 내고 들어간 보람을 그나마 느끼게 하였지요.
  유전자 조작을 통한 새로운 식물의 탄생을 두고 생명공학의 개가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神의 영역에 도전하는 재앙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초ㆍ중ㆍ고등학교 생물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禪師님,

  한밭에서 서산을 가는 것과 한양에서 서산을 가는 것 중 어느 쪽이 시간이 덜 걸릴까요? 후자가 빠르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충청남도에는 남북으로만 고속도로가 뚫려 있고 동서로는 꼬불꼬불 옛날 산골길로만 연결되어 있어 그런 아니러니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답니다. 

  지난 주 금요일(5월 31일) 밤에는 서산에 갔었습니다. 1년 전 같은 날 한 밤중에 일어난 범죄 현장을 살펴보고, 서로 정반대 되는 피고인과 피해자 중 누구의 말이 맞는지 판단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함이었지요. 판사가 全知全能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곤 합니다.     

  가는 길에 서산 방조제를 지나 어리굴젓으로 유명한 看月島에 들렀습니다. 저녁식사를 위해서지요. 간월도는 원래 2개의 섬인데, 서산방조제 건설 후 하나는 육지가 되고 다른 하나는  썰물 때만 건널 수 있는 섬으로 남았다는군요. 그 섬에는 무학대사가 토굴 속에서 달(月)을 보며(看) 득도했다는 전설이 전해져오는 간월암(看月庵)이 바다를 보고 멋지게 자리잡고 있었은데, 시청과의 갈등으로 인해 경내 관광을 당분간 폐지한다는 안내문이 절문에 걸려 있더군요. 관광 말고 부처님 전에 참배하는 것도 안 되냐고 물으니, 지금은 夏安居철인데다 이미 늦은 시각이라 역시 불가능하다는 답을 듣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요. 
        
  현장검증이 끝난 후 하룻밤 유숙하기 위하여 배석판사들 및 공판검사와 찾은 곳은 태안군의 천리포수목원입니다. 밤 12시가 다 된 한밤중이었지만, 사전에 미리 연락하여 열쇠를 받아놓은 덕분에 그 동안 말로만 듣던 이 수목원에 발을 들여놓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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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잠이 들었다 온갖 새소리에 잠이 깨는 곳, 천리포수목원은 隱者의 낙원이자 쉼터였습니다. 전날 하루 종일 근무하고, 여러 시간 차를 타고 와 밤늦게까지 검증을 하느라 솜처럼 피곤한 상태에서 잠이 들었건만, 너무나 멋진 수목원의 아침은 그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상쾌하기 그지없었답니다.

      
  설립자 민병갈(미국 이름 Carl Ferris Miller, 1979년 귀화, 2002.4.8. 사망)씨가 1962년에 천리포 해변에 2ha의 야산을 구입하여 조성하기 시작한 이 수목원에는 총 172과 857속의 총 9,730종류의 식물이 모여 살고 있답니다. 우리 나라 원산지의 토종식물은 물론이거니와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온 것들도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그 식물 하나하나마다 일일이 한글과 영어로 이름을 써서 명찰을 달아준 정성이 눈물겹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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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뽑힌(아시아에서는 최초이고 세계에서는 12번째) 곳답게 잘 짜여진 관찰로를 따라 가며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를 감상하노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이다. 특히 연못에 집단으로 피어 있는 주홍색 水蓮이 나그네의 눈길을 끌었지요. 뭐랄까 그냥 "정말 예쁘네"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붙일 말이 없더군요. 그야말로 百聞이 不如一見이라고 할 수밖에요.

  그런가 하면 노란 색으로 물든 측백나무가 또한 지나는 사람의 발걸음을 부여잡는데, "나무에 스프레이로 노란 색 물감을 뿌린 것 같다"는 금덕희 판사(우배석)의 말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대변한다고 하면 짐작이 가실는지요?

  앗, 이건 또 뭔가요? 등나무가 하늘에 매달려 있네요! 아하, 자세히 보니 거대한 소나무를 타고 올라간 등나무가 그 소나무를 온통 감싸버리는 통에 소나무는 어디 가고 등나무만 남은 형국이 되었지 뭡니까.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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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속 사이사이에 숙박용으로 지어 놓은 집들은(한옥의 기와집과 초가집이 있는가 하면 방갈로식도 있지요)들은 그 이름(측백나무집, 다정큼나무집, 감탕나무집, 해송집....등. 그 집 앞에 심어놓은 나무들 이름을 딴 거예요) 만큼이나 감칠맛이 납니다(제가 하룻밤 묵은 감탕나무집은 방이 4개인 기와집인데, 주방시설, 보일러시설, 샤워시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어 불편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떤 집은 駐韓 호주 대사관에서 1년 단위로 장기 임차하여 직원들이 주말에 사용한다고도 하더군요.  

  다만, 근래 수목원 관리에 다소간 문제가 생겼다더니, 몇몇 집은 안타깝게도 폐허화되었더군요. 관람 가능지역만 2만평에 총 관리면적이 18만평이나 되는 넓은 수목원을 후원회원들에게만 개방(이 점에서 누구에게나 개방하는 가평의 아침고요수목원과 큰 차이가 있더군요)하면서 관리한다는 게 아무래도 어려움이 많지 않겠나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禪師님,
     
  한국이 48년간의 숙원인 월드컵대회에서의 첫 승을 거두던 날, 시생은 아산에 있는 광덕산 기슭을 헤매고 있었답니다. 역시 현장검증 때문이었지요.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려니 적지 않은 땀이 났습니다. 그 땀을 씻기 위해 歸路에 아산온천을 찾았답니다.

  6-7년 전 충주에 근무할 때 한 번 다녀간 적이 있었는데, 그 사이 많이 변했더군요. 당시에는 온천장이 하나뿐이었지만 지금은 여럿 들어섰고, 그 중 스파비스라는 온천장은 안내판에 적힌 대로 동양 최대라는 말에 걸맞게 그 시설이 굉장하더이다. 입장료 7,000원이 결코 아깝지 않았지요.

  요새는 온양, 도고, 덕산 등 古來의 온천들이 한물 간 데 비하여 아산온천이 새로이 각광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6ㆍ13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목욕객이 거의 없는 것은 오늘이 월요일 저녁이고, 그것도 우리 나라가 폴란드와의 축구경기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제는 그만큼 선거풍토가 깨끗해졌기 때문일까요...?

  목욕을 마치고 서둘러 대전으로 돌아오니 TV가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축구 전반전 경기를 볼 수 있더군요. 후반전은 각자 자기 집으로 가서 보기로 하고 헤어졌지요. 집이라고 관사에 가 보아야 아무도 없는 텅 빈 아파트지만 말입니다.
  2:0으로 이기는 축구중계를 보면서 갑자기 사람냄새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내일은 珉周之山의 三道峰을 찾아 나서려고 합니다.
안녕히 계시옵소서
  
                                              2002. 6. 5.
                                                               범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