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별빛이라(해남 大興寺, 一枝庵)

2010.02.16 11:30

범의거사 조회 수:6373

 


                 번뇌는 별빛이라



   1999. 2. 24. 새 학기 시작을 앞두고 며칠 휴가를 내 한반도의 남쪽 끝 해남에 있는 大興寺(권광중 광주지방법원장님이 소개해 주셨다)를 찾았다.
   이 절은 지난 1997. 11. 2.에 해남, 강진, 보길도의 유적지를 살피는 길에 들른 일이 있던 곳인지라 전혀 낯선 곳은 아니다. 다만, 당시에는 佛事가 진행중이어서 시끄러웠는데, 이제는 공사가 끝나 頭輪山(大芚山)의 깊은 산중에 말 그대로 고요히 은둔하고 있었다.  
01.jpg

 

   그 위치를 일러 일찌기 서산대사께서 '三災不入之處'라고 했으니, 전쟁과 화재와 질병의 세 가지 재앙이 들지 않는 명당인 셈이다. 한양땅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오지에 위치하고 있는 터라 찾는 이가 적은 즉, 자연히 사람으로 인한 재앙이 없을 수밖에.  

   온 세상이 잠들어 있는 새벽 3시, 예불시간임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맞추어 법당에 꿇어앉는다.  

  "나는 과연 판사를, 사법연수원 교수를 계속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自愧感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아 어차피 잠 못 이루는 나날이었기에, 아무리 이른 시간의 예불이라도 힘들지 않다.  

   대웅전의 새벽 寒氣가 뼛속으로 파고든다. 頭輪山의 한복판 九龍爭處(頭輪山에는 9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9개의 봉우리가 다 내려다보고 있는 한 가운데에 大興寺가 자리잡고 있다)에 깊숙이 자리한 山寺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肉身의 寒氣는 잠시의 고통일 뿐, 마음 속 깊이 자리한 寒氣가 정작 더할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 준다.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또 빈다.

   부처님,

   제 몸, 제 마음, 제 입으로부터 생겨난 온갖 죄업을 남김없이 씻고 싶습니다. 아집을 벗어 던지고 번뇌로부터 해방되고 싶습니다. 나와 남을 집착하고 그른 길만 찾아다닌, 이제까지의 크고 작은 많은 허물들을 용서받고 싶습니다.

   百八拜를 하고 또 한다. 밥 한 그릇, 나물 한 접시로 공양을 한 후, 月佑스님이 정성껏 끓여주시는 연꽃차로 목을 축이고 다시 법당에 엎드린다. 그 사이 창 밖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한다.  

   계속되는 참배에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온 몸이 파김치가 된다.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참선을 하며 한 숨 돌린다. 번뇌를 떨치고자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다면, 허공에 뜬 달을 보고 소리쳐 울기라도 해볼까.  

   절에서 특별히 마련해 준 별채의 거처가 본래 西山大師의 유물(宣祖 임금이 하사하신 금란가사와 玉발우)을 보관하던 곳으로서, 高僧들만 대대로 묵던 곳이란다.
   나에게 왜 이런 곳을 내 주었을까? 내 얼굴에 쓰여진 번뇌를 스님들이 읽으신 것일까? 02.jpg

 

   이 곳에 도착하기 전 잠깐 얼굴을 뵌 권광중 원장님이 "나보다 먼저 머리를 깎는 일은 없어야 하네" 하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신 것이 떠오른다. 까마득한 후배에 대한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이 새삼 고맙게 전해져 온다.
   나도 이 다음에 과연 당신처럼 후배들을 대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거추장스런 존재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해본다.

   이 곳에 온 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그 며칠이 마치 몇 년 같이 느껴진다. 이제는 그래도 머리가 어느 정도 맑아짐을 느낀다.
   빈 대에 황촛불만이 말없이 녹는 밤이다. 그 밤이 깊어가고 풍경소리만이 그윽한데, 모두 잠든 절 마당에 혼자 서서 별들을 헤어본다. 밝은 하늘은 쳐다보기가 부끄러워 밤하늘만 바라본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 날들이 별들 사이로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욕심 내고, 성내고, 잘난 체 했던 탐진치(貪瞋癡)의 세월이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처량함은 본디 그래서인가, 아니면 듣는 내 마음이 그래서인가?  

   권광중 원장님이 오셨다. 아끼는 후배가 혹시 무슨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싶어 걱정이 되어 멀리 광주에서부터 일부러 찾아오신 것이다. 3.1절 連休라 사모님이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오셨는데도....  

   나를 보시자마자 "득도했어요?" 하시며 환하게 웃으시는 얼굴을 대하려니 눈물이 핑 돈다. 정말이지 나도 이런 사랑을 후배들에게 베풀고 싶다. 그런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제자를 둘 수만 있다면....  

   權원장님을 모시고 大興寺의 末寺인 一枝庵으로 올라갔다. 本寺로부터 걸어서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一枝庵은 조선시대 후기에 秋史 김정희와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던 草衣禪師께서 40여년간 머무시면서 이 땅에 茶道를 일으킨 암자이다. 당신이 기거하시던 한 칸짜리 草堂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름만 초당일 뿐 이제는 와당으로 변해버린 강진의 다산초당과는 달리, 말 그대로 여전히 초당이다.  

   암자 앞 뜰에다 차밭을 일구어 草衣禪師의 茶道를 이어가고 계신 주지 如然스님과 스님으로부터 茶道를 배운 명은당보살(權원장님께 茶道를 전수한 스승이기도 하다)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나의 雅號가 凡衣로서 흔히 '凡衣居士'라고 부른다고 하니까, 草衣禪師가 환생하신 줄 미처 몰랐다면서 如然스님이 파안대소하신다.
   權원장님이나 나나 모두 如然스님이 초면인데도, 서로 의기투합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각종 茶(특히 떡차는 처음 마셔 보았다)를 즐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결국 權원장님은 밤이 한참 깊어서야 광주로 돌아가시고, 나는 草衣禪師의 草堂에서 혼자 하룻밤을 지새게 되었다. 장작불을 지피고 뜨뜻한 구들장 위에 누우니 신선이 된 기분이다.
   초당을 둘러싼 대나무숲이 세찬 바람에 흔들려 영낙없는 파도소리를 낸다. 깊은 산속의 파도소리라. 그 파도에 번뇌를 실어 보낸다.  

   一枝庵에서 생각지도 않은 하룻밤을 보내는 바람에 예정보다 하루 늦게 歸京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아쉬움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판사인가에 대한 답은 숙제로 둔 채, 훈장 노릇만큼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부처님께 작별을 고했다. (1999.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