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無에 울고(치악산)

2010.02.16 11:28

범의거사 조회 수:10408


                 三無에 울고


   원장님,

   원장님의 6/26자 편지를 늦게야 본 것은 그 날 금요일은 하루 종일 회의와 시험감독으로 시간을 보냈고, 이어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역마살(驛馬煞)을 풀기 위하여 치악산에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산봉우리에 비로봉(소백산, 오대산, 치악산...)이 많듯이 그 산 속에 있는 절에 上院寺도 많지요. 보름 전에 오대산의 上院寺를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치악산의 上院寺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으니 이는 무슨 인연일까요.
   게다가 19년 전 연수생 시절에 딱 한 번 올랐던 산을 그로부터 19년 후 연수원 교수가 되어 연수생들을 데리고 오르게 됨은 또한 무슨 업보일까요?

   ‘적악산’(積岳山)이라는 이름을 ‘치악산’(雉岳山)으로 바꾸게 한 구렁이와 꿩의 전설이 얽혀 있는 上院寺의 梵鐘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01.jpg

과연 꿩의 머리가 부딪친다고 소리가 울릴지 의심이 들었고, 그래서 그 옛날의 그 종이 아닐 것이라는 상념에 잠시 젖어들다가, 내 이 무슨 어리석음에 빠져있는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이 소인배적 사고방식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는지요.

   범종 옆에 서 있는 계수나무가 신기하였습니다. 저는 달나라에만 있는 전설의 나무인 줄 알았는데, 짧은 식견이 한 순간에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동행한 제 지도반의 사법연수생(28기)들도 모두 처음 본다고들 하긴 하였지만, 그들은 학생이고 저는 명색이 선생인데.....(사또님은 물론 이미 보신 일이 있으시죠?)

   기독교를 믿는 연수생들도 생각 밖으로 절에서의 하룻밤을 즐거워하였습니다. 종교를 떠나서 참선은 곧 자기 마음을 닦고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저의 말에 스스럼없이 법당에서 참선의 시늉을 내보기도 하더군요. 나중에 물어본 즉, 가부좌를 틀고 앉으니 온갖 잡념이 떠올라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는 연수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기야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겠습니까? 一切衆生이 皆有佛性이라지만, 솔직히 사또님 같은 분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겠지요.

   해발 1,100m에 위치한 山寺의 아침 공기는 말 그대로 자연의 숨결 그 자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공양주 보살님이 정성스레 싸 주신 주먹밥을 하나씩 배낭에 챙겨 넣고 16.5Km에 달하는 치악산 종주길에 나섰습니다.
   이 때가 아침 7시 50분. 그로부터 11시간을 산 속에서 헤매고 헤맸답니다.  

   지도상으로는 능선길로만 따라가면 치악산의 정상인 비로봉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길래, 필요하면 안내인을 동행케 하여 주겠다는 原州支院長(朴炳大 부장판사)의 호의도 거절하고 우리끼리 가기로 쉽게 생각하였던 게 큰 오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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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상 능선길에 오르니 곳곳에서 갈림길을 만나야 했는데, 명색이 국립공원이고 입장료를 받는 이 거대한 산의 등산로에는 이정표는 고사하고 그 흔한 리본조차 구경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외길로 쭉 뻗어 있는 곳에는 앞으로 얼마를 가면 어디고, 뒤로 얼마를 가면 어디라는 너무나도 친절한(?) 이정표를 세워 놓고는, 정작 갈림길에 닿으면 알아서 가라는 듯이 아무런 표시를 하여 놓지 않는 국립공원 관리자들의 三無(無感覺, 無關心, 厚顔無恥)에 혀를 내둘러야 했습니다.  
   도대체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일까요? 국민(등산객)을 위해서? 아니면 공단직원의 생존을 위해서?  

   上院寺가 위치한 남대봉에서 향로봉을 거쳐 비로봉까지 3/4 정도는 그래도 고비를 넘기며 잘 갔는데, 결국 失足을 하고 말았습니다.
   본래 12시에 도착예정이었던 비로봉 정상을 비 오듯 쏟아지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겨우 밟은 때는 오후 4시.
   기가 막히더군요. 애꿎게 원주산악회(이런 단체가 있는지도 모르지만)만 욕을 먹었지요. 도대체 무엇들 하느라고 자기네 본거지의 등산로에 리본 하나 제대로 매 놓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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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봉 정상(해발 1,288미터)에는 ‘미륵탑’이라 이름지어진 돌탑이 세 개 세워져 있었습니다. 마이산의 유명한 돌탑들을 닮았더군요.
   1960년대 중반 龍創重이라는 분이 한 반도의 중심부에 돌탑을 세우면 국운이 번성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는 10여 년에 걸쳐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三道의 돌을 모아다 이 곳에 탑을 세 개 쌓은 후 散華하였답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나름대로 헌신한 한 인간의 삶을 내심 그려보았지요.  

   힘들여 높은 산의 정상에 오를 때는 발 아래로 펼쳐지는 장관들을 보는 즐거움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구름 속에 갇힌 처지인지라 줄기줄기 뻗어 나간 산자락들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컸지만, 장마철의 산행에서 비를 만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고 하산길을 서둘렀습니다.

   그 험난함 때문에 치악산으로 하여금 '치를 떨고 악에 바치는 산'이라는 惡名을 떨치게 한다는 사다리병창, 이 곳을 지나 구룡사(龜龍寺)로 내려가는 길을 굳이 하산길로 잡은 것은 이왕 버린 몸, 치악산을 연수생들의 뇌리에 영원히 남게 해 주려고 함이었답니다(그래서 얻는 게 뭐지요?).  


   연수생들이 다리가 아프다고 중간 중간 쉬었다 가자는 것을, 기차시간 때문에 안 된다고 다그치며 양떼 몰듯이 몰았지요. 지도교수 잘못 둔 탓에 고생한다는 원망의 눈빛이 역력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 팔자소관으로 돌리라면 너무 무책임한가요?  

   그래도 여자 연수생 두 명을 포함하여 모두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한 명의 낙오자 없이 11시간의 산행을 무사히 마친 후에는, 힘들었던 여정을 돌이켜 보며 뿌듯해하더이다. 은근과 끈기 빼놓으면 한국인에게 남는 게 뭐 있나요? 월드컵 축구팀에서는 그마저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19년 전에는 구룡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종주코스를 택하였고 이번에는 그 逆順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한 가지 공통점은 그 때나 이번이나, 비로봉 근처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20년이 지나도록 머리가 깨지 못한 소생의 잘못으로만 치부하여야 하나요? 머리 나쁜 것도 죄가 됩니까?

   성불하소서!

                                  1998. 6. 29.  
                                         凡衣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