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소백산)

2010.02.16 11:21

범의거사 조회 수:9419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여보,여보, 일어나요. 3시40분이에요"
   "뭐! 아니 근데 왜 따르릉이 안 울렸지?"

   몇 달 전부터 說往說來하던 우여곡절 끝에 철쭉을 보기 위한 小白山行의 일정과 참가자가 최종 결정되어 통보를 받은 것이 어제(1996. 6. 8.)였다.  
   참가자의 면면이 우선 재미있다. 충주 시내에서 각자 병원을 열고 있는 金院長(피부비뇨기과), 白院長(정형외과), 尹院長(내과), 邊院長(산부인과), 孔院長(신경정신과) 그리고 支院長(사회병리과?), 이렇게 종합병원을 차려도 될 각종 院長들 및 그 부인들이 주인공이다. 종합병원을 차리면 사회병리과의 支院長은 원무과장을 겸직할까... 아무튼 도중에 누가 發病을 해도 걱정 없을 듯하다.  

   그래서 그런가, 짜놓은 일정이 살인적(?)이다. 金院長과 邊院長 그리고 나는 선발대로 차출되어 집에서 새벽 4시 출발, 5시 전후 竹嶺의 희방사 입구에서 산행 시작이란다. 등산인지 전쟁인지 모를 지경이다.
   '아야' 소리 한 번 못할 형편인지라 체념하고 자명종을 3시30분에 맞추어 놓고 잠이 들었는데, 시계가 주인 사정을 아는지 그냥 통과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할 일이 있으면 예외 없이 잠을 설치는 御夫人 덕분에 안 떨어지는 눈을 비벼야 했다.  

   밤새 한 잠도 못 잤다며 꼭 이런 식으로 山行을 하여야 하느냐, 안 가면 안 되냐는 항의에 동조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특히 작년에도 한 번 가 본 일이 있는 나로서는 사실 소백산 철쭉을 꼭 보아야 한다는 절박함의 정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덜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金院長이 모는 비행기(워낙 빨리 몰아 車라기보다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낫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 새 희방사 입구다.
   차안의 시계를 보니 5시. 일찍도 왔구나 하는데, 아니 벌써! 주차장에 승용차는 물론이거니와 관광버스까지 즐비하다. 도대체 잠도 안 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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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방사 입구 주차장에서 소백산천문대가 위치한 蓮花峰까지는 대략 4킬로미터 정도 된다. 주차장을 벗어나 등산로로 들어서니 야영텐트들이 눈에 들어온다. 곳곳에서 20대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 라면을 끓이고 있다. 아직은 한기가 옷 속을 스며드는 깊은 산 속인데, 텐트 속에서 밤을 보낼 수 있는 그들의 건강이 부럽기만 하다.  

   현존 最古의 活字本인 다라니경이 발견되어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도 소개되는 유명한 절인 희방사(짓방사라고도 한다)는 명성에 비하여 너무 초라하다. 특히 대웅전 앞의 돌다리는 철제난간으로 인하여 영 볼 품이 없다.  

   평소에 술에 곯아 이런 기회에 酒毒을 빼야 한다는 邊院長이 맨 앞에서 워낙 빨리 걷는 통에 산행 시작 1시간도 안 되어 숨이 차다. 등에는 벌써 땀이 흥건하다. 사정을 해서 잠시 쉬며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산 위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근처를 산책하는 사람들은 아닐테고...   이상해서 어디서 오냐고 물으니, 맙소사! 비로봉에서 온단다. 새벽 2시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3시 40분에 투덜거리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내심 부지런함을 자랑하던 내가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나저나 이 사람들은 산에서 무엇을 보지? 오르고 내리는 것, 그 자체 즐거운데 무엇을 더 바랄쏘냐란 말인가? 하기야, 산이 있기에 산을 오를 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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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白山은 단양, 영주, 봉화 및 죽령의 각 방면에서 오르는 코스가 많이 있는데, 竹嶺의 희방사 입구에서 오르는 코스는 희방사를 지나면서부터 나타나는 깔딱고개가 아주 힘들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계단의 연속이다. 대개 이 계단 오르기에서 제풀에 지치고 만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헉헉거리며 오르는데 하늘이 노랗다. 그런데도 철의 사나이들인 金院長과 邊院長은 힘들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깔딱고개가 끝날 즈음부터는 아예 金院長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나하고 步幅을 맞추다가는 不知何歲月일 듯하니 그냥 앞서 간 모양이다. 에구구, 의리라고는....
   '억울하면 출세하라'가 아니라 '억울하면 체력을 길러라'이다. 물도 안 마시고 휙휙 바람소리를 내며 걷는 그 힘이 부러울 뿐이다.
   나도 은근히 오기가 나서 蓮花峰까지 더 이상 쉬지 않고 걷기로 했다. 걱정이 되는지 邊院長이 힘들면 쉬어 가자고 하는 것을 괜찮다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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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蓮花峰이 바라보이는 능선에 올라서니 양쪽으로 壯觀이 펼쳐진다. 발밑 저 아래 구름이 바다를 이루고, 그 바다 한 가운데 산봉우리가 띄엄띄엄 섬이 되어 자리 잡고 있다. 多島海까지는 안 되어도 少島海는 족히 됨직하다.
   동쪽의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영롱한 아침 햇살이 눈물나게 아름답다. 여기저기서 청춘남녀들이 사진 찍기에 바쁘다.
   오매불망(悟寐不忘)하던 철쭉꽃은 蓮花峰 거의 다 가서야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는데, 벌써 거의 다 진 듯하다. 1 주일 전의 철쭉제 때는 아직 덜 피었더라고 들었는데...  

   마침내 蓮花峰(1,357m)에 오르니 아직 7시가 안 되었다. 등에서는 땀이 시내를 이룰망정, 구름을 뚫고 올라오는 시원한 아침 바람의 상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에 쓰기 위하여 새벽부터 올라와 우유, 커피, 컵라면 등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발목을 부여잡는다. 분유로 만든 따끈한 우유가 감칠맛이 난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2,000원 짜리 컵라면의 맛 또한 일품이다. 이왕이면 김치를 곁들이고 5,000원을 받으라고 했더니 笑而不答이다. 깊은 뜻을 어찌 알랴.  

   잠시 땀을 식히고 있노라니 竹嶺 휴게소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소백산천문대 쪽으로 올라 온 後發隊 일행이 나타났다. 생각보다는 활기찬 얼굴로 다가 오는 妻를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대개가 초행길인 후발대원들이 경치가 너무 멋있다고 계속 감탄해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철쭉의 많고 적음은 이미 관심 밖이다. 이른 아침시각에 소백산에 올라 왔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발 아래로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구름이 환상적이고, 그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가슴을 들뜨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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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속으로 뛰어 내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이쁜 년'이 될 수는 없어 참는다는 선희 엄마(孔院長의 妻)의 말에 모두가 배꼽을 잡는다.
   14명(孔院長은 아이들 둘을 데려 왔다) 전원이 모여 앉아 김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한 동안 지체한 후 毘盧峰을 향해 진군의 나팔을 불었다.  

   蓮花峰부터 毘盧峰까지의 4.7Km 완만한 능선길은 小白山이 마치 어머니 품 같은 안락한 느낌을 주는 전형적인 肉山임을 한 눈에 알게 해 준다.
   지난 주에 太白山(1,566m)에 올랐을 때 온 몸을 감쌌던 신비로움은 없으나, 대신 소백산에서는 그 품고 있는 자락의 넓음과 완만함에서 오는 풍요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 길은 해가 나면 무덥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지옥의 코스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오늘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이 오히려 즐겁기만 하다. 우선 아직 이른 아침시간인데다, 해가 구름 속에 있고, 더구나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어오니 힘든 줄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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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 힘들어 하는 妻마저도 신바람이 나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白院長이 男女相悅之事를 주제로 심심치 않게 들려주는 우스개 소리가 피로회복제 역할을 한다. 金院長과 선희 엄마가 '대포소리에 고막이 상하고 독가스탄에 중독될지 모르니 후방 10m 이내에는 접근하지 말라'며 주고받는 德談(?)이 또한 재미있다. 이름하여 '肉피리와 비밀병기' 논쟁이다.  
   예의 성미 급한 邊院長은 저 멀리서 앞서 간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일행을 기다리곤 한다. 노닥거리며 걷는 게 영 체질에 안 맞는 모양이다. 반면 등산 경험이 거의 없다는 尹院長은 성격 그대로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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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시 쯤 되어 드디어 毘盧峰에 도착했다. 1,500 미터가 넘는 줄 알았더니 조금 못 미친다(1,439m). 

   구름으로 둘러싸인 정상 주변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다. '毘盧峰'이라고 씌어진 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이다.
   우리나라 산에는 毘盧峰이 참 많다. 소백산에도, 치악산에도, 오대산에도... 제일 높은 봉우리는 온통 毘盧峰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만 짧은 識見에 알 길이 없다.  

   정상 근처의 朱木群落地는 여전히 壯觀인데, 철조망을 치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면서까지 보호하건만 시름시름 자꾸 죽어 가는 게 안타깝다.
   살아서 千年, 죽어서 千年을 간다는 朱木도 인간의 발길이 닿기 시작하면 제 命대로 못 사는 모양이다. 자연보호의 첩경은 사람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는 게 최고라는 말이 생각나 우울해 진다. 나부터 이 곳이 벌써 두 번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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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산이 그러하지만, 毘盧峰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쉬운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十里가 넘게 떨어져 있는 蓮花峰에서 해결 못한 사람들은 속절없이 참거나 적당한 곳에 失禮를 하여야 한다.
  ‘작은 것’은 그렇다 치고 ‘큰 것’은 어찌 할거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 耳目을 피하기가 어려울 텐데 그래도 주의를 기울이면 향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용기(?)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 모양이다.  

   비록 차게 식은 돌덩어리가 되기는 하였지만 배낭 속의 김밥이 一味이다. 몇 년 전까지만 산에서는 의례히 눈에 띄던 취사도구를 볼 수 없다. 그만큼 국민 모두가 산을 아끼게 되었다는 증거이리라. 아니면 등산로 입구에서 배낭을 뒤지고 버너를 빼앗던 국립공원관리사무소 직원들의 횡포(?)가 결실을 맺은 것인지도 모른다.
   黑猫면 어떻고 白猫면 어떤가, 산이 깨끗해지고 물이 맑아지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온 길로 되돌아가려던 본래의 예정을 나의 제의로 변경하여, 朱木群落地 옆을 지나 다리안 폭포 쪽으로 빠지는 길을 下山길로 잡았다.
   계속 내리막길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는 내 제의에 멋도 모르고 동의한 여자분들이 너무 힘들고 지루하다고 원망하는 통에 쥐구멍을 찾아야 했다.  
   처음에 등산로 옆에 기이한 모습을 한 채 서 있는 커다란 朱木들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었을 때만 해도 탄성이 절로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돌길이 펼쳐지니....
   더구나 이 때는 이미 해가 쨍쨍 내리 쬐고 능선에서 보는 것과 같은 멋진 경관도 감상할 수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섣불리 아는 체한 죄값을 마음고생으로 치러야 했다.  
   우선 나부터도 힘들고 지루하니 더 할 말이 있을까. 모든 것이 산에서는 千篇一律的인 내리막길보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下山길이 더 걷기 쉽다는 평범한 진리를 애써 외면한 業報이다.

   천동리의 한알유스호스텔 앞 잔디밭에 배낭을 내리고 지친 다리를 뻗은 때는 어느 덧 오후 5시가 가까워진 무렵이었다. 힘들기는 했지만 무사히 해냈다는 감격과 자부심이 얼굴얼굴마다 서려 있다.

   "내가 소백산 정상을 오르다니...."

그렇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는데,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고 하는 愚를 범해서야 되겠는가.(1996.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