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풀 사이로[명성산 : 궁예굴]

2010.02.16 11:29

범의거사 조회 수:10216

 


                    억새풀 사이로



   대학교 3학년 때인 1976년 여름 그 기슭에 자리한 慈仁寺에서 고시공부를 함으로써 첫 인연을 맺었던 鳴聲山을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98. 11. 7. 에 다시 찾았다.  
   사법연수원 28기 연수생들이 졸업을 얼마 안 남겨둔 지라, 내가 민사재판실무를 가르친 7반 연수생들에게 山行을 제의하였는데, 뜻밖에도 그들이 목적지를 이 곳으로 정한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도 가족들과 함께 산정호수를 몇 번 찾은 적이 있어 감회가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그 때 산을 내려 온 후로 정상을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졸업시험마저 끝난 후여서인지 50명의 반원 중 참가인원이 20여명에 불과하여 처음에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였는데, 동행하신 임승순 교수님(형사재판실무를 가르쳤다)의 말씀마따나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오붓하게 산행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좋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래서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던가.  

   산행의 출발지점이 慈仁寺인 것도 이채롭다. 산 이야기만 나오면 힘이 치솟는, 그래서 궂은 일은 혼자 다 하는 최성환 연수생이 한 주 전에 미리 답사를 하고 코스를 잡았는데, 많은 등산코스 중에서 유독 慈仁寺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잡은 것을 무어라고 설명하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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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내가 촛불 켜고 공부하던 시절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손바닥만한 목조건물의 대웅전뿐이고(당시에는 '寺'라고 하기보다는 '庵'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정도로 아주 작은 절이었다), 시멘트콘크리트와 벽돌로 도배장판을 하여 절분위기를 완전히 훼손하여 버린 건물들이 여럿 들어선 지금의 慈仁寺는 어제의 그 절이 아니다.  

   千手經을 읊조리며 예불을 올리고 계곡물로 목을 축이던 옛날의 추억을 되살릴 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남겨 놓은 것이 신기한 대웅전도 단청을 새로 하는 바람에 '절' 하면 떠올리게 되는 '고색창연'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때문에 등산길에 절을 만나면 의례히 하던 참배는 고사하고 절 마당에서의 합장조차 생략한 채 곧바로 산행을 재촉하였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그 절의 이름 모를 主持나 나나 결국 똑같은 셈이다. 매번 지나고 나서 뉘우치는 이 우매함에서 언제나 벗어날까.  

   鳴聲山은 태백산맥에서 가지를 치고 나온 광주산맥의 줄기에 자리 잡고 있는 名山이다.
   철원평야를 배경으로 泰封을 세운 궁예가 무술과 도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궁예굴이 중턱에 있는가 하면, 그 궁예의 뒤를 이은 왕건에 의하여 신라가 망한 후 금강산으로 가던 麻衣太子가 도착하자 산도 슬퍼서 울었다 하여 '鳴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 전해지는 등 설화가 많은 곳이다.
   기슭에 1923년에 조성된 인공호수인 山井湖水의 경치가 빼어나 6.25 동란 전에는 김일성이 이 곳에 별장을 지어 놓고 찾았다고도 한다.

   鳴聲山은 해발 9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지만 출발지인 慈仁寺의 표고가 워낙 높은지라 산행을 시작하여 1시간 20분 정도 오르면 산의 능선길에 다다른다. 대신 매우 가파른 오르막길인지라 땀 깨나 흘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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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에 땀도 식힐 겸 뒤돌아보면 발치 저 아래로 산정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곳에서 뱃놀이를 하는 善男善女들의 모습도 보인다. 높이 올라갈수록 왜 '山井'호수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뺑뺑 둘러 높은 산인데 그 가운데 호수가 우물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3주 동안 채점하느라 체력을 소모해서인가, 아니면 이제는 나이를 못 속이는가 숨이 차다. 이선희, 임해지 두 유부녀 연수생도 잘만 올라가는데 말이다. 巨軀의 김정진 연수생이 뒤에서 헐떡이는 것이 안쓰러우면서도, 그래도 나는 낫구나 하고 자위하는 심보는 또 무어람.
   김정진 연수생은 7반 총무라는 직책만 아니었으면 절대로 이번 산행에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임승순교순님의 말씀을 들으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필요에 의해서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직책에 얽매여 허덕이는 것이 바로 인생이 아닐는지.  

   올라오느라 흘린 땀을 시원한 바람이 식혀주는 것은 어느 산의 능선이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鳴聲山의 능선길은 좀 독특하다. 북쪽의 主峰을 항하여 왼쪽은 산정호수가 내려다보이는 天涯의 절벽인데 비하여, 오른쪽은 펑퍼짐한 고원지대이다.  

   '이 곳에 취락이 형성되었다면 산정호수는 영락없이 그랜드캐년꼴이 될 것이고, 이 곳을 찾는 이들은 鳴聲山을 등산하는 것이 아니라 계곡의 산정호수를 찾아 하산하여야겠지'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취락 대신 군사훈련장이 등산객을 맞는다. 훈련목표지점을 표시하는 듯한 ㉮, ㉯, ㉰, ㉱의 흰 글씨가 씌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평소 유머감각이 뛰어난 신현식 연수생(7반 반장)이 저 곳은 군사훈련장이 아니라 視力검사장이라고 그럴 듯한 유권해석을 한다.  

   鳴聲山 고원지대의 白眉는 억새풀이다. 몇 만평에 펼쳐져 있는 억새가 실로 장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영남알프스 재약산 사자평의 억새가 최고라지만 아직 가보지 않아 잘 모르겠고, 내가 이제까지 본 것 중에는 이 곳이 단연 으뜸이다.
   위도가 높은 북쪽지방인지라 억새의 솜털들이 많이 떨어지긴 하였으나(10월 중순이 절정이며, 이 때 축제도 열린다), 찾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에는 아직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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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숲 속에 들어가 숨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완전히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래서인가,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후에도 1년에 한 번씩 가을에 모여 이 곳으로 산행을 하자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모은다. 평균 연령이 30세가 넘도록 공부에 매달려 온 바람에 아직도 사회생활을 변변히 하여 보지 못한 연수생들인지라 소박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졸업 후에도 그렇게 가까이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아마도 그 꿈은 실현되기가 어려우리라.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험난한 세상뿐이니 말이다.

   산을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하산길은 고원지대를 통과하여 밋밋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힘이 안 든다. 게다가 중간의 登龍폭포가 쉬어 가라고 발길을 붙잡는다.
   거대한 암반에 구멍을 내고 2단으로 떨어지는 이 폭포는 삼부연폭포와 더불어 鳴聲山의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이미 용이 되어 승천하였는지 물이 떨어져 생긴 웅덩이에는 이무기의 그림자도 안 보인다.
   하기야 飛龍폭포에 간다고 해서 용이 나는 것을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뻔히 알면서도 왜 자꾸만 집착을 하는 것일까.

   귀경길에 애초의 일정을 바꾸어 일동 사이판에 가서 온천욕을 하고, 이동막걸리를 곁들인 이동갈비로 포식을 하고 나니, 찾아오는 것은 졸음뿐이다. 쿨쿨.....(1998.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