滄浪之水가 淸兮면....(한라산)

2010.02.16 11:26

범의거사 조회 수:6199

 

 

       滄浪之水가 濁兮면....
 
   1997.6.14. 08:50 해발 1,915m의 지리산 天王峰에서 제1차 全國姓氏大會가 열린 후 江湖諸位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1998. 2. 8. 11:50 해발 1,950m의 한라산 白鹿潭에서 第二次 全國門中大會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각 門派를 대표하여 대회에 참석한 8인의 面面을 보면, 하나같이 一當百의 猛將들이다. 


한라산1.jpg

 

落星山 申平山派 暎澈去師(낙성산 신평산파 영철거사)

太陽山 柳瑞嶺派 元奎道士(태양산 유서령파 원규도사)
錦城山 羅羅州派 千洙公子(금성산 나나주파 천수공자)
對馬山 李全州派 仁宰導主(대마산 이전주파 인재도주)
周王山 任豊川派 勝淳總帥(주왕산 임풍천파 승순총수)
不甲山 鄭晋州派 長吾大師(불갑산 정진주파 장오대사)
香積山 金光山派 永甲幇主(향적산 김광산파 영갑방주)
走遊山 閔驪興派 凡衣居士(주유산 민여흥파 범의거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至尊 炯漢禪師(지존 형한선사)와 嚮首 大勳道令(향수 대훈도령), 그리고 總領 亨夏白頭(총령 형하백두)가 각 門派의 大小事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 * * *  

   "기상!"

   인솔대장 任總帥님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켜진 환한 불빛에 눈을 뜨니 왼쪽으로는 昨醉未醒의 柳道士께서 半裸 차림으로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오른쪽에는 언제 들어 오셨는지 申去師님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분명 어제 밤에는 거실에서 잠자리에 들었었는데... 

   그리고 먼발치에서는 李導主님이 상기도 술 냄새가 펄펄 나는 입으로 하품을 하신다. 간밤에 그렇게도 난리를 치시더니만 피곤한 형상이다. 그래도 쌍화차를 먹고 자서 그런가 얼굴에 화색이 남아 있다. 

 
   원 세상에, 밤 10시가 넘은 한라산 중턱에서 쌍화차를 시키라고 그 성화를 부리다니.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전화기와 씨름을 한 나도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언제나 점잖은 선비형인 羅公子님은 벌써 출발 준비를 끝내신 모양이다. 고뿔로 고생하면서도 부지런하시긴.  

   언뜻 시계를 보니 5시30문, 창밖은 물론 칠흑같이 어둡다. 어제 제주공항에서부터 우리 일행의 운송을 책임진 기사양반은 진작부터 밖에서 봉고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다. 이 새벽에 고맙기 짝이 없다.  

   서귀포 시내에서 조개 半 국물 半의 오븐작 해장국으로 요기를 하고 봉고차로 해발 750m의 성판악으로 이동하였다. 이번 산행의 출발지이다. 이 곳에서 백록담까지의 거리는 9.6Km. 출발시각은 아침 7시 40분. 이번에도 선두는 申去師님이다.  

   그런데,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 후 1시간 20분만에 4.8Km지점에 도착하였다. 다리에 힘이 있을 때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江湖를 떠나실(去) 분이 힘도 세시다. 

비록 立春이 지나 봄기운이 완연하고 경사가 완만한 산록이긴 하지만, 가만있으면 아직은 찬 기운이 살 속을 파고드는 때인데도,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입에서는 단내(臭)가 나고, 등에서는 단내(川)가 흐른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하면서는 암암리에 의견이 모아져 永甲幇主를 앞세웠다. 硏山會(硏修院山岳會)의 원거리 산행에 처음으로 참가하였기 때문에 천천히 갈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줄이야. 申去師님보다 한 술 더 뜬다.

 

한라산2.jpg

 

  바짓가랭이에서 휭휭 소리를 내더니만 순식간에 휑하니 가버려 아예 보이질 않는다. 작년 지리산에서의 大勳道令에 비길 만하다. 한참만에야 따라잡고 통사정을 하였다. 제발 좀 천천히 가자고.


   성판악부터 백록담 아래까지의 산길은 눈 또는 눈이 녹은 얼음을 뒤집어 쓴 나무들 사이로 계속 이어진다. 나무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서 입에 넣으면 그 맛이 일품이고 갈증 해소에는 그만이다. 

그러기에 히말라야나 알프스의 산들이 비록 萬年雪을 자랑하긴 하나 풀 한 포기조차 접근을 허용하지 않아 죽어 있는 山이라면, 한라산은 살아 숨쉬는 생명의 山이라고 하지 않던가.  

   숲속의 오솔길은 겨우내 내린 눈으로 다져져 평탄하기 짝이 없다. 돌이 많기로 유명한 제주도이니 평소 같으면 돌부리가 수시로 발끝에 채일 법한데 오늘은 전혀 모르겠다. 모두 눈 속에 파묻힌 까닭이다. 그만큼 걷기에는 안성마춤이다. 그래서 한라산은 겨울산행이 오히려 쉽다고 李導主께서 거든다.  


   이번 門中大會에서는 李導主님의 博學多識이 단연 돋보였다. 특히 어제 시간이 남아 잠시 들른 식물원 如美地에서의 한국정원에 관한 설명은 壓卷이었다.

 

한라산3.jpg

 

   같은 동양인데도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정원에는 정자가 연못가에 서 있는데, 그 기둥의 주춧돌 중 두 개는 반드시 연못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자에서 노니는 선비가 발을 씻는 것을 상징한단다. 그리고 그 발은 단순한 발이 아니라 곧 선비의 마음이란다. 

   이 정도의 風月로도 모두 입이 벌어졌는데, 그와 관련하여 덧붙인 다음과 같은 일갈이 그만 벌어진 입을 닫지 못하게 하였다.

   "滄浪之水가 淸兮면 可以濯我纓이요 濁兮면 可以濯我足이니라."


   그 뜻인즉,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면 되고, 더러우면 발을 씻으면 된다는 것이다. 

   屈原(굴원)이 擧世皆濁我獨淸이요 衆人皆醉我獨醒(세상이 다 혼탁하여도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도 나 혼자 깨 있으리)이라고 잘난 체 하는 것을 한 漁夫가 점잖게 타이른 말이라나.  

   李導主님의 한라산에 관한 설명에 잠시 귀기울이는 사이 任總帥께서 길 옆 눈 속에 푹 빠졌다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다져진 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곧바로 눈에 가려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진다는 터줏대감 鄭大師의 주의를 무시하고 메마른 땅에 거름(?)을 주기 위하여 길을 한 발짝 벗어났다가 곤욕을 치른 것이다. 

    환경보호법의 施肥未遂罪(시비미수죄. 同法 12조12호, 10조, 형법 25조)에 해당하지만 고발은 않기로 했다. 총 9시간여의 대회기간 중 이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者 아무도 없을 것이기에.  

 

한라산4.jpg


   山行을 시작한 지 3시간, 관목 숲이 끝나며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고, 평원에 하얀 주발을 엎어 놓은 듯한 거대한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 사람들은 저 모습을 여자의 젖가슴으로 비유한다지. 그러면 그 안에 있는 흰사슴연못(白鹿潭)은 무엇에 비유할까.  


   四圍는 은빛 천지인데 千變萬化의 氣象造化를 일으키는 구름이 봉우리에 걸려 넘지 못하고 용트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장관이다.
 

   혼자 보기가 아까워 민사판례연구회 발표논문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어느 교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睦부장! 여기 백록담 밑인데, 정말 너무 멋지다. 내 머리 털 나고 이런 장관은 처음이다."  
   "야, 이눔의 시키, 너 지금 누구 놀리는 거야?"  
   "어허, 그 사람, 명색이 교수가 점잖지 못하게 그 무슨 상소리인가."
   "뚜-뚜-뚜-"


   11시50분. 드디어 해발 1,950m의 한라산 정상이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대신 구름과 해가 龍爭虎鬪를 하는 틈틈으로 저 아래 白鹿潭이 보인다.

 

한라산5.jpg


   호수물이 언 얼음 위로 흰 사슴이 뛰어 놀다 금방 달려 올 것 같다. 아니 세찬 바람에 구름을 타고 날아올라 머리 위로 下降할 듯하다. 그러나 그 사슴을 맞이할 선녀도 나무꾼도 없는 것이 안타깝다. 丹田 깊은 곳을 한라산의 精氣로 가득 채우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각 門中의 안방마님들께 登頂申告를 하랴, 훗날 門中大會의 개최 여부를 둘러싼 분쟁을 막기 위한 증거로 갑제1호증을 남기랴 부산을 떨다 보니 정상에서의 예정된 30분이 후딱 지나간다. 8.3Km의 갈길이 머니 下山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다.  


   성판악코스의 올라온 평탄길을 굳이 마다하고 申去師님께서 깎아지른 절벽을 지나는 관음사코스로 방향을 잡았다. 무릇 江湖人에게는 온 길로 되돌아가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없다고 하시니, 아래 것 주제에 따를 도리밖에.  

   한라산의 북쪽으로 나 있는 이 아래뫼길은 험하기는 해도 경치가 앞서 온 길에 비할 바 아니다. 눈의 무게를 못 이겨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들 사이로 꼬불꼬불 내려가는 길이 지루함을 모르게 한다. 양쪽 나무의 줄기가 맞닿아 눈나무 동굴을 이룬 곳도 있다.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고도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눈을 못 이겨 부러지는 나뭇가지에서 사랑의 힘을 배우라고 갈파하신 法頂스님의 說法이 어렴풋이 전해져 온다.

 

한라산6.jpg

 

   예의 博學한 李導主께서 한라산의 그랜드캐년이라고 일컫는다고 가리키는 곳에 다다르니, 수줍은 듯 구름에 희끗희끗 가렸다 雄姿를 드러내는 千崖의 절벽이 탄성을 저절로 자아내게 한다.

   百聞不如一見이라던가, 직접 와보기 전까지는 한라산에 이런 秘境이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너나 할 것 없이 別有天地非人間이 된다.      


   하산길만 만나면 펄펄 나시는 柳道士님이 오늘은 어인 일로 悠悠自適이다. 연유를 물은 즉, 무릇 산은 낮이건 밤이건 간에 낑낑대고 올라갔다가 후딱 내려오는 것이 제일 나쁘다고 하신다. 실로 深奧하기 이를 데 없는 경험철학(?)의 발로이다.  


   이제껏 순탄하기만 하던 門中大會가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한 것은 하산길로 접어 든 지 1시간 쯤 지났을 때였다. 

   어느 새 배꼽시계가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다. 마침 어느 고마운 분이 야영텐트를 치기 위하여 눈덩이를 쌓아 방풍벽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어, 그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준비하였다.  

   2분만 끓는 물속에 담그면 기막힌 밥이 저절로 되니 마누라보다도 더 좋은 것이 아니냐고 李導主께서 침이 마르도록 추천하는 바람에 어제 任總帥님과 내가 제주시에서 거금을 들여 사 온 햇반(제일제당에서 최근에 야외용으로 출시한 것임)으로 점심을 해결할 참이다. 

   계곡의 얼음 밑을 흐르는 淸淨水를 퍼다 끓인 물에 햇반을 2분간 담갔다 꺼냈다. 침이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게 웬 變故!  


   첫술을 넣는 순간 입안 전체에 퍼져 오는 싸늘한 冷氣라니.... 그 기막히다던 따끈한 밥은 어디 가고 얼음덩어리만 씹힌단 말인가. 

   정신을 차리고 겉봉의 설명문을 자세히 읽어 보니 맙소사, 전자레인지에서 2분이란다. 물에서는 10분을 끓여야 한다는 것이다. 8개를 끓이려면 80분! 집에는 언제 가누. 서산에 지는 저 해는 어찌하고. 

 
   기막힌 밥맛이 아니라 기막힐 노릇이다. 비상식량인 컵라면 3개와 2분씩 데운 얼음과자 햇반 4개로 8대 門中의 長老들이 허기를 달래고 서둘러 하산길을 재촉하여야 했다. 그 세찬 바람이 불던 정상에서도 몰랐던 寒氣가 왜 그리도 뼛속까지 파고 드는지....  

   추위를 이기려고 걸음을 재촉해서인가, 下山을 끝내고 관음사 앞의 주차장에 닿았을 때는 오후 4시 30분이 채 안되었다. 예정시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도착한 것은 8대 長門이 시종 八體一心으로 合心한 덕이리라.  


   1983년 가을에 처음 올랐다가 재작년 여름에 영실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미수에 그치고, 결국 15년만에 다시 찾은 한라산. 그것도 겨울에 눈 덮인 모습을 가까이서 보았기에 더욱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김종원이란 시인이 쓴 '한라산'이란 詩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멀리서 보면 내 키만한데
      가까이 가면 하늘이다."  

(1998.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