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牛)의 귀(耳)를 찾아서(도봉산 우이암)
2022.01.09 00:37
소(牛)의 귀(耳)를 찾아서
임인년의 첫 주말(2022. 1. 8.)에 도봉산을 다녀왔다. 신년 들어 첫 산행이다.
산행 도반은 김두식님, 허만님, 이원님. 모두 법무법인 세종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이다. 지난해 7월 함께 운길산을 오른 후부터 의기투합하여, 10월에 북한산 유봉(응봉)능선을 올랐고, 이번이 세 번째이다.
집이 아예 노고산 자락에 있어 평소 산과 친한 김두식님이 세종의 경영대표 임기를 마치면서 시간 여유가 생기자 함께 산행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산행팀이 만들어진 것이다. 윤재윤님도 멤버인데, 오늘은 집안 사정으로 동행하지 못 했다.
오늘 도봉산행의 코스는 보문능선을 거쳐 우이암까지 오르는 것이다. 이 코스는 도봉산에 있는 수많은 등산코스 중 가장 쉬운 편에 속하는 곳이다.
지난 연말부터 관악산과 도봉산을 놓고 설왕설래하다가, 겁이 많은 만허선사(허만님의 아호)의 강력한 주장을 따른 것이다.
만허선사는 사실 막상 산에 가면 어느 누구 못지않게 잘 오르는데, 산행 시작 전까지는(또는 산행 도중에도) 엄살이 보통 심한 게 아니다. 가히 엄살계의 지존이라 할 만하다. 그 바람에 오히려 다른 도반들에게 웃음을 선사하여 산행을 즐겁게 한다.
이 코스의 접근방법은 다음과 같다.
지하철 1호선 도봉산역에서 도봉산 쪽으로 길을 건너면(역 앞에 바로 횡단보도가 있다)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등산객들을 상대로 각종 등산용품과 음식을 파는 상가가 나오고, 바로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노선버스가 다니는 큰 길이 다시 나오고, 그 길을 따라 산 쪽을 향해 상가지대가 계속 이어지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그 상가지대의 끝까지 올라가면 도봉탐방지원센터가 나오고 이어서 바로 북한산국립공원임을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도봉산도 북한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어 표지석 이름이 이렇게 되어 있음에 유의).
이곳에서 비로소 등산로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이암코스 등산지도]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마당바위를 거쳐 신선대나 자운봉 쪽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택하기 때문에 이 표지석의 오른쪽으로 난 길로 가는데, 우이암을 가려면 이 표지석의 왼쪽에 있는 다리(이름이 통일교이다)를 건너면 된다. 그리고 지도에서 보듯이 맨 왼쪽의 붉은색으로 표시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그 종점에 우이암이 있다. 거리는 도봉탐방지원센터에서 3.2km이다.
하산은 올라간 길을 그대로 내려와도 되지만, 그런 하산은 적어도 산객(山客)이라면 극구 피하는지라 지도의 푸른색으로 표시한 등산로로 내려오면 된다. 특히 이 하산길은 계곡 옆으로 나 있어 비록 돌이 많기는 하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무릎에 큰 부담이 안 가는 까닭에 권할 만하다.
이렇게 왕복하는 데 소용되는 시간은 중간 휴식 시간을 포함해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
오늘은 9시 30분에 통일교를 건넜다. 앞서 언급했듯이 도봉산 등산코스 중 가장 쉬운 코스에 속하기 때문인지, 이쪽으로 가는 등산객이 뜸했다. 길은 고속도로 수준으로 잘 닦여 있건만, 사람이 적으니 유유자적 여유 있게 산행하기에 제격이었다. 힘이 안 들어 좋다고 만허선사가 제일 즐거워한다.
건립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능원사(能園寺)가 길 오른쪽에 바로 나타나는데, 절 뒤로 선인봉과 자운봉의 윗부분이 보인다. 그만큼 위치도 좋고 터도 넓은 절이지만, ‘절’ 하면 떠오르는 고색창연함을 찾아볼 수 없어 ‘절’ 기분이 안 나는지라 그냥 지나쳤다.
[능원사]
이 능선길 또한 잘 닦여 있어 콧노래를 부르며 그야말로 미음완보(微吟緩步)가 가능하다. 그리고 우측으로 도봉산의 주봉들인 자운붕, 만장봉, 선인봉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눈에 들어온다.
[도봉산의 주봉들]
출발해서 1시간 10여 분 지나면 보문쉼터가 나온다. 보문능선에 있는 쉼터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듯하다.
배낭을 벗어놓고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리는데, 재미있는 게 눈에 띄었다. ‘배낭걸이대’가 있는 것이다.
이제껏 무수히 산을 다녔건만 처음 대하는 시설물이다. 쉬는 동안 배낭을 흙 위에 놓지 말고 걸어두라는 것이다. 작은 친절이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전국의 산에 널리 보급하면 좋을 듯하다.
[배낭걸이대]
보문쉼터를 지나면 능선 왼쪽으로 우이암(牛耳岩)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만나는 표지판이 산나그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제껏 편하게 올라온 객(客)으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하는 안내판이다. 그 내용이 보는 이로 하여금 겁을 먹게 한다.
내용인즉, 아래와 같다.
우리 일행 중 맨 앞에 가던 만허선사가 이 안내판을 보더니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우회로로 방향을 잡는다. 그런데 마침 직진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길래 우리도 직진하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질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도리없이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우회로로 5분 정도 계단을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도봉주능선과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서 우회전하면 신선대를 거쳐 자운봉으로 이어지고, 좌회전하면 우이암으로 가게 된다.
신선대를 가보면 어떻겠냐고 하니까 만허선사가 역시 손사래를 친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우이암이 최종 목적지란다. 더이상 욕심 안 내고 우이암까지만 갔다가 하산하면 자기가 점심을 사겠다고 한다.
그 말에 다들 흔쾌히(?) 동의하고 우이암까지만 가기로 했다.
이럴 때
“에구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밥이 원수로다!”
라고 해야 하는 건가.
우이암 직전에 매우 짧긴 하지만 난이도가 매우 높아 두 손 두 발을 다 써야 하는 암릉구간이 나온다. 이곳을 통과하면 이어서 다시 계단이 나타나고 그 중간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전망대에서는 도봉산의 주봉들인 선인봉, 자운봉, 만장봉, 신선대뿐만 아니라, 도봉산의 산세가 서쪽으로 뻗어내리며 생긴 오봉(五峯)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도봉산의 여러 등산코스 중에서 가장 멋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시 한 수가 없을쏘냐.
비록 '江山更奇絶(강산갱기절)하여 老子不能詩'(노자불능시)라 했지만(강산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늙은이 재주로는 시를 짓지 못한다), 어느 옛 시인의 흉내를 내는 것이야 어떠랴.
홍진(紅塵)을 다 떨치고 죽장망혜(竹杖芒鞋) 짚고 신고
[전망대에서]
소한(小寒)이 불과 사흘 전에 지난 한겨울임에도 산 위의 기온이 영하 3-4도에 지나지 않을 만큼 날씨가 포근하여,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며 전후좌우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고 있노라니, 다른 사람들이 올라온다. 선입선출(先入先出)이다.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이곳 전망대에서 얼마 안 남은 계단을 마저 다 올라가면 우이암코스의 정상이다. 우이암 자체는 수직 암괴(巖塊)라 오르지 못하고 옆 모습만 볼 수 있다.
[우이암]
우이암(해발 542m)은 바위(岩)가 소(牛)의 귀(耳)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이동이나 우이령 같은 지명이 다 여기서 유래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관음보살이 부처를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처럼 보여, 원래 명칭은 관음봉(觀音峰) 또는 사모봉(思慕峰)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혜안이 없는 촌부의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소의 귀로도 관음보살로도 보이지 않음을 어쩌랴. 설마 ‘벌거벗은 임금님’은 아닐 테니, 이쯤 되면 촌부의 아둔함을 탓할 수밖에 없다.
[우암산코스의 정상]
그래서일까 야생 고양이 몇 마리가 배회하며 먹을 것 좀 달라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온다. 심지어 까마귀까지 날아와 ‘까악 까악’ 짖는다. 고양이들에게는 쑥떡을 떼어 주었지만, 까마귀는 견과류라도 줄까 해보았으나 여의치 않아 포기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드는 생각 하나.
판소리 적벽가 중 조조의 군사들이 적벽대전을 앞두고 신세 한탄을 하는 ‘군사설움타령’ 대목에 이런 사설이 나온다.
“만일 객사를 허거드면 게 뉘랴서 안장(安葬)을 하며, 골폭사장(骨曝沙場. 모래밭에 뼈가 노출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이 희어져서 오연(烏鳶. 까마귀와 솔개를 뜻한다)의 밥이 된들 뉘랴 손뼉을 뚜다리며 날려 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같은 내용의 사설이 판소리 수궁가 중 별주부가 뭍으로 나가기 위해 모친과 이별하는 대목에도 나온다.
“이 몸이 죽어져서 오연(烏鳶)의 밥이 된들 뉘랴 손뼉을 뚜다리며 날려 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그러고 보니 아이쿠 이런 세상에나...
까마귀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밥으로 삼으니, 산정에서 까마귀가 우는 것은 산객으로 하여금 절벽 밑으로 떨어져 세상과 작별하기를 바라는 것 아니런가. 그런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주려 하다니....
쩝! 차라리 소(牛)의 귀(耳)에다 경을 읽지.....
[우이암코스 정상의 까치]
정상에 올랐으니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다.
만허선사에게 도봉주능선을 따라 우이동 쪽으로 하산하는 방법이 있다고 운을 띄워보았지만, 씨도 안 먹히는 소리라 문전에서 각하되고 원점회귀로 하산키로 했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능선이 아닌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덕분에 임인년의 첫 산행을 힘들이지 않고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감사할 일이다.
하산을 마치고 난 후 김두식님과 만허선사의 대화 한 토막.
(김) "새해 훌륭한 산행을 했는데, 운동량이 2% 부족하네요. 신선대까지 갔으면 좋았을 텐데."
(만) "좋아요. 다들 원하니 다음에는 신선대까지 갑시다!"
(김) " 오호, 그러면 그땐 내가 밥을 사지요!"
(追記) 산에서 도봉산역 부근까지 내려오면 먹자골목이 나온다. 그 중 ‘강릉초당두부집’이라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식당이 정갈하고 음식도 맛이 있었다. 추천할 만하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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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22.01.09 10:51
가장 쉬운 코스라시니 저도 언젠가 도전하고싶네요.^^ -
우민거사
2022.01.09 11:52
에, 꼭 그리 하세요.
강추입니다.
-
고범석
2022.01.09 14:11
감사합니다. 건강한 한 해 되세요^^ -
우민거사
2022.01.09 14:24
감사.
고부장도 박차장과 함께 더욱 건승하길~.
-
우민거사
2025.07.08 22:42
2025. 7. 5. 우이암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킬리만자로산악회원들과 함께 올랐다.
아직 장마가 안 끝났건만(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때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통에 땀을 어지간히도 흘려야 했다.
3년 전에는 1월의 추운 겨울[소한(小寒) 사흘 전]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똑같은 코스를 7월의 한여름[소서(小暑) 이틀 전]에 올랐으니, 우이암은 마치 극기훈련장이라도 된 기분이다.
더구나 3년 전에는 우이암 못 미친 곳의 경사 암반지역을 위험하다고 우회했었는데, 이번에는 과감히 돌파했다. 막상 오르고 보니 그렇게 힘들거나 위험한 곳이 아닌데,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에서 너무 겁을 주는 것 같다.
우이암코스의 정상에는 3년 전과 마찬가지로 등산객들로 붐볐고, 여전히 고양이들이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렸다.
하산길은 3년 전과 달리 도봉 주능선으로 따라 우이동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였다. 안 가본 길을 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500m 내려가면 있는 원통사를 들러 점심 공양을 하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이암을 뒷배경으로 하고 있는 원통사는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머물며 기도한 흔적이 남아 있는 절이다. 절 마당에 서면 일망무제로 시원하게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원통사]
오전 11시 40분에 원통사에 도착했다. 도봉산역에서 9시에 출발했으니 2시간 40분 걸린 셈이다. 주지 탄대 스님(현재 조계종 총무원 감사국장을 겸임하고 계시다)이 신선한 유기농 야채로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다. 꿀맛 같은 식사로 배를 불리고 스님이 직접 끓여주시는 향긋한 녹차를 마시니 극락이 따로 없다.
더구나 요사채가 어찌나 시원한지 마치 냉장고 속에 있는 듯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문밖은 영상 30도를 넘는 찜통 더위로 난리인데, 에어컨도 없는 방안은 신기할 정도로 시원했다. 하산 시간만 구애받지 않는다면 낮잠을 청하고 싶었다.
[주지스님(상)과 점심 밥상(하)]
요사채에 컵라면 상자가 수북하게 쌓여 있어 스님께 용처를 여쭈니 배고픈 산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라고 한다. 일요일에는 그 밖에 밥, 떡, 녹차, 커피 등도 무료로 나눠주고, 심지어 겨울에는 등산지팡이와 아이젠까지 무료로 빌려준다고 한다. 보살행이 따로 없다.
우이암이 소(牛)의 귀(耳)처럼 생긴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지만, 원래는 관세음보살이 부처를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처럼 보여 관음봉(觀音峰)이라 불렸다는데, 그 관음봄 바로 밑에서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원통사에서 도봉 주능선을 따라 우이동의 우이역까지는 거리가 대략 2.5km이다.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산을 다 내려온 곳에 있는 “산에는 꽃이 피네”라는 민속주점의 파전이 객의 다리에 쌓인 피로를 풀어준다. 막걸리나 소맥을 곁들이면 금상첨화이다.
(추록) 아래 글은 이번에 동행한 도반 중 한 분이 작성하신 산행후기이다. 본인이 이름을 밝히기를 극구 사양하셔서 익명으로 올린다.
소리 없는 귀로 듣는 길
- 도봉산 우이암과 원통사에서
아침 햇살이 우이동 골짜기를 부드럽게 비출때
나는 말없이 신발 끈을 묶고 첫 발을 내디뎠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 안에서도 도봉산은
고요를 품은 특별한 존재다.
나를 잠시 내려놓고,
내 안의 복잡한 마음을 씻고자 길을 올랐다.
우이암으로 향하는 길은
짙은 소나무 숲과 묵직한 화강암의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바위와 산의 숨결과 하나 되었다.
무언의 산은 말하고 있었고, 나는 듣고 있었다.
우이암에 다다랐을 때,
그 형상은 마치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
고요히 귀를 기울이는 거대한 존재 같았다.
실제로 이 바위는 예로부터 ‘소 귀를 닮았다’ 하여
우이암(牛耳岩)이라 불렸고,
도선국사와 관련된 불교적 수행처로도 전해 내려온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바위 아래서 시를 읊고,
수행자들이 침묵 속에서 정신을 닦던 장소였다.
나는 바위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
정리되지 않은 마음들이
바람이 되어 산아래 보이는 세상속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아무 말 없이 들려오는 듯한 속삭임.
"네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길을 따라 더 걸으니
산허리 아래 원통사가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 사찰은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관세음보살의 지혜와 자비를 상징하는 이름처럼
‘모든 길은 원으로 돌아오고, 모든 마음은 통한다’는 뜻을 지녔다.
조선 개국의 주역 이성계도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 적이 있다.
사찰은 한 송이 연꽃처럼 산세에 안긴 채,
말없는 품을 내어주었다.
대웅전 앞에 선 나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시선에 눈을 감고 머물렀다.
주지 스님께서 내어주신 따뜻한 찻물 한 잔이
몸과 마음을 함께 데워주었다.
그 물이 내 안에 퍼지듯,
그동안 쌓였던 감정과 피로가 천천히 녹아내렸다.
이 고요한 사찰은 수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통과 기도를 품었을까.
시간을 품은 나무와, 침묵을 안은 전각들이
내게 말없이 말해주었다.
세상의 수많은 흐름 속에 놓인
한 사람일뿐.
하산길은 오히려 가벼웠다.
우이암에서 들은 것은 바람도, 새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가 외면해온,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진실의 목소리였다.
산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결국, 세상을 듣기 위해
내 마음의 귀부터 열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 하루.
우이암과 원통사는
단순한 오름이 아니라
내려놓고 비우는 자신을 만나며
그러한 ‘듣는 길’ 위에 놓인
조용한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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