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기동자는 어디에(지리산,청학동)

2010.02.16 11:25

범의거사 조회 수:10514


               댕기동자는 어디에

 
   6월에 다녀 온 지리산을 넉달만에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하는 산행이었다.
   본래 5월 초 어린이날을 전후하여 두 가족이 함께 등반하기로 진주지원에 근무하는 李仁馥 부장판사와 약속이 되었었는데, 출발 하루 전 날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으니 오지 말라는 전화연락을 받는 바람에 무기연기하고, 대신 나 혼자 사법연수원교수들과 6월에 다녀왔었다.
  그 후 애당초 계획하였던 일이니 어떻게든 실행에 옮겨 보자고 이야기가 오고가다 결국 開天節에 지리산을 정복하기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흐트러졌던 일정표를 바로 잡은 셈이다.  

01.jpg

 

                             1 

 

  1997.10.3. 08:00.
   해발 900m 정도 되는 순두류자연학습장 부근에서 등정을 시작하였다. 전날 중산리의 지리산계곡모텔에 밤늦게 도착하여 잠을 설쳤을 텐데 집사람의 발걸음이 생각 밖으로 가벼워 보여 일단 안심이 되었다. 출발 후 한 동안은 다른 등산객들이 안보여 마치 지리산을 전세 낸 기분이었다.  

   30여분 쯤 지나자 李판사의 두 아들 한원이, 두원이와 경호, 경준이가 어른들과 속도를 맞추려니 갑갑한 듯 자기네끼리 먼저 가겠다며 휑하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이들만 먼저 보낸다는 것이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걱정 말라고 妻를 안심시켜야 했다. 우선 어른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는 이유가 심장의 부담으로 걸음이 느린 妻때문인데, 거기다 아이들 걱정까지 하게 하다가는 天王峰 정상을 오르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창한 가을날씨에 간간히 부는 바람 덕분에 6월에 오를 때보다는 한결 수월하였지만, 妻를 생각하여 수시로 쉬었다. 대학동기인 李판사와는 안팎으로 친한 사이인지라 별별 웃기는 이야기를 하면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지루한 줄 몰랐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시선을 끌었다. 특히 上中下로 나뉘어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모습을 하고 있는 나무들은 감탄의 대상이었다. 감정 표현이 즉각적이고도 확실한 집사람은 "어머! 저 나무 좀 봐"의 연속이다.

   제발 그런 감탄을 계속하면서 끝까지 무사히 올라가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출발 직후에 정상까지 대략 4시간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니까, 자기는 처음에 왕복 3-4시간 코스인 줄 알고 따라 나선 것이라며 걱정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02.jpg

 

   출발한 지 2시간여 만에 法界寺에 도착하였다. 이쯤에서는 아이들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냥 간 모양이다.
   李판사가 물통에 물을 담는 동안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큰 절을 올렸다. 도대체 어디쯤 올라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아이들, 언제 가슴을 쓸어안고 주저앉을지 모르는 집사람, 모두들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산행을 마치게 하여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法界寺를 지나면 길이 본격적으로 가파라지는 대신 발아래로 지리산의 장관이 펼쳐진다. 이미 1,500m 이상을 올라왔기 때문에 시야가 탁 트이는 것이다. 단풍도 한결 색이 짙어진다. 그런데 지리산에서는 그 흔한 소나무를 보기가 어려우니 무슨 이유일까?  

   궁금증을 뒤로 하고 1시간 쯤 더 올라가니 경호가 길가에 앉아 있었다. 거북이라는 별명답게 혼자 처진 모양이다. 그나마 여기까지 어른들보다 먼저 올라온 게 다행이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한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대견하다면서 배가 고프다면 먹을 것을 주고, 목이 마르다면 물을 주었다고 한다. 등에 맨 배낭에는 그렇게 해서 얻은 여분의 바나나까지 있다고 하니,  이를 일러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닐는지.  

   가뭄 탓에 물이 거의 마른 천왕샘을 지나 정상에 오른 것은 출발로부터 4시간 30분이 지나서였다.  경준이가 자기는 10시 53분에 도착하였다며 왜 이제 오냐고 난리다. 점심 먹기 좋은 자리를 잡아 놓았는데 어른들이 늦게 오는 통에 빼앗겼다는 것이다.  산에는 본래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는 10살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리다.  

 

03.jpg

 

   100m만 걸어도 숨이 차 주저앉던 집사람이 1,915m의 천왕봉을 올랐다는 것이 꿈만 같다. 충주에서 지내는 동안 꾸준히 체력단련을 한 덕분이다.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에 이어 지리산까지 올랐으니, 이제 설악산과 한라산만 오르면 웬만한 국립공원은 거의 다 주파하는 셈이다. 우선 내년 봄에 대청봉을 정복하리라고 작정하여 본다.  

   지리산계곡모텔에서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下山을 서둘렀다. 法界寺코스보다는 약간 길지만 대신 경사가 덜 심한 장터목산장 쪽으로 길을 잡았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무릎이 약한 편인 우리 부부는 서초동 '황소의 눈'에서 산 무릎보호대를 무릎에 둘렀다. 하산길에 받는 무릎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무릎 한 쪽 당 3만원으로 합계 12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지불할 때는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막상 하산을 끝내고 보니 제 값을 하였다. 전문산악인들도 늘 배낭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30분 쯤 내려 왔을 때, 드디어 일이 터졌다. 처가 오른쪽 무릎 밑의 종아리 뒷부분이 아프다며 절뚝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쥐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종잡을 수가 없다. 아무리 주무르고 문질러도 소용이 없다.
   산장이 있는 장터목까지는 1시간이나 더 가야 하는데 난감하기 짝이 없다. 제석봉도, 枯死木지대도, 모두 走馬看山으로 지나 겨우겨우 산장에 도착하였다.  01 (2).jpg

   그런데 그곳에 가면 있을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던 물파스가 상상 속의 의약품일 줄이야. 겉모양이 그럴듯한 장터목산장에서는 고작 음료수와 과자부스러기만 팔고 있었다. 내가 기대하였던 危難時의 피난처는 결코 아니었다. 눈앞이 캄캄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절뚝절뚝, 아픈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하산길을 재촉하는 집사람의 모습이 애처러웠던지 어떤 등산객이 조난신고를 하는 게 어떠냐고 까지 한다. 구조대를 불러 들것으로 운반하라는 것이다. 妻가 그럴 수는 없다며 그냥 가겠다고 한다.  

   통증을 잊게 하려고 내 딴에는 온갖 우스개소리를 다하여 보지만 力不足이다. 아이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내려간 지 오래고, 다른 등산객들도 계속 앞질러 간다. 그들의 발걸음에 속도가 붙는 것은 다리가 튼튼한 탓도 있지만, 산속에서는 어둠이 빨리 찾아오기 때문이다.
   염려한 대로 어느 덧 해가 西山으로 넘어가고 스멀스멀 찾아오는 어둠이 주위에 깔리기 시작하였다. 李판사가 결단을 내려 하나뿐인 볼펜형 플래쉬를 나에게 주고 먼저 내려갔다. 4시간 전에 헤어진 아이들의 동정도 살펴보고 랜턴을 구하여 다시 올라오겠다는 것이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어 힘이 들 텐데도 오히려 집사람 걱정을 하여 주는 李판사 부인이 눈물겹게 고맙다. 깜깜한 산속에서 세 사람이 실낱같은 불빛에 의존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집사람은 이제는 왼쪽 발목까지 아프다면서도 차마 쉬자는 소리를 못한다. 겁도 나고 쉬면 못 일어날 것 같기 때문이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건만 오히려 등에서는 땀이 내를 이룬다.  

   그러기를 1시간여, 李판사가 커다란 랜턴을 들고 올라왔다. 救世主가 따로 없다.
   중산리에 도착하니 밤 7시30분.
   4시간 30분 만에 오른 곳을 6시간 걸려 내려 온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夜間山行까지 하면서.
   산행을 무사히 마친 것이 꿈만 같다. 李판사 부부에 대한 고마움이 새롭고, 意志의 한국인-妻의 모습이 대견하다. 진작 내려 온 아이들이 배가 고파 죽겠다면서 반가이 맞이한다.  

                    2

   晉州의 李판사 집에서 1박을 한 후 10. 4. 淸鶴洞을 찾았다. 본래 예정에 없었던 것인데 경호가 가보자고 하여 길을 나섰다.  
   淸鶴洞의 행정구역상의 위치는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이다. 진주에서 2번 국도를 따라 하동읍을 향하여 가다가 횡천에서 우회전하면 淸鶴洞까지 23Km의 지방도가 이어진다.

   꼬불꼬불 산골길의 전형인 이 길은 지리산 三神峰(해발 1,284m)으로 향하는 길답게 앞뒤 좌우 모두가 길손의 눈길을 유혹할 만큼 秘境이다.
   지리산을 자주 찾는다는 李판사조차도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면서 앞으로 御夫人과 자주 드라이브를 즐겨야겠다고 감탄한다. 부슬부슬 비라도 내리면 계곡자락이 雲霧에 싸여 괴기가 깃든 신비함이 감돌 듯싶다. 곳곳에 널린 대밭 또한 멋진 조화를 이룬다.

   그곳까지 이르는 길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은둔의 고장 淸鶴洞을 한껏 머릿속에 그려 보았는데, 정작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는 순간 이제까지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했다. 어째 차가 끝까지 들어가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만...  
05.jpg

 

   언젠가 안동 河回마을에 갔다가 느꼈던 실망은 차라리 양반이다. 집집마다 민박이요, 발 닿는 데마다 도토리묵에 동동주를 팔거나 어쭙잖은 기념품을 늘어놓고 있는 이 곳을 도대체 무엇 하러 그 멀리서 달려 왔던가?
   해발 900m나 되는 지리산 깊은 산속에도 민박촌이 형성되고 막걸리를 판다는 것이 신기해서란 말인가? ‘전국토의 가든화’가 이루어진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마당에 그게 무슨 화제거리가 된다는 것인가? 시멘트기둥에 기와를 올린 저 집들은 또 무슨 해괴망측한 모습인가?
   차라리 강원도의 산촌을 찾아가면 나름대로 삶을 꾸려 가는 우리네 시골모습을 볼 수나 있지....  

   경호가 보고 싶다던 댕기동자도, 千字文을 읽는 學童도, 이미 이곳과는 인연이 다한 듯싶다. 淸鶴洞의 맨 끝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집에서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村老 한 분을 본 게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 되었으나, 사당을 지을 돈을 시주하는 사람에 한하여 ‘君子小學’이라는 책자를 주는 통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말았다.  

   하기야 그 村老의 말처럼 지금 淸鶴洞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6.25 사변 후에 들어온 外地人들이라니, 애당초 고풍스런 전통문화를 기대한 다는 것 자체가 語不成說이다.
   무슨 別天地인 양 떠들어 대는 싸구려 언론의 행태가 새삼 가증스럽기만 하고, 거기에 놀아난 내 모습에 自愧를 금할 길 없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연수원에 같이 근무하는 목영준 교수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가, “너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나도 이젠 迷夢에서 깨어나야 할 때인가 보다.(1997. 1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