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거사

11년 만에 월출산을 다시 찾았다.

2012. 10. 20.(음력 9.6.) 도갑사에서 하루 묵고 그다음 날인 2012. 10. 21.(음력 9.7.) 아침 천황사 쪽으로 이동하여 월출산을 올랐는데, 정확히 11년 후인 2023. 10. 20.(음력 9.6.) 똑같이 도갑사에서 하루 묵고 그다음 날인 2023. 10. 21.(음역 9.7.) 아침 천황사 쪽으로 이동하여 월출산을 오른 것이다. 음력 날짜까지도 똑같은 게 신기하다. 일부러 맞추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게 있다면, 11년 전에는 도반이 고교 동창의 죽마고우(竹馬故友)들이었는데, 이번에는 도반이 킬리만자로를 함께 오른 산우(山友)들이었다는 점이다.

 월출산1.jpg[왼쪽부터 박재송님, 촌부, 월우스님, 도갑사 주지 수관스님, 오강원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월출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그러나 고희를 눈앞에 둔 60대가 되어 찾아온 나그네는 세월의 흐름을 못 이겨 그사이 머리가 반백이 되고,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그리고 그 나그네의 눈에 비치는 월출산의 가을이 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다가왔다. 백내장 수술을 하여 안경에서 해방된 때문일까, 세상 만물을 보는 안목이 진화한 것일까.

 

월출산의 정상인 천황봉(天皇峯. 해발 809m) 앞에서 뜻밖의 호사를 누렸다. 마침 태극기를 가져온 등산객들이 있어 그들로부터 빌린 태극기를 앞세우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름이 영 못마땅한 이 봉우리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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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의 많은 봉우리 중에서 명물이라고 할 만한 구정봉(九井峰. 해발 738m)에 힘들여 올랐는데, 이번에는 가장 큰 우물에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산행 시작 전에 도갑사에서 만난 민속학자 조용헌박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선사시대에 족장들이 바위에 손으로 우물을 팠고, 물은 하늘에 기도하는 정화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구정봉은 접신(接神)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 정말로 접신이라도 하려는 걸까, 구정봉 정상에 오르니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고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우물의 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솟아나는 듯했다. 무어라 설명키 어려운 기운이 감돌아 섬찟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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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봉에서 내려와 도갑사 쪽 종주길 대신 북쪽의 마애불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이쪽은 이번이 초행길이다.

국보 144호인 마애불(전체 높이 8.6m)은  전국의 국보 중 고도가 가장 높은 곳(해발 600m)에 있다. 신라 말기 내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이 마애불은 노천에 있으면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표정이 자비롭기보다는 근엄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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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애불에서 북쪽으로 난 하산길은 길고 지루했다. 영암군에서 지은 길이름이 '하늘아래첫부처길'이건만, 산객에게는 결코 자비롭지 않은 돌길이 많아 걷기도 힘들었다. 산 밑에서 기다리는 월우스님 일행을 생각해 딴에는 부지런히 걸었건만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8시간에 걸친 긴 산행을 하고 나니 무릎이 꽤나 아프고 힘들다. 오호애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