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만큼 느끼고...(월출산,담양)

2010.02.1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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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만큼 느끼고, 눈물의 回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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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 7. 27. 14:00


   장마답지 않은 장마가 끝나나 했더니 예기치 않은 태풍 닐이 반도의 남서부를 통과한다는 일기예보가 왜 그리도 잘 들어맞는지, 광주공항에 발을 내릴 때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權光重 광주지방법원장님이 내 주신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망월동 묘역으로 가는 차창에 한없이 뿌려지는 빗방울이 가슴을 적셨다. 아마도 사법연수원 교수로서는 마지막일 연수생들과의 MT길이 결코 순탄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며, 문득 작년 이 맘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 때는 29기 연수생들과 속리산으로 MT를 갔는데, 전국을 돌아가며 물바다로 만든 게릴라성 호우로 마음을 졸여야 했었다. "당신은 어딜 가려고만 하면 비가 온다"는 집사람의 걱정하던 모습도 눈에 어린다.01.jpg

 

   1980년 민주화의 봄이 군화 발에 유린되고 결국 대규모 유혈참사를 불러온 5ㆍ18 사태의 희생자들이 묻힌 곳, 望月洞 묘역은 깨끗이 단장된 모습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한 눈에 들어왔다. 분향을 마치고 그 당시의 참상을 알리는 많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을 둘러보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망월동을 벗어나 광주에 온 김에 문화탐방을 하라고 권광중 원장님이 일러주신 대로 명옥헌(鳴玉軒)→식영정(息影亭)→소쇄원(瀟灑園)으로 이어지는 園林(유홍준 교수의 명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집 안에 동산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庭苑이고 동산에 집칸을 배치한 것이 園林이란다) 답사길에 올랐다. 이들은 무등산 북쪽 기슭의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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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에 吳明仲(1619-1655)이라는 이가 조성했다는 명옥헌(鳴玉軒)에 다다르니 연못가에 처음 보는 꽃들이 길손을 맞이하는데, 이 꽃들이 신기하기도 하다. 몇 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나무가 온통 꽃으로 덮여 있다. 이름하여 '배롱나무꽃'이란다.  

   작은 꽃송이들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엉겨붙어 있는 이 꽃은 7월에 피어 100일을 간다 하여 백일홍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화초백일홍과 구별하기 위하여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권광중 원장님으로부터 들었다. 담양군에서는 배롱나무를 가로수로 가꿀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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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부지방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렇다 치고 광주 출신의 연수생들조차 처음 본다 하니, 우리나라  꽃의 다양함에 감탄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공부에만 매달려야 하는 연수생들의 좁은 견문을 한탄하여야 하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그 후 영암을 오가면서 길에서 심심치 않게 목백일홍을 볼 수 있었다.    


   그림자(影)가 쉬고(息) 있는 곳, 식영정(息影亭)은 松江 鄭 澈의 가사 '星山別曲' 첫머리에 나올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金成遠이라는 이가 1560년에 지었다 하니 벌써 440여년 전의 일이다.

   아름드리 늙은 소나무에 둘러싸인 이 정자의 마루에 서면 발 아래로 여울(자미탄)과 호수(광주호)가 보인다. 빗속을 뚫고 찾아온 客들의 정성을 환영하는 것일까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더 머물다 가라고 소매를 부여잡는다.  04.jpg

 

   시간에 쫓겨 떠나야 하는 아쉬움을 식영정 밑의 또 하나의 정자인 서하당(棲霞堂) 툇마루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대신하였다(기실은 식영정은 서하당에 딸린 정자이다).

   園林 답사의 종착역 소쇄원(瀟灑園)은 식영정에서 지척의 거리에 있다. 입구의 하늘을 가린 대나무 숲을 한 동안 지나자 草屋의 정자가 먼저 나그네를 알아본다. 마루에 걸터앉아 기다리면 봉황이라도 날아오려나, 이름하여 待鳳臺이다. 그래서인가 그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봉황의 울음소리처럼 귓가를 간지럽힌다.
   이곳을 지나면 곧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나타나고 그 안으로 들어서면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등의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 園林을 조성하였다고 하는 梁山甫(1503-1557)라는 이는 왜 이리도 어려운 글자를 써서 이름을 지었을까 하고 서울에 돌아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들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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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보가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하고,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을 '제월당', 계곡 가까이 세운 누정을 '광풍각'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주무숙의 인물됨을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 如光風霽月), 뜻을 새기자면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도 같네'라고 한 데서 따온 것이다"  

   소쇄원을 나와 광주지방법원으로 가기 위하여 무등산을 넘는 길에 忠壯嗣에 들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큰 공을 세운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그런데 안내판에 적힌 그의 기구한 운명이 망월동 묘역에 이어 또 한 번 나그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전쟁이 끝난 후 李夢學의 亂에 연루되어 무고하게 獄死하였는데, 그 때 나이 겨우 29세. 억울한 죽음이 언제나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려나....  

   망월동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명옥헌에서 배롱나무 숲과 그 꽃을 감상하고,
   식영정에서 송강의 성산별곡을 읊어보고,
   소쇄원에서 자연과 어우러진 정원을 감상하며 명옥헌과 비교한 후,
   충장사에서 拷問致死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하라                                                         (털보禪師 記).

그러나 아쉽게도 사전 준비가 전혀 없었기에, 아는 만큼이 아닌 본 만큼만 느껴야 했다.  

   權원장님의 下命대로 답사를 마치고 법원에 도착하니 어느 새 날이 저문다. 점심을 햄버거로 때운 탓인가, 원장님의 세심하고 따뜻한 배려가 깃듦에서인가, 원장님이 사 주신 불고기가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연수생들이 마치 시골 할아버지처럼 구수하고 정겨운 분이라고 표현한 원장님의 전송을 받으며 월출산으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이내 차 안을 진동하는 코고는 소리.... 그래 피곤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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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6시부터 설친 보람도 없이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태풍이 서해바다로 빠져나갔다고 하는데, 비는 여전하다. 단지 굵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간밤을 보낸 월출콘도(지난 6월에 문을 열어서인지 깨끗하고 조용하다)가 바로 산 밑에 있건만, 구름에 가려 月出山의 자태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산이 높아서 구름이 못 넘는 것일까, 外地人에게 내 모습 보이기 부끄러우니 네가 가려달라고 산이 붙잡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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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縱走하는 데 7시간이면 충분하다기에 비가 개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시계는 어느 덧 9시를 지나 10시를 가리킨다. 등산을 단념하고 해남이나 강진의 문화탐방을 하자고 하니, 연수생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특히 紅一點 양소영 연수생과 미국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MT에 참가한 권태일 연수생이 제일 좋아한다. 그래 아직은 山行의 맛을 알기에는 이른 나이들이지...  
   어디를 갈까 설왕설래하는 중에 갑자기 창 밖이 환해지고 월출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게 웬 일, 날이 갠 것이다. 문화탐방 취소!

   콘도의 주인이 운전하는 봉고차를 타고 道岬寺로 향했다. 본래 天皇寺 쪽에서 등산을 시작하려고 계획했었으나, 아무래도 날씨가 미심쩍어 밋밋한 코스인 도갑사 쪽을 택한 것이다. 여차하면 되돌아올 판이다. 07.jpg

 

   오전 10시 30분.  


   드디어 산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등산로는 도갑사 경내를 지나서 시작된다. 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는 천년고찰 도갑사는 의외로 규모가 큰데, 전국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는 예의 佛事 때문에 산만한 모습이다. 언제나 조용한 본래의 山寺 모습을 띠려는지...

   산행을 시작한지 30여 분, 첫 번째 장애물을 만났다. 도갑사에서 월출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능선이 나타날 때까지는 계곡을 따라,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가로질러 조성되어 있다.
   그 계곡을 가로지르는 첫 번째 지점에 다다랐는데, 간밤에, 아니 지난 며칠 내린 비로 계곡물이 불어 등산로를 덮은 것이다. 마침 샌달을 신고 온 전성우 연수생이 달려들어 돌다리를 놓음으로써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몇 번 계곡을 가로질러야 했는데, 다행히 이미 돌다리가 놓여 있거나 새로 설치함으로써 지나갈 수 있었다.  

   계곡의 통과가 첫째 장애물이라면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가 둘째 장애물이다. 차라리 쏟아지면 우산을 쓰든 비옷을 입든 하겠는데, 이도 저도 아닌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던가, 모르는 사이에 온 몸이 축축해졌다.  

   땀에 젖고 비에 젖어 산을 오르기를 한 시간 삼십 분 남짓, 물안개 속에 홀연히 초원지대가 나타났다. 마침내 하늘이 보이고, 능선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 억새 밭, 그 사이로 난 잘 정돈된 오솔길. 그 환상적인 멋에 탄성이 절로 나는 순간이다.
   거기에 저 아래로부터 불어와 이마의 땀을 씻어주는 시원한 바람이 세속의 번뇌까지 실어간다. 처음 출발할 때 입이 나왔던 연수생들도 올라오길 잘했다고 異口同聲이다. 양소영 연수생은 사귀는 남자친구와 다시 한 번 꼭 오겠다고 벼르기까지 한다.  

   억새밭에서 九井峰으로 향하는 초원의 능선길이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데, 박태현 연수생의 표현처럼 마치 天國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이후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 길은 폭이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면서 찾는 이를 무료하지 않게 해준다.  

   도중에 빗줄기가 여전히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미 옷이 다 젖어버렸기 때문에 우산을 쓸 필요도, 비옷을 입을 필요도 없게 되었다. 월출산을 누가 돌산이라고 했던가, 나무와 풀잎이 무성하여 길을 잃지 않으려고 여러 번 조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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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새밭을 떠난 지 한 시간, 드디어 九井峰에 도착했다. 월출산에서 天皇峰(809m)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해발 738m이니, 강원도 같은 데 가져다 놓으면 별 것 아닌 봉우리이지만, 월출산은 바닷가 평야지대에 돌출한 산이기 때문에 결코 낮은 것이 아니다.  
   월출산의 경치는 구정봉에서 보는 것이 제일 빼어나다는데, 달 뜨는 모습은 고사하고 전후좌우로 보이는 것은 온통 구름뿐이다. 처음 온 낯선 사내들에게 속 모습을 보이기를 꺼려하는 것을 어찌하랴.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이라고도 하고, 어느 건방진 한량이 이 곳에서 하늘에 대들다 아홉 번 벼락을 맞은 곳이라고도 하는 구정봉의 정상에는 20여명이 앉을 정도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 구덩이(井)가 파여 물이 고여 있는데(용이 놀았던 곳인지, 벼락을 맞은 흔적인지 알 길이 없다), 빗속에서 개구리 4마리가 놀고 있었다. 쯧, 九井峰이 아니라 사와봉(四蝸峰)인 셈이다.  

   가져간 도시락을 펼쳐 놓고 주린 배를 채우노라니, 빗줄기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굵어진다. '비에 젖은 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산을 논하지 말라'는 것일까. 시계 바늘은 어느 덧 오후 1시를 넘고 있다.  

   어디로 갈 것인가? 縱走를 하려면 천황봉 쪽으로 가야 하지만, 자신이 없다. 서울 갈 비행기 시간도 문제려니와, 무엇보다도 천황봉에서 하산하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는데 과연 이 빗속을 뚫고 갈 수 있을까? 그러다 조난이라도 당하면?  
   이왕 온 김에 종주를 하자는 김관하 연수생 등 강경론자들을 다음에 다시 오자고 달랜 후, 결국 눈물의 回軍을 하여야 했다. (1999.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