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허가도 받아야(?)(설악산 대청봉)

2010.02.1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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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산허가도 받아야(?)



   1997. 5. 9.(금) 대승령(장수대→대승령→십이선녀탕계곡)
   1998. 5. 8.(금) 마등령(백담사→마등령→비선대)  
   1999. 5. 7.(금) 대청봉(오색→대청봉→한계령휴게소)  

   해가 바뀌고 계절의 여왕 5월이 되면 硏山會에서는 설악산을 찾는다. 언제나 금요일인데, 매년 하루씩 늦어지는 것은 1년이 365일이기 때문이다. . 사법연수원이 존속하고 설악산 수학여행이라는 제도가 없어지지 않는 한, 참가자의 얼굴이 달라질 뿐 설악산 등반은 영원히 이어지리라.

   1979. 7.에 친구(백동선생)와 둘이 3박4일의 일정으로 설악산 대청봉을 오른 후 정확히 20년만에 다시 대청봉을 찾았다. 20년 전에는 사법연수생의 신분이었는데,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司法硏修院 敎授의 신분이라는 것이 다를 뿐, 산을 오르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산이 있어 산을 오른다'는 멋진 말도,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맛볼 수 있다'는 거창한 구호도, 나에게는 모두 언어의 遊戱일 따름이다. 그냥 산이 좋아서 산을 찾을 뿐이다.

   1999. 5. 7. 08:50. 대청봉 정복(?)을 위한 고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출발지는 五色(해발 930m)이다.
   설악산의 그 많은 등산로 중에서 五色을 출발지로 잡은 것은 가장 짧은 시간에 정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五色은 다섯 가지 색깔의 약수가 샘솟고, 다섯 가지 색깔의 꽃(五色花)이 피는 나무가 자란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양양군에 속하며, 그래서 양양 사람들은 한계령을 五色領으로 부른다는 말도 전해진다. '한계령'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한계리'는 인제군에 속한다].  

   이번 산행에 참가한 교수는 모두 14명이다. 처음에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대청봉을 가볼 수 있겠냐는 유혹에 硏山會 역사상 유례가 없는 28명의 교수가 등반 신청을 내 주최측을 당혹하게 하더니, 자신은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임을 강조하는 二不公子(이동기 교수)의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一喝(형식은 어디까지나 '등산안내문'이었다)에 14명이 질겁하여 중도 포기하고, 결국 나머지 용기 있는(?) 14명의 교수(이상훈, 박상옥, 한위수, 노영보, 심상철, 이동기, 성윤환, 박병대, 석호철, 이동명, 이형하, 이인복, 조관행, 그리고 나)만이 등산화의 끈을 졸라매었다.

   "오색매표소를 지나 약 500미터 가량은 계곡 길로서 평지이나, 그 곳으로부터 약 1시간 넘게 소요되는 제1휴게소까지의 길은 아무런 경관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앞사람의 엉덩이는커녕 뒤꿈치만 겨우 보일 정도의 무지막지한 급경사길이다.ㆍㆍㆍ등산로를 따라 진행하다 보면 우측이 설악폭포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그 곳에서 급경사길을 약 20여 미터 정도 내려가면 냇물이 흐르고 주위에 바위가 있어 그런 대로 쉬어갈 만하다. 그러나 그 곳 바위는 미끄러울 뿐만 아니라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의 설악폭포로 '번지점프'를 하게 될 위험성이 높다.ㆍㆍㆍ 서북능선을 따라 쭉 내려가다가 귀떼기청봉하고 한계령으로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그 곳은 해발 약 1,250미터 내외인바, 그 곳에서 해발 930미터 정도인 한계령휴게소까지는 오색에서 설악폭포를 오를 때에 비교될 정도의 급경사길(내리막)로서, 하산하는 것보다 쉬엄쉬엄 오르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下山시에는 발바닥이 신발 안쪽으로 쏠리므로, 발톱이 길면 발톱이 신발 안쪽과 마찰되어 여러 시간을 그런 상태에서 걷다보면 발톱이 빠지는 수가 생기므로, 손톱은 안 깎아도 좋으나 발톱만은 짧게 깎고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五色의 매표소에서 드디어 출발!

   이 날은 대명콘도가 위치한 학사평과는 달리 바람도 심하지 않고 날씨 또한 쾌청하여 등산하기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지난 밤 연수생들과 어울리느라 새벽 3시는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가 6시도 안 되어 깼건만, 생각보다 머리가 맑다. 대자연의 품에 안겨 있기 때문일까.  


   새 학기 시작과 더불어 硏山會 총무의 중책을 맡은 박병대 교수와 함께 나는 맨 나중에 출발하였다. 출발은 먼저 해도 곧 뒤로 처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이 아무래도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한 지 20여분이 지나 본격적으로 오르막길이 시작되면서 中砥大師(이상훈 교수)의 발걸음이 예사롭지 않다. 워낙 점잖아 말이 없어 그렇지 한위수 교수도 힘이 든 눈치이다.  

   언뜻 中砥大師의 얼굴을 보니 벌써 땀방울이 샘솟는다. 그리고 잠시 후부터는 아예 물이 흐르듯 한다. 어제 저녁부터 밤새 마신 술, 아니 마등령 등산 이후 지난 1년간 마신 폭탄주가 肉水로 변해 배출되는 순간이다. 燒酒를 내리는 기구를 본 일이 없어 잘은 모르겠으나, 아마도 저런 식으로 내리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면 中砥大師의 肉身은 燒酒 제조기?  

   中砥大師가 속한 1반 교수진을 보면 완전히 헷갈린다. 검사 같은 판사 中砥大師는 술에 절어 이처럼 뒤에서 악전고투를 하는 반면, 판사 같은 검사 金精道士(박상옥 교수)는 맹물파의 巨頭답게 바지가랑이에서 바람소리를 쌩쌩 내며 진작에 앞서 갔다. 자칭 변호사 같은 판사라는 또 한 명의 1반 교수, 滿虛禪師(허 만 교수)는 아직도 昨醉未醒인 채로 꿈나라를 헤매고 있으리라. 혹시 그 옆에는 나더러 "일영아, 너 참 많이 컸다"고 하던 간(肝) 큰 '성보성님' 螢山幇主(이성보 교수)께서 여전히 酩酊 상태에서 코를 골고 있지 않을까.  

   中砥大師 덕분에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다 보니, 선두 그룹과 한참 벌어졌다. 겨우겨우 따라잡으면 그들은 그 때까지 쉬었던 터라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 이제 갑시다" 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게 여간 얄밉지 않다.  

   분명 지난 밤에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아침에도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목욕재개(?)까지 하는 바람에 2시간 정도밖에 못 잔 것으로 아는데, 연수원의 인격자 素淡선생(석호철 교수)이 선두그룹을 형성하는 것이 신기하다. 또한 평소 硏山會의 산행에서 좀처럼 얼굴을 보기 어려운 水鄕處士(노영보 교수)가 커다란 지팡이를 짚고 선두에서 盧지심처럼 뚜벅뚜벅 걷는 것도 不可思議다. 체육대회 때 발을 다쳤다고 엄살을 떨던 조관행 교수도 예외는 아니다.  

   五色에서 대청봉을 오르는 길이 처음 1시간 동안은 가파르기는 하지만, 二不公子의 말처럼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일 정도로 무지막지하지는 않았다. 원 사람이 '뻥'이 심하기는... 공연히 남의 손님만 쫓았잖아. 툴툴거리는 소리를 들었는가, 二不公子가 말한다.  

  "이보게 凡衣, 생각해보게나. 28명이 다 왔다고 가정하세. 그 대부대를 이끌고 어떻게 대청봉을 오를 건가. 대청봉이 뭐 동네 뒷산쯤 되나. 나는 처음에 그 많은 사람들이 간다고 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네. 아마도 밤이 깊어서야 하산을 마칠 걸세. 그래서 아예 손님을 쫓을 작정으로 겁을 준 것이네"  

   듣고 보니 옳은 말이다. 전문산악인 뺨치게 산을 자주 찾는 二不公子답게 역시 생각이 깊다. 사실 내심으로는 산행에 참가한 14명도 상당수가 지난 밤 술에 절었기 때문에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을까 걱정하던 터였다.

   번지점프를 한다는 설악폭포는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쳤다. 단지 산행 중 유일하게 한 번 계곡물을 만났는데, 그 물이 말 그대로 산삼 썩은 물이었다. 식수용으로 그 물을 한라생수병에 담으면 한라생수인가, 설악생수인가? 전형적인 表裏不同이다.  

   얼마를 걸었을까, 이제는 中砥大師의 숨결이 한결 부드럽다. 얼굴에 혈색도 돌고, 걸음걸이도 한결 나아졌다. 아마도 술이 다 빠져나간 모양이다. 몇 시간 후면 다시 채워지겠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드디어 素淡선생이 힘들어한다. 거친 숨을 토로하며 하는 말,

   "어이, 二不선생!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까마귀 밥은 안 되게 이불을 덮어주오."

부탁도 걸작이지만, 그에 대한 二不公子의 대답 또한 걸쭉하다.  

   "걱정 말게. 내가 돌(石) 무덤을 하나 만들어주지."

   그러고 보니 하늘에는 까마귀가 떠다니고 계곡 저 밑에서부터는 바람이 불어 올라오는데, 골풍인지 돌(石)풍인지 분간이 안 된다.  


   五色을 떠난 지 4시간. 5km를 걸어 드디어 해발 1,708m의 대청봉 정상에 도착하였다. 남한에서는 백록담(한라산), 천왕봉(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설악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쾌청한 날씨 덕분에 화채봉, 천불동계곡, 공룡능선, 서북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속초 앞 동해바다도 보인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四通八達의 정상이니 바람 또한 사면에서 불어온다. 詩 한 수가 없을 수 없다.  

    曳杖陟崔嵬하니(지팡이 짚고 가파른 봉우리 오르니)
    長風四面來라 (시원한 바람 사면에서 불어오네)
    靑天頭上帽요 (푸른 하늘은 머리 위의 모자요)  
                                                                    碧海掌中杯라 (파란 바다는 손 안의 술잔이구나)  

그 옛날 율곡선생이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지은 시(그래서 제목이 '登毘盧峰'이다)인데, 어찌 금강산에만 해당하랴. 비로봉보다 70m 더 높이 올라왔으니(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은 해발 1,638m이다), 대청봉에 오른 지금에 오히려 더 어울리리라.
   야산(野山? 夜山?)은 그리도 좋아하면서 정작 등산 소리만 나오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東光大師(권재진 교수)나 樵愚禪師(목영준 교수)가 이 맛을 알까? 이 점은 晴虛法師(김지형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더 오를 곳이 없으니 내려갈 일밖에 안 남았다. 저 아래 중청 산장이 보인다. 점심식사가 기다리는 곳이다. 예의 선발대가 먼저 떠나고 나는 여전히 맨 뒤다. 뒤늦게 도착하니 素淡선생이 산장 밖 통나무 식탁에 앉아 김밥을 먹다 말고,  


   "어이, 범이선생(素淡선생은 '범의'라는 발음을 '학실하게' 못하고 '범이'라고 한다), 오해 말게. 자네가 육안에 또렷이 들어오고 나서 먹기 시작했네."

   이 어르신께서 작년 마등령 등산 때 선발대로 갔다가 김밥을 먼저 먹어 치우는 바람에 硏修五賊, 그것도 수괴로 몰린 일이 있는지라, 이번에는 지레 해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 짓고는 못 사는 법인가.
   素淡선생이 김밥을 펼쳐 놓고는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내가 시야에 들어오자 비로소 먹더라고 옆에서 성윤환 교수가 거든다. 이쯤 되면 내가 오히려 민망하다. 도리없이,  

   "어이구, 素淡선생님! 염려 마시고 많이 드십시오."

   산장 측에서 끓여준 컵라면의 맛이 일품이다. 녹차도 한 잔 마실 수 있으면 錦上添花일 텐데 아쉽게도 커피뿐이다. 녹차도 대기업 제품은 재료를 중국에서 수입한다는 소리를 듣고부터는 커피 마시면 달러가 줄줄 샌다는 소리를 안 하기로 했다. 그래도 커피를 마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싫은 걸 어쩌랴.


   오후 2시 5분. 하산이 시작되었다. 목적지인 한계령 휴게소까지는 9.5km(이정표에는 8.3km로 표시되어 있기도 하다). 대략 5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그러나, 배부르겠다, 날씨 좋고 경치 끝내주겠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하산길이다. 더구나 중청봉의 허리를 끼고 도는 길은 푹신한 흙길인데다, 그것도 평평하게 한참 동안 펼쳐지는 까닭에 그야말로 신선놀음 하는 기분이다.
   그 길가에는 '얼레지'라고 불리는 초롱꽃류의 야생화가 만발하여 멀리서 온 객들을 반기고 있으니, 그것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설악산의 '생태계 조사(?)'는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런데 이런 微吟緩步의 유유자적하는 길은 '끝청'에서 말 그대로 끝난다. 이 때부터 능선길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며 내려가게 되는데, 고생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능선의 오른 쪽으로는 그 유명한 龍牙長城능선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점봉산(해발 1,24m)과 가리봉(해발 1,518m)이 시선을 끄는데, 그 경치에 취하여 정신을 잃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 천길 낭떠러지를 한순간에 내려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龍牙長城능선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바위들만으로 능선을 이룬 것이 마치 용의 이빨을 닮았다 하여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하는데, 그 능선을 따라서도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거대한 자연과 그것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도전이 아우러지는 현장이다.
   그러나 그 능선길은 실정을 알고 나면 여간해서 가지 않을 것이라고 凡松小子(이동명 교수)가 힘주어 말한다. 자기가 전에 멋도 모르고 따라나섰다가 죽을 고생을 한 일이 있다고 한다. 一見해서도 참으로 험해 보인다.  

   그 龍牙長城능선은 대청봉을 향해 달려가다 소청봉의 바로 밑에서 끝나는데, 바로 그 곳에 유명한 봉정암이 자리하고 있다. 부처님의 頂骨사리를 모셔 놓은 寂滅寶宮이다. 그 높고 험한 곳까지 사리를 날라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장율사는 참으로 대단한 분이었을 거라고 헤아려본다.  

   오르막길에서 그리도 헤매던 中砥大師가 내리막길을 만나니 펄펄 난다. 산을 오를 때는 낑낑대고 내려갈 때는 총알 같다면 그건 아주 좋지 않은 습관이라고, 밥 한 술이라도 제대로 얻어먹으려면 빨리 고치라고, 아무리 일러주어도 소용이 없다. 누가 있어 말리리요.  

   해발 1,300m 지점의 능선삼거리에서 귀떼기청봉을 오른쪽에 두고 한계령휴게소 쪽으로 방향을 트니 二不公子가 겁을 준 바로 그 급경사길이 기다린다.
   이 때쯤이면 이미 무릎의 도가니가 경계경보를 발한 지 오래되었는지라, 한 발 한 걸음이 천근만근인데, 하필이면 밧줄을 잡고 내려가야 하는 급경사라니.... 에구구!  

   급기야 二村선생(이형하 교수)이 쭉 미끄러진다. 팔을 걷어 올리는데 보니 찰과상을 입은 듯하다. 큰 부상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띠가 같은 안방마님한테 구사리를 받을 일이 걱정되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盧지심 水鄕處士도 어느 새 팔꿈치가 까져 있다. 오호라, 부상자는 늘어가는데 갈 길은 왜 이다지도 멀담!  

   한계령휴게소까지 2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오고 나서는 갑자기 골짜기에서 구름이 피어오른다. 어쩌나, 비라도 오면 큰 일인데... 中砥大師가 다시 뒤처진다. '웬수놈의 술, 다시는 먹지 말아야지'. 다짐할 만도 한데, 그래도 먹을 것은 먹어야지 한다. 그래, 아마도 智亨煙士(이인복 교수)가 담배를 끊거나 내가 밥을 끊는 게 더 쉬울 것이다.  

   오후 6시 35분, 마침내 한계령 휴게소(해발 930m)에 도착했다. 모두 파김치가 된 모습이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 일! 밖으로 나가는 철문이 닫혀 있다.
   맙소사, 五色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입산허가만 받았지 산에서 내려와 속세로 돌아가는 출산허가(?)는 안 받은 탓이다. 들어 올 때는 너희 맘대로 들어왔는지 몰라도 나갈 때는 너희 맘대로 안 된다고 설악산이 마지막으로 훈계하는 듯하다. 이 일을 어쩌지...  

   그러나 길이 있었다. 越牆이라는 것이 꼭 梁上君子만의 특권은 아니지 않는가. 연수원 교수 중에는 유난히 '짧은 다리'가 많은데, 이미 後世 걱정을 할 나이들은 아니기 때문에 높은 철문을 마음 놓고 넘을 수 있었다.
   산행을 무사히 마쳤음을 산신령이 축하해주는 것일까, 때맞추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999.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