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걷는 길(가을의 향기)

2010.02.16 11:40

범의거사 조회 수:10011


 

              아들과 함께 걷는 길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을 '부권 상실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없고 아빠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아버지는 없고 아빠만 있는 시대'의 또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아이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오래된 길이야기를 하고, 아이가 태어난 대관령 너머의 오래된 집과, 삶의 거울처럼 훌륭했던 조상들의 이야기를 하며 그 아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딘지 스스로 깨닫게 하고, 또 작게나마 삶은 이런 거란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참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들,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들, 그리고 어른이 되어가더라도 어린 시절의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연과 우주의 거울들에 대한 이야기를 대관령의 푸른 나무와 그 나무가 선 길섶의 작은 들풀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3년 전 늦은 봄, 당시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이던 두 아들로부터 생일선물로 받은 책,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순원 작, 해냄출판사)에 나오는 작가의 말이다. 작가는 대관령의 굽이굽이 60리 길을 아들과 함께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 때 그 책을 읽으며 나도 한 번 그 책의 주인공처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길이 꼭 대관령은 아니더라도...

 

   새 천 년의 첫 개천절인 2000. 10. 3. '말썽이'(작은 아들의 별명이다)와 단 둘이 집을 나섰다. '거북이'(큰 아들의 별명이다)는 중간고사가 며칠 남지 않아 동행이 어려웠고, 두 아이의 엄마는 자연히 집에 남게 되었다. 처음에는 강원도로 기차여행을 할까도 생각해보았으나, 하루에 다녀오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라서 서울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사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관하여 제일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찾은 곳이 창덕궁이다. 1976년까지는 출입이 자유로웠는데, 3년간의 개보수 끝에 1979년 다시 문을 연 후로는 안내원 없이는 출입이 안 되는 유일한 고궁이다. 하절기에는 매 시간대의 15분과 45분에 입장이 가능하다. 외국인들을 위한 안내시간은 따로 마련되어 있다(영어, 일어).


대화 1 (여의도에서 종로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나 : 천 원이면 너와 나 두 사람의 버스요금이 되냐?
   말썽이 : 그것으로는 모자라.
   나 : 너는 초등학생 요금 내면 안되니?(말썽이는 키가 작아 평소 초등학생으로 오인을 받는다)
   말썽이 : 아빠 판사 맞아? 판사가 법을 안 지키려고 해?
   나 : .....(윽, 한 방 먹었네!)

 

   종로 2가에서 버스를 내려 헐리우드 극장을 향해 걸었다. 공동경비구역(JSA) 영화표를 예매하기 위해서였다.  


대화 2 (낙원상가의 건널목에서 보행자신호 대기 중)

 

   말썽이 : 차가 안 오는데 그냥 건너갈까?
   나 : 야, 너 판사 아들 맞아? 판사 아들이 법을 안 지키려고 해?
   말썽이 : .....(멀쓱한 표정이다)  
   나 : ....(후후, 복수했다!^^)


   영화표를 산 후 창덕궁까지 걸어갔다. 도중에 유서 깊은 교동초등학교를 지나다보니, 그 담벼락에 이 학교가 1894년에 개교되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부착되어 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학교가 잘 가꾸어져 있다는 것이 그 담벼락 너머로 한 눈에 들어온다.  

   일부러 큰길을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한옥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 여관이나 음식점으로 쓰이고 있지만 틀림없는 우리의 전통가옥이다. 하지만 말썽이는 믿기지 않는 듯 정말 한옥이냐고, 일부러 한옥처럼 꾸민 것 아니냐고 몇 번을 되묻는다. 아이의 질문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안쓰럽다.  

 

   휴일의 오전 11시 20분이면 이른 시각일까.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이 한적하기만 하다. 입장시각까지는 25분이 남아 있어 매표소 옆의 매점으로 갔다. 과자를 손에 집어 들 때만 해도 '역시, 아이는 할 수 없군' 했는데, 음료수로 사이다나 콜라 대신 생수를 찾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바꿔 먹는다. 탄산음료보다는 물이 훨씬 맛있다는 이 아이는 지금 중학교 1학년이다.  

 

01.jpg   돈화문 앞에는 옛날 복장을 한 수문장이 두 명, 포도대장(?)이 한 명이 서 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표정에 한 치의 변화도 없다.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인지는 몰라도 엄숙 그 자체이다. 저 사람들 하루 종일 저런 표정을 하고 있으려면 무척 힘들겠다고 말썽이가 제 딴에는 걱정을 한다. 괜한 걱정일 것이라고 치부하고는 宮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덕궁을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안내판 앞에 4-50명의 관람객이 모여들었고, 마이크를 손에 든 여자안내원이 개인 행동을 하지 말라는 주의와 함께 관람코스를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一見하여 매우 숙련된 안내원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보존을 위하여 아직도 폐쇄되어 있는 지역을 제외하고 한 바퀴 도는데 대략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고궁 관람이라는 것이 본래 유유자적하는 맛이 있어야 제 격인 법인데, 안내원을 따라 단체로 관람을 한다니 이상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어쩌랴,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차라리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덕분에 모르던 것을 배울 수 있을 테니 좋지 않냐고. 그래서 말썽이더러 지금부터 안내원의 설명을 잘 들으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4-50 명의 인원을 저 여자안내원 혼자서 통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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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은 조선시대 태종 5년(1405년)에 세워진 궁궐이다. 경복궁이 正宮이니 창덕궁은 離宮인 셈이다. 그 후 세조가 궁궐의 규모를 넓혀 15만여 평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2년(1610년)에 완전히 복구하였고, 이후 고종 때 경복궁이 重建되기 전까지 270여 년간 역대 임금들이 이 곳에서 정사를 살폈다고 역사는 전한다.
   그 후 일제시대인 1917년 內殿이 불에 타버리자 경복궁의 교태전과 강녕전을 헐어 옮겼다고 한다(그것이 지금의 대조전과 희정당이다).  

   처음 궁궐을 세운 태종, 이를 확장한 세조, 그리고 복구한 광해군, 이들은 모두 왕위 長子承繼가 원칙이었던 조선시대에 작은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풍운아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卽位는 늘 많은 사람들의 피를 불러왔다. 그런데 그들은 왜 하나같이 正宮인 경복궁을 마다하고 이 창덕궁을 선호하였을까? 그로부터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왜 큰 아들은 집에 놔두고 작은 아들만 데리고 와서 저 宮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그런가 하면 이 궁궐이 불에 탈 때는 꼭 일본인들과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이 그렇고 일제시대가 그렇다. 이는 우연인가 필연인가. 나아가 正宮을 헐어다 離宮을 꾸민 일본인들의 심사는 과연 또 무엇이었을까? 경복궁의 정면에다 총독부 건물을 세워 精氣를 끊으려 한 것과 같은 맥락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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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의 관람은 입구의 안내판을 지나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꺾이면서 나오는 금천교(錦川橋)를 건너면서부터 시작된다. 궁 안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개천(안타깝게도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을 가로지르는 이 돌다리 밑에는 돌로 만든 거북이(북쪽)와 해태(남쪽)가 다리를 지키고 있다.
   한쪽에서는 소실된 건물들의 복원공사가 한창인데 仁政殿으로 향하는 첫 관문인 進善門을 들어서니 의외로 경내가 조용하다. 보기 좋게 깔린 돌길을 가리키며 안내원이 曰,

  "이름하여 御道이니 지금부터 모두 왕이 된 기분으로 이 길을 걸어보세요." 04.jpg

 

   그 御道를 조금 걷다 보면 이내 왼쪽으로 仁政殿의 웅장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왕들의 즉위식, 결혼식, 신하들의 賀禮, 외국 사신 접견 등 공식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크기나 모양이 경복궁의 勤政殿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그 이름이 묘하다. 조선을 건국하여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고 正宮인 경복궁을 세운 태조는 그 궁의 正殿을 '勤政殿'이라고 이름지었다. 부지런히 정사를 살피겠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그 뒤를 이어 형제간의 살육전을 거쳐 왕위에 오른 태종은 離宮인 창덕궁을 세우고 그 正殿을 '仁政殿'이라고 이름지었다. 어질게 정사를 살피겠다는 뜻이리라. 나라를 처음 건국한 태조와 살육전을 거쳐 즉위한 태종의 王으로서의 마음가짐이 같을 수는 없었으리라.05.jpg

 

   仁政殿의 처마 위에는 우리 나라의 전통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동물 조각들이 세워져 있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확실하지는 않으나 맨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西遊記에 등장하는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등을 조각하여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잡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이들을 '雜象'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것도 경복궁의 勤政殿과 대비되는데, 勤政殿에는 이 조각의 숫자가 11개인 데 비하여 이 곳 仁政殿에는 9개밖에 없다. 正宮이 아닌 離宮을 선호한 작은 아들의 컴플렉스가 곳곳에 배어 있는 느낌이다.

   仁政殿을 지나면서부터는 각종 殿閣이 계속 이어진다. 왕이 평소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는 편전인 宣政殿, 왕의 처소로 어전회의실로도 사용한 熙政堂, 왕과 왕비의 침전이자 왕비가 거처하는 중궁전인 大造殿 등이 그 중 눈에 띄는 것이다. 선정전은 우리나라 궁궐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청기와 전각이다.06.jpg


   특이한 것은 대조전의 지붕이다. 이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그 이유는 龍에 비유되는 왕이 상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건물 안에 이미 용이 있으니 지붕에 다시 용마루를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다른 궁궐도 마찬가지여서 왕이 거처하던 건물에는 용마루가 없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한 번 확인해보아야겠다.  

   大造殿은 말 그대로 큰 것을 만드는 곳이니, 왕과 왕비가 '다음 대의 왕'을 만드는 곳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은 큰 것은 고사하고 작은 것조차 만들지 못한 채 관광객의 웃음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人傑은 간 데 없고 秋草만이 나그네를 맞는다. 그렇게 역사는 흘러가는 것일까.
   대조전의 옆으로 이어지는 건물에는 많은 방들이 있다.

여기서 다시 이어지는 대화.


대화 3 (대조전 옆건물들의 방 앞에서)

 

   말썽이 : 아빠 이 많은 방들을 누가 썼어?
   나 : 글쎄, 왕비를 모시던 상궁들이 자던 곳 아닐까? 상궁들은 늘 왕비 가까이 있어야 했으니까.  
   안내원(아마도 부자간의 대화를 엿들었나 보다) : 여러분이 고궁에 오시면 많은 방들을 보게 되는데, 그 용도를 알려면 먼저 바닥을 보세요.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으면 그 곳은 낮에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고, 온돌로 되어 있으면 잠자던 곳입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지체가 낮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거처하는 방만큼은 바닥이 전부 온돌이었습니다.
  
   이럴 때 人本思想을 떠올리면 너무 거창한가. 아무튼 안내원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운다. 그 한편으로는 내 나라의 전통문화에 관하여 너무 아는 게 없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괴감을 감출 수 없다. 대조전 옆건물들의 방은 바닥이 모두 마루이다. 

   약간은 답답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계속 이어지는 전각들을 벗어나니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다. 한 쪽은 樂善齋로 이어지고 다른 한 쪽은 후원, 이른바 비원으로 이어진다. 안내원을 따라 먼저 樂善齋로 방향을 잡는다. 헌종 13년(1847년)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은 곳이란다. 07.jpg

이를테면 별채인 셈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영친왕비인 李方子 여사가 임종 때까지 살던 것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그 동안 이름만 듣다 막상 와보니 꼭 사대부집에 온 기분이다. 그만큼 건축양식이 궁궐과는 영 딴판으로 그냥 세도가의 집을 연상케 할 따름이다. 왕이 거처하던 궁궐 안에 이런 식의 집을 지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혹시 왕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던 시절(헌종 때이면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릴 시절이다)이었던 것과 무슨 상관관계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무지랭이의 생각으로 그친다.  

   말썽이가 몇 시냐고 묻는 바람에 시계를 보니 서두르지 않으면 예매해 놓은 영화에 늦게 생겼다. 이를 어쩌나 하고 있는데, 마침 한 관람객이 안내원한테 화장실의 위치를 묻는다. 후원에 가야 있다면서 먼저 가서 볼 일을 보고 기다리란다. 개인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러고 보니 안내원을 따르던 사람들의 숫자가 어느 새 많이 줄었다. 쯧, 역시 여자안내원 혼자서 4-50 명을 통솔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잘 되었다 싶어 나와 말썽이는 낙선재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일행에서 벗어나 화장실이 있는 후원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창덕궁의 꽃은 아마도 後苑일 것이다. 한 때는 창덕궁이란 말보다 후원의 별칭인 '秘苑'이란 말이 더 일반화되어 비원이라고 해야 사람들이 알아들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조성된 후원은 말 그대로 뒤뜰이다. 왕이 산책을 하며 머리를 식히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연못(부용지, 애련지, 반도지)이 있고 정자(부용정, 주합루, 연경당 등)가 있다. 그리고 샘물이 흐른다(옥류천). 어릴 적(출입이 자유로웠던 시절이니 30여 년 전의 일이다) 기억에 참으로 맑은 물이 흘렀던 옥류천은 미개방 지역이어서 볼 수가 없다.
   말썽이는 인정전 등의 전각에서 이곳 후원까지 왕이나 왕비가 가마를 타고 왔을까 걸어왔을까가 꽤나 궁금한 모양이다. 설마 산책길을 가마를 타고 왔겠냐고 대답하긴 했지만, 제법 먼 길인지라 단언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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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지와 그 물가에 세워진 부용정이 후원의 白眉이다. 부용지 주위의 풍경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아름답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달력이나 화보집에서 그 아름다운 모습의 사진(특히 단풍이 들었을 때)을 흔히 볼 수 있는 정자가 바로 부용정이다.
   이 부용정의 주춧돌 중 두 개는 우리의 전통 양식 그대로 연못에 놓여져 있다. 이는 정자에서 노니는 선비가 발을 씻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발은 단순한 발이 아니라 곧 선비의 마음을 가리킨다.  

   이 아름다운 후원을 언제부터인가 '秘苑'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영문으로는 SECRET GARDEN 이라고까지 표기한다. 과연 누가 붙인 이름일까? 내막을 알 길이 없는 나로서는 창덕궁을 卑下하기 위하여 작위적으로 붙인 이름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09.jpg

 

   후원에서 서쪽으로 비탈길을 오르면 돈화문까지 산길이 이어진다.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등 다른 궁궐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사실 창덕궁의 조감도를 보면 전각들이 차지하는 터보다는 숲이 차지하는 공간이 훨씬 넓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창덕궁의 자랑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찌 보면 그 때문에 正宮의 자리에서 비켜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떠랴. 여기 저기 둘러보느라 지친 관람객에게는 더 없는 휴식공간인 것을. 이곳에서만큼은 그냥 유유자적하면 되는 것이다.

   그 유유자적의 발걸음이 끝나는 곳에 700년 된 향나무가 한 그루 용틀임을 하고 있다. 용틀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한 사람은 바로 이 향나무를 찾아가 보면 된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어쩌면 그리도 승천하는 용을 닮았을까. 마치 누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창덕궁을 나와 헐리우드 극장으로 갔다. 부지런히 걸으면 10분 안에 도착할 거리였지만 영화 시작 시간에 쫓겨 택시를 탔다. 택시운전사가 '기본요금 거리를 젊은 사람이 그것도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다니, 아이가 무엇을 배울꼬,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자격지심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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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경비구역'은 관람객 250여만 명의 '쉬리'의 기록을 깨고 4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이다. 한국 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이 될 두 영화가 모두 국토 분단의 비극을 실감나게 그렸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작금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일까.  

 대화 4 (영화관을 나서며)


   말썽이 : 아빠는 쉬리가 더 재밌어, 아니면 공동경비구역이 더 재밌어?
   나 : 글쎄, 긴장감은 쉬리가 더한 것 같고, 감동적인 면은 공동경비구역이 더 나은 것 같다. 웃기는 장면도 나중 것이 많고...
   말썽이 : 공동경비구역은 작품성과 오락성이 모두 별 넷이야.
   나 : ....(이 놈이 별 것을 다 아네) (잠시 뜸을 들인 후) 근데, 너는 만일 전쟁이 난다면 이병헌과 송강호가 서로 상대방을 향해 총 을 쏘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그 반대니?  
   말썽이 : 당연히 쏘아야지, 전쟁인데.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지.
   나 : ....  

   헐리우드 극장에서 인사동은 지척이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인사동 거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휴일에 네 식구가 함께 인사동을 찾곤 했었는데, 근래에는 한 동안 뜸했다. 아이들이 일요일에도 제각각 학원을 다녀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12.jpg

 

   인사동 네거리는 人山人海이다. 북쪽의 안국동로터리까지 이르는 길이 다 그렇다. 서울시에서 전통문화 탐방의 거리로 정하고 작년부터 시작한 거리 새 단장 작업이 마무리된 듯, 차도는 없어지고 아스팔트길이 전부 보도블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길 양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직육면체의 돌기둥이 뉘여서 놓여 있다. 이 곳을 찾는 이들의 휴식을 위한 의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겨울에는 여기에 앉으면 엉덩이가 시릴 텐데...  

   찻집도 기웃, 화랑도 기웃, 고서점이나 골동품점도 기웃,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데(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인사동의 매력이다), '저기는 아빠가 지금 입고 있는 생활한복 샀던 집', '저기는 가족 스티커사진 찍은 곳', '저기는 달마대사 얼굴을 그려 받은 곳', '저기는 짜장면 먹었던 집'.... 말썽이가 하나 둘 주워섬긴다.  

   아하,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다. 영화시간 때문에 오후 3시
가 되도록 아직 점심을 못 먹은 것이다.  

 대화 5 (인사동 네거리에서)


   나 : 너 뭘 먹을래?
   말썽이 : 아빠는?
   나 : 네가 먹겠다는 거.
   말썽이 : 난 아빠가 먹는 거.
   나 : 아니 그러지 말고. 오늘은 일부러 너와 아빠 둘이만 나온 거니까 네가 먹고 싶은 거 사 줄께.
   말썽이 : 그러니까 아빠가 먹고 싶은 거로 먹어.
   나 : 거참, 네가 먹고 싶은 것으로 먹자니까.
   말썽이 : 아냐, 아빠가 골라.11.jpg


   결국 눈에 띄는 대로 근처의 한식집으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더니 말썽이가 삼겹살을 시켜서 밥과 함께 먹자고 한다. 그런데 종업원의 말이 시간이 늦어 밥은 안 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또다시 "뭐 먹을래?","아빠는?"을 되풀이하다가 전에도 가본 적이 있던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말썽이가 고른 음식은 옛날식 간짜장.  
   나중에 집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어휴, 촌놈!" 하며 혀를 찼다. 독일에서 태어난(1988년, 당시 나는 독일에서 법관연수 중이었다) 놈이 먹는 음식은 완전히 국산 토종이란다. 태어난 장소는 독일일지라도 그 바탕이야 父傳子傳 아니려나... (2000. 10. 6.)  


   (後記) 창덕궁을 다녀 온 후 궁궐에 관하여 너무 무지함을 한탄하던 중, 신문에서 우연히 '우리 궁궐 이야기'(홍순민 저, 1999)라는 책이 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곧바로 그 책을 구입해서 창덕궁편을 펼쳤다. 거기에 실린 '비원'에 관한 글을 여기에 옮긴다. '통분(痛憤)의 염(念)'으로.(2000. 10. 23)

   창덕궁은 창덕궁이지 왜 비원인가?  
   비원이란 창덕궁 북쪽 뒷편의 원유-숲을 가리킨다. 조선 당대에는 비원이란 이름은 거의 쓰이지 않고, 후원(後苑), 북원(北苑), 금원(禁苑) 등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1903년(광무 7년) 11월에 창덕궁 후원을 관장하는 기구로서 비원(秘苑)을 증설하면서 비원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비원은 원유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리하는 관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비원이 창덕궁 뒷편의 원유 자체를 가리키는 뜻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순종 연간부터였다. 일제는 이 곳을 비원-비밀스런 원유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실력자들이 순종과 함께 그 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나중에는 웬만한 관리들은 자유롭게 그 곳을 드나들었으며, 더 나중에는 일부러 일반인들을 그 곳으로 끌어들여 관광지로 삼았다.
   후원이 비원이 되면서 비밀스러워진 것이 아니라 누구나 와서 구경하고 '벤또' 먹고 벚꽃 구경하고, 동물원 식물원 구경하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비원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고 입에 익을 수밖에.  
   그러한 저간의 사정이 해방된 지 어언 50년이 넘도록 여전히 지속되어 창덕궁은 간 데 없고 비원만이 남은 것이다. 이름으로만 보아서는 궁궐이 아닌 놀이터만이 남아 있는 셈이요, 조선의 역사는 사라지고 일제의 흔적만 남은 셈이다.  
   이름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여전히 창덕궁이라는 제 이름을 버려두고 비원이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한 우리는 아직도 일제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