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오누나(雨來兮,來兮)(기기암)

2010.02.16 11:25

범의거사 조회 수:7183

 


               비가 온다, 오누나(雨來兮,來兮)  



   "모든 것을 다 훌훌 털어 버리고 난 삶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삶이 그 자체 최고의 가치인데 거기서 또 무슨 의미를 찾는단 말입니까?"
  
   妻와 아이들이 방학을 이용해 미국에 가고 없어 모처럼 홀로 있게 되어 여름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 팔공산의 기기암(寄寄庵)을 찾았다. 1992년 여름에 다녀 온 후 5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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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禪房이 새로 신축되어 수도하기에 더욱 좋아진 환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절 앞마당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어 교통도 편해졌다. 거기다 목욕탕, 수세식 화장실, 널찍한 식당을 구비하였으니 더 바랄 게 없다.
   새 건물이 들어서고 개축되었다 하여 소란스러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언제나 깨끗하고 조용한 모습 그대로이다. 반가이 맞아 주시는 휴암, 인각 두 스님의 모습도 여전하시다.  

   前과 다른 게 있다면 방문객의 마음이다. 妻가 미국으로 떠날 즈음 던져 놓은 話頭로 인한 마음속의 번뇌가 떠나질 않는다. 家長의 도리, 무엇이 최선인가?  

   계곡물 소리에 새벽 5시면 눈이 떠진다. 처음에는 빗방울이 듣는 소리인 줄 알았다. 찬 물을 뒤집어 써 정신을 차린 후 부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 山寺를 찾는 사이비 불자에겐 백팔배가 쉬운 일이 아니다. 炎天에 시달리는 도시와는 달리 밤에 군불을 지피고 이불을 덮고 자야 하는 곳이건만, 백팔배를 하고 나면 등줄기를 타고 땀이 내를 이루고 숨도 가쁘다.

   아침 공양(6시) 후 산책길에 나선다. 왕복 1시간여의 산길을 맨발로 걷는다. 수행도 되지만, 지기를 받아 들여 건강에 좋다고 한다. 처음에는 발바닥이 아파 망설였는데 금방 익숙해진다.
   후끈거리는 발바닥을 찬 물로 식히고 다시 부처님 앞에 앉는다. 참선을 하는 것이다.

   기기암에 도착하면서부터 만 하루가 넘게 쏟아지는 비를 보며 생각해 낸 話頭,  

   '비가 온다, 오누나'(雨來兮,來兮)

를 붙들고 씨름을 하여 본다. 저 비는 어디서 오는 걸까, 왜 오는 걸까, 이 곳에 왔다가 어디로 갈까, 저 비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점심 공양 후 산책, 참선, 저녁 공양 후 참선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번뇌는 쌓여만 간다. 휴암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그러나 삶에서 따로 의미를 찾지 말라고 하신다. 우매한 중생에게는 어렵기만 하다.

   공기는 한없이 맑건만 사흘 밤을 지내고 하산하는 발길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것은 왜일까? (199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