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頂에서 수박을 먹고(계룡산)

2010.02.16 11:23

범의거사 조회 수:10971

 


                 山頂에서 수박을 먹고



   사법연수원 교수를 하다 보면 판사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일을 하여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20년도 넘은 대학생 시절에나 듣던 소위 MT(Membership Training)를 가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인 학과강의 외에 지도반으로 교수들에게 할당된 연수생들(교수 1인당 16-17명)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그들에 대한 전인격적 지도를 위하여 함께 먹고 자면서 생활을 같이 하는 MT를 가는 것이다.

   사법연수원 28기생들에 대한 1학기 시험이 끝나고 보름이 지난 1997. 7. 18. 지도반 연수생들을 대동하고 계룡산 등반길에 나섰다.
   얼마 만에 타보는 것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시외버스에 자리를 잡고 나니 공연스레 흥분이 되는 것은 아직도 젊다는 증거일까. 3시간여의 南行길이 지루한 줄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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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 밑에 자리한 甲寺는 백제시대 때 창건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절이다. 비록 마곡사에 딸린 末寺라고는 하나, 그 규모가 여느 本寺 못지않다. 십간(十干) 중의 으뜸인 '甲' 한 글자를 따서 지은 절 이름에서부터 이 절의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절 입구의 잘 정돈된 길 양옆에 늘어서서 하늘을 가리는 古木들이 절의 역사를 말해주고, 原形을 거의 잃지 않고 있는 철당간의 위치와 크기가 전성기 때의 절의 규모를 웅변하여 준다.
   시험 삼아 연수생들에게 당간이 무엇인지 아는가 물어 보았더니 국사학과를 졸업한 이선희 연수생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모양이다. 대부분이 굴뚝인 줄 알았다고 한다.  
   우리 고유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수준을 가늠케 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외래문물만 가르치고 접하는 데다, 세계화의 허울 속에 영어나 몇 마디 더 하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작금의 세태인데 누구를 탓하겠는가.  

   대웅전에 가려고 절의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맙소사, 정녕 禪房으로나 사용되어야 할 곳임이 분명한데, 떡하니 가게가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두 군데나. 아무리 불교용품만을 판다고 한다지만,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나의 좁은 견문으로는 이런 절은 처음이다. 선방을 상점으로 만들어 버린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심사가 뒤틀려 대웅전이고 뭐고 대충 둘러 본 후 서둘러 안마당을 벗어났다. 默言祈禱를 하는 大寂殿 가는 길로 접어드니 이번에는 계곡 옆에 전통찻집이 나타난다. 주점이나 다방이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하는 걸까.
   큰 절의 입구에는 어디나 그렇듯이 이미 절 입구에 대규모 상가가 조성되어 있는데 무슨 돈을 얼마나 벌겠다고 경내에 발 닿는 곳마다 가게를 늘어놓고 있단 말인가. 불행히도 甲寺는 이미 절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젊음은 확실히 좋은 것이다. 저녁을 먹는 자리가 술자리로 변하여 소주, 맥주, 막걸리를 아무리 돌려도 연수생들이 끄떡을 않는다.
   자리를 노래방으로 옮기니 더욱 신이 난다. 한 명 한 명 모두가 다 가수이다. 나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노래들을 잘도 부른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노는 신세대의 기수들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  

   밤이 깊었고 등산을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도 미진한 듯 몇몇은 다시 술자리를 찾아 나선다. 1학기 내내 엄청난 공부량에 시달리고 시험에 찌든 스트레스를 마음껏 발산하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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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 7. 19. 08:00

   마침내 산행 시작이다. 김용진 조장이 가벼운 산책 정도라고 이야기해서 그런지 대부분 운동화차림이었고, 심지어 이민호연수생은 바닷가에서 신는 샌달을 신고 있었다.  

   워낙 더운 날씨 탓에 출발 후 1시간도 안되어 식수가 바닥이 난다. 그런데도 전문 산악인을 연상케 하는 최성환연수생은 커다란 수박 한 덩이를 배낭에 넣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묵묵히 산을 오른다. 체격이 크지도 않은데 동료들을 위하여 애쓰는 모습이 실로 대견하다.
   문현주 연수생이 뱃속이 불편하다며 중도에 되돌아간 외에는 전원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이선희, 임해지 두 여자 연수생도 의외다 싶을 정도로 앞장서서 잘 걷는다.

   甲寺의 출발지에서 2Km 남짓한 금잔디고개에서 한 숨을 돌리고 목을 축였다. 제법 높은 고개마루인데 수도시설이 되어 있는 게 반갑고 고맙다.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아 전혀 헛되이 쓰지는 않는 모양이다. '식수대'라는 말에 익숙한 탓인지 '음수대'라고 씌어 있는 팻말이 눈에 설다.  
  임해지 연수생이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마셨으면 좋겠다며 여걸본색(?)을 드러낸다.

   다시 30여분 쯤 올라가니 왼쪽으로는 동학사 쪽으로 내려가고, 오른쪽으로는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능선길로 접어들기에 앞서 엄재민, 권국현, 조병구 세 연수생을 선발하여 동학사 방향 300m 아래의 남매탑을 둘러보고 오게 하였다.
   그 옛날 이 곳 산사에서 혼자 수도하는 젊은 스님에게 호랑이가 마을의 처녀를 물어다 주었는데, 둘이 끝까지 肉身의 情을 나누지 않고 오누이처럼 지낸 것을 기리기 위하여 두 개의 탑을 세우니 그것이 바로 남매탑이라고 한다.  


   세 개의 봉우리가 마치 닭벼슬을 한 龍과 같다 하여 그로부터 鷄龍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三佛峰, 그 뒤로 이어지는 觀音峰과 관필봉,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로 이어지는 連天峰, 이렇게 6개의 봉우리를 넘는 것이 縱走코스이다.  

    먼저 三佛峰 중 첫 봉우리에 오르니 발아래로 천 길 낭떠러지가 펼쳐져 오금이 저린다. 7월의 태양이 작열하지만, 저 아래 계곡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어 준다.
   아차 하는 순간 황천행이 보장되는 아슬아슬한 능선을 따라 三佛峰의 셋째 봉우리에 다다르자, 저 멀리 觀音峰과 그 왼편에 鷄龍山의 主峰인 天皇峰(845m)이 한 눈에 들어온다.  
   天皇峰에는 冷戰時代의 산물인 레이다기지가 자리 잡고 있어 등산로가 폐쇄되었단다. 통일이 된 후에도 그 기지를 그대로 보존하면 관광명소가 되지 않을런지.

   다른 국립공원의 名山들과는 달리 鷄龍山은 과히 높지 않으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데다, 등산로의 대부분이 능선을 따라 나 있는 까닭에 좌우의 전망이 탁 트여 시원하다. 가을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는 이 고장 출신 김용진 조장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드디어 觀音峰 정상에 도착하였다. 본래 예상보다 1시간 정도 더 걸린 듯하다. 멀리서 볼 때는 대피소 山莊인 줄 알았더니 정자가 정상에 세워져 있다.
   딴에는 등산객들에게 그늘을 제공한다고 세웠겠지만,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콘크리트로 된 정자가 우리네 정서에 맞을 리가 있는가. 주위의 풍광과 조화를 이루는지에 관하여는 吾不關焉인 채, 그저 아무데고 시멘트를 들이붓는 무감각이 이 나라 행정관료들의 현주소를 그대로 대변하는 것 같아 언짢다.  


   다행히 최성환 연수생이 꺼내 놓는 수박이 기분 전환을 시켜 준다. 해발 816m의 山頂에서 먹는 수박의 맛이란 정말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판이다. 그의 노고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15명이 실컷 먹을 정도로 큰 수박을 지고 오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觀音峰에서 하산길이 시작되는데, 몇 걸음 못가 절벽이 길을 막는다. 이 곳에만 철제사다리가 아닌 밧줄이 매여 있는 것은 자기를 찾아 온 사람들을 너무 빨리 떠나보내기가 아쉬워 잠시나마 잡아두려는 관세음보살의 배려 때문일까. 鷄龍山 등산로 중 유일한 난코스인데, 두 여자 연수생도 무사히 내려가 안심이 되었다.  

   連天峰은 하늘에 닿은 것이 아니고 날이 좋으면 서해바다가 보인다니 連海峰이라고 부르는 것이 낳을 성싶다.
   최성환 연수생이 정상 바로 밑에 있는 登仙庵에 물을 길러 갔다가 떡까지 얻어 왔다. 그의 계속 돋보이는 맹활약과 더불어 부처님의 자비가 전달되어 온다.  

   連天峰에서 甲寺까지 2.7Km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이쯤 되면 무릎이 아파 오고 발에서는 불이 난다. 그러나 다행히 계곡을 끼고 길이 나 있어 산삼 썩은 물로 心身을 씻고 나면 한결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죽을 만하면 살 길이 보인다는 것이 헛말이 아니다.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으며 혼자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하였다. 가을 단풍을 보러 다시 오마고. (1997.7.20.).  

(追記)
   2002. 2. 8. 대전고등법원에 부임하여 몇 달이 지난 후 여름에 다시 갑사를 찾았다. 그리고 몇 번 더 갔다가 2002. 12. 25. 크리스마스날 또 갔다. 그런데, 불교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던 건물이 없어졌다. 웬일인가 의아해했는데, 마침 주지스님이신 장곡스님이 궁금증을 풀어주셨다.  

   본래 그 건물은 갑사에 없었던 것인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추가로 지은 것이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가람배치가 '입구(口)자' 형태였던 절을 '날일(日)자' 형태로 바꾸기 위해 그런 짓을 한 것이다.
   뒤늦게나마 일제의 잔재를 지우고 절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하여 그 건물을 헐어버리고 안으로 물렸던 강당 건물을 본래의 자리로 환원하는 공사를 최근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깊은 산 속의 절에까지 미친 일본인들의 간악한 짓에 다시 한번 전율하면서 갑사측의 조치에 경의를 표했다.  
   나도 이제 5년 전의 느낌을 지워야겠다. 갑사는 이제 진정한 의미의 절이다.

   또 하나 덧붙인다면, 2002.10. 마침내 가을에 계룡산을 찾아 동학사→은선(隱仙)폭포→관음봉→자연성릉→삼불봉(三佛峰)→남매탑→동학사주차장으로 이어지는 5시간 코스의 일주를 하였는데, 단풍이 정말 장관이었다.
   단풍 구경에 국한한다면 갑사에서 출발하여 갑사로 돌아오는 코스보다는 이 코스가 더 나을 듯하다. (2002.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