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을 매양 보랴, 다른 산도 가자스라(우면산, 인왕산, 안산)
2022.04.03 01:59
우면산을 매양 보랴, 다른 산도 가자스라
2020. 1. 20. 우리나라에 첫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후 2년이 넘는 동안 뭇 사람의 생활양식이 많이 바뀌었다. 마스크 쓴 얼굴과 재택근무가 낯설지 않고,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모여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고, 음식을 비롯한 각종 생활용품의 온라인 주문과 배달이 일상화되고, 해외여행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고...
촌부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집 근처의 헬스클럽을 다니기 시작한 게 실로 오래전의 일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격일제로 하루는 헬스클럽을 가고, 하루는 우면산을 올랐다. 그리고 겨울에는 해가 늦게 뜨는 데다 눈으로 산길이 미끄러워 근력운동도 할 겸 매일 헬스클럽을 다녔다.
그랬는데, 코로나가 크게 유행하면서 헬스클럽을 가기가 꺼려졌다. 헬스클럽이 아예 일정 기간 문을 닫은 적도 있지만, 다시 문을 연 후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운동하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는 곳에 간다는 것이 아무래도 썩 내키지 않았다. 물론 다들 마스크를 쓰고 운동을 하지만, 헬스클럽 자체가 환기가 잘 안 되는 지하에 있는지라,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더구나 이순(耳順)을 진즉에 넘긴 나이 아닌가.
그래서 코로나가 창궐한 후로는 헬스클럽을 가는 것을 단념하고, 이제는 여주에 가 있는 주말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매일 아침 우면산을 오른다. 자연히 우면산의 변화하는 사계(四季)를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체험한다.
바야흐로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작금에는 생강나무, 진달래, 청매, 홍매가 눈을 즐겁게 하고, 벚꽃도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대성사 포대화상(布袋和尚)의 넉넉한 미소가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생강나무]
[진달래]
[홍매]
[포대화상]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유명한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산중을 매양 보랴 동해로 가자스랴”라는 대목이 나온다. 금강산을 찾아 내금강을 다 둘러본 후에 외금강의 동해바다를 보러 가는 장면이다.
송강(松江)처럼 멀리 가지는 않더라도 흉내는 낼 수 있지 않을까.
“우면산을 매양 보랴, 다른 산도 가자스라.”
청명(淸明)을 코앞에 둔 4월의 첫 주말을 맞아 우면산 밖의 또 다른 봄을 느껴볼 겸 안산을 찾았다. 그리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 가다 보니 발걸음이 인왕산으로 이어졌다. 무악재 위로 구름다리(본래는 동물들이 이동하게 만든 다리였다)가 놓이고,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인왕산이다.
[안산에서 바라본 인왕산]
촌부는 인왕산을 여러 번 오르긴 했지만 이제껏 사직동 쪽에서나 올랐지 무악재 방향은 처음이다. 그런데 이 등산로가 매력적이다. 본래 안산이 주된 목적지였는지라 시간 관계상 선바위까지만 갔다 왔는데, 그 길이 봄을 맞아 한껏 자태를 뽐내는 꽃들의 천국이었다.
특히 남사면(南斜面)으로 노란 개나리가 만개를 한 게 장관이다. 서울에서 이만큼 활짝 핀 개나리 군락지를 본 일이 없다. 인왕산의 새로운 발견이다. 역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발품을 팔고 볼 일이다.
[개나리 군락지]
장삼을 걸친 스님을 닮았다는 선(禪)바위에는 곧 다가올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는 연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예로부터 이 바위는 기도발이 잘 듣기로(특히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기도. 그래서 기자<祈子>바위라고도 한다) 알려진 곳이다. 지공선사(地空禪師)의 나이에 그런 기도를 할 일은 없고, 국태민안과 무사 산행을 기원하며 삼배(三拜)를 했다.
[선바위 오르는 길]
[선바위]
인왕산에서 다시 안산으로 돌아와 안산 자락길을 한 바퀴 돌았다. 전장 7km이다.
이 자락길은 유모차를 끌고 다녀도 될 만큼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인기를 끄는 곳이다. 대부분의 구간에 지그재그로 데크를 깔아 경사가 완만하고 걷기에 편하다. 그러기에 미음완보(微吟緩步)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길이다.
[안산 자락길]
이 길 또한 좌우로 갖가지 꽃들이 피기 시작했는데, 만개한 히어리가 특히 눈길을 끈다. 이 꽃은 구상나무(학명이 ‘Abies koreana’)처럼 학명이 ‘Corylopsis coreana’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물이다. 촌부도 말로만 듣다가 오늘 처음 실물을 보았다. 이래저래 보고 배운 게 많은 날이다.
[히어리]
안산자락길의 명물 중 하나는 세쿼이아(Sequoia) 숲길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나무의 숲 사이를 지나노라면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다.
마침 청명지제(淸明之際)의 밝은 태양이 그 사이로 빛나고 있어 신비함을 더했다. 이럴 때 어찌 시 한 수가 없을쏘냐.
조선 선조 임금의 손자인 낭원군(朗原君. ?~1699)의 흉내를 내 본다.
청명에 즈음하여 산수 간에 노니다가
강호에 임자 되니 세상일 잊었노라
어떻다 강상풍월이 내 벗인가 하노라
(***시인의 본래 시조는 ‘평생에 일이 없어’로 시작된다)
[세쿼이아 숲길]
자락길 순례를 거의 끝내갈 무렵 어디선가 새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린다. 모처럼 산행길에 동행한 도반(道伴)인 박카리 선생이 먼저 발견하고 가리키는 곳에 딱따구리 새끼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었다. 마치 잘 가라는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우면산의 아침 산행길에 듣는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는 요란한데, 이 앙증맞은 새끼가 쪼는 소리는 아직 미약하다. 그러나 소리의 크고 작음이 대수랴, 한 생명체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대견할 따름이다. 한낱 미물이든, 만물의 영장이든, 열심히 사는 모습은 늘 경건하기 마련이다.
[딱다구리]
대략 세 시간 걸린 산행의 끝을 마무리하려고 독립문 사거리의 유명한 도가니탕 전문점인 대성집(65년 된 노포이다)을 찾았다. 그런데 아뿔싸, 식당 앞에 늘어선 줄을 보고 기가 질렸다. 최소한 40분은 기다리란다. 전에 주중에 왔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점심시간에 주중보다 주말에 손님이 더 많은 몇 안 되는 곳이다.
[대성집]
하릴없이 발길을 돌려 찾은 곳은 영천시장 부근의 한옥집김치찜 서대문 본점이다. 이 꿩 대신 저 꿩이다. 이 집의 묵은지를 이용한 김치찜과 김치찌개 또한 명물이다(맛이 좋고 양이 풍부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찾아보길 권한다.
[한옥집 김치찜]
풍광 구경 잘하고, 배불리 먹고 나니 부러울 게 없다. 귀갓길의 차 안에서 쏟아지는 잠에 못 이겨 꿈나라를 헤맨다. 일거춘몽(一車春夢)이다. 그렇게 봄날이 가고 있다.
봄날은간다-조용필.mp3 (조용필 봄날은 간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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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히어리가 안산 자락길에 있었군요!
딱다구리도 부지런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