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뜬다(월출산)
2012.10.29 17:44
존경하옵는 옥봉선사님,
고희(古稀)를 축하드리는 자리에서 뵌 게 불과 스무날 전인데, 시간이 한참 흐른 듯하네요. 그만큼 세월이 빠른 건가요, 아님 그 반대인가요?
흔히들 무상하다고 하는 그 세월이 만들어낸 “고희(古稀)”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여전히 연부역강(年富力强)하신 모습이 후학에게는 늘 존경과 경이의 대상입니다.
앞으로도 천수를 다하시도록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실 것으로 기대해도 되겠지요?
1999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가요? 그 해 여름 선사님이 광주에서 목민관(牧民官)을 하실 때 소생이 사법연수원의 지도반 연수생들을 이끌고 남도순례를 하였지요. 그 때 광양불고기를 사 주시고 차편도 마련하여 주셔서 연수생들의 감탄을 자아낸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덕분에 소생은 인솔 지도교수로서 어깨를 으쓱하였지요.^^
새삼스레 13년 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때 선사님이 애써 마련하여 주신 차편으로 영암 월출산에 가서 종주에 도전하였다가 태풍을 만나 도중에 구정봉에서 눈물의 회군을 하였었는데, 이번에 재도전을 하여 마침내 성공을 하였기에 보고 말씀을 드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선사님,
선사님 앞에서 나이를 들먹이는 게 송구스럽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40대 중반에 실패한 등정을 50대 후반에 성공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것도 예전에는 팔팔한 연수생들과 함께였는 데 비하여 이번에는 동년배의 죽마고우들과 동반하였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답니다. 비록 촌부의 삶일지라도 그 역시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 아닐는지요.
13년 만에 찾은 도갑사(道岬寺)의 모습은 과거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월우(月佑)스님의 8년간에 걸친 불사로 다시 탄생한 이 천년고찰은 그 규모가 실로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더군요. 비록 많은 당우(堂宇)를 새로 지었지만, 그래도 고즈넉한 절집의 분위기는 여전하였습니다.
해질녘에 도착하여 월출산의 품에 안겨 있는 자태를 대하니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더이다. 사위에 어둠이 깔리고 초승달이 부끄러운 듯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자
“아, 이래서 월출산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확 다가오더군요.
그 달이 보름달이었으면 오히려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둥글고 충만한 만월(滿月)보다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네의 아미(蛾眉)를 닮은 초승달이 더 매력적이지 않을는지요.
서기 880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인 도갑사에는 국보나 보물들이 많지만, 소생의 오감을 사로잡은 것은 그보다는 주지 설도(說道)스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황차(黃茶)와 공양주 보살이 담근 김치가 그야말로 21세기의 살아 있는 보물이었습니다.
비발효차인 녹차와는 달리 40% 정도 발효된 황차는 구수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입안에서 맴도는 말 그대로 명차(名茶)이더군요. 양이 적어 차의 맛을 아는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한다고 주지스님이 말씀하시는 통에 졸지에 ‘귀한 손님’의 반열에 오르긴 하였지만, ‘귀한 손님’의 체면과 ‘양이 적다’는 말씀에 “조금 얻어갈 수 없을까요?”라는 말이 목에 걸리고 말았답니다.^^
공양주 보살이 담근 잘 삭인 김치는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밥 한 그릇을 후딱 비울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일행 중에 고향이 목포인 친구조차도 평생 이런 김치는 못 먹어 보았다고 하더군요. 다음 날 아침 공양 때는 염치 불구하고 더 달라고 하여 먹었지요. 산행 중에 점심 먹으라고 주먹밥을 절에서 싸 주면서 그 김치를 별도로 더 넣어주어 어찌나 감사하던지요. 그걸 남겨서 서울 가는 KTX 기차 안에서 마저 먹었답니다.
선사님,
월출산은 제일 높은 봉우리가 해발 809m에 불과하지만(서울의 북한산도 836m입니다), 평지돌출한 데다 온통 바위산인지라 산행이 쉽지 않았습니다. 천황사에서 도갑사까지의 종주거리가 8.7km로 대략 6시간 30분 걸린다고 보통 소개되어 있는데, 소생 일행은 7시간 45분 걸렸답니다. 전국의 산을 쏘다니는 필부에게도 녹녹하지 않더이다.
아래는 간단한 산행기입니다.
2012. 10. 21.
대웅보전에서 새벽예불을 마친 후 잠시 눈을 붙였다가 6시에 일어나 간단히 세수를 하고 아침 공양을 하러 갔다. 요새 절집은 어디를 가나 대개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린 온돌방에서 따뜻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 템플스테이의 영향이 크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과거의 불편한 재래식 거처로는 아무리 명찰(名刹)이라 해도 관광지 이상의 관심을 끌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또한 시대의 한 흐름이리라.
주지스님이 먼저 오셔서 공양 중이다. 간밤에 이런저런 간식을 하였건만 아침 밥 한 그릇을 후딱 비웠다. 절에 가면 이상하리만치 식욕이 돋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절 체질’이라고 붕우(朋友)들이 거든다. ‘내가 훗날 공직에서 물러난 후 나를 보고 싶거든 절로 찾아오라’고 화답하였다. 주지 스님이 끓여 주시는 황차로 다담(茶談)을 잠시 나눈 후 8시에 절집 봉고차에 올랐다. 산행기점인 천황사로 이동하기 위해서이다. 15-20분 정도 걸린다.
월출산 종주는 물론 도갑사에서 출발하여도 되지만, 그보다는 천황사에서 출발하는 게 더 일반적이다. 천황사에서 정상인 천황봉까지가 가파르고 그 후 도갑사까지는 이전보다 완만하기 때문이다.
가파르게 올라가서 완만하게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장거리 산행의 기본이다. 그래야 무릎에 부담이 덜 가기 때문이다. 하물며 나 같이 무릎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13년 전 이 산의 종주에 도전하였다가 실패한 후 무릎수술을 한 기억이 새롭다.
장비 점검을 다 마치고 8시 50분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객(山客)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은 큰 키의 산죽(山竹)들이 늘어선 오솔길이다. 그 길이 너무 호젓하고 걷기 편하여 “이게 웬 호사?”하고 좋아했지만 그 순간뿐이다. 곧 나타나는 천황사는 사실 ‘천황사지’라고 표현함이
천황사의 원래 이름은 사자사(獅子寺)였다고 한다. 그 좋은 이름을 놔두고 하필이면 천황사(天皇寺)라니... 일제 강점기에 왜인들이 개명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월출산의 정상을 천황봉이라고 부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게 아닐까.
“천황(天皇)”이라는 말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에서조차 안 쓰고, 오직 왜인들만이 사용하는 단어이니 하는 소리이다.
절 이름은 본래대로 사자사(獅子寺)로 환원하고, 천황봉(天皇峰)은 천왕봉(天王峰)으로 바꿀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속리산의 천황봉은 천왕봉으로 바뀌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뿐이랴, 지리산의 최고봉도 천왕봉이다.
이 글에서는 이제부터 천왕봉이라고 쓴다.
절을 지나면 이내 웅장한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거대한 바위들 사이로 용케도 길을 냈다. 자연히 거대하다면 인간은 위대하다고 할까.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길을 내고 발걸음을 들여 놓는다.
천황사에서 900m 올라가면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가 나온다. 말이 900m이지 한 시간이 더 걸리는 길이다.
구름다리 하면 대둔산의 그것이 절로 떠오를 만큼 유명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월출산의 구름다리가 더 높고(지상 120m) 더 길고(52m) 경치도 더 멋지다. 적어도 불과 1주일 사이를 두고 두 다리를 다 가 본 나의 생각으로는 그러하다.
홍보가 덜 된 탓인지,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인지, 월출산의 구름다리가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게 아쉽다. 이것도 팔자소관인가...
“어휴 여길 내가 왜 왔지?”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매봉을 지나 사자봉(둘 다 멋진 암봉이지만, 암벽등반에 도전하지 않는 한 아쉽게도 정상에는 오를 수 없다)을 옆으로 비껴 오르락내리락 바윗길과 씨름하다 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봉우리가 눈앞에 나타난다. 천왕봉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봉우리를 밑에서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은 이미 단풍의 단계를 지나 하나 둘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일찍이 된서리가 내리는 바람에 단풍이 졌다고 한다.
‘한로상풍(寒露霜風) 요란해도 제 절개를 지키는 황국(黃菊)단풍’은 이젠 도심 한 복판에서나 찾아 볼 수 있나 보다.
천왕봉에 오르려면 100m를 남겨 두고 마지막 관문으로 통천문(通天文)을 지나야 한다. 지리산 천왕봉 밑의 통천문을 연상케 한다. 말 그대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 양쪽에서 맞물린 바위 사이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날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이곳을 통과하는 순간 시야가 탁 트이고 하늘이 훤하게 열리는 까닭에 이름을 그리 지은 듯하다. 월출산의 남북을 잇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 통로로 시원한 바람이 드나들며 숨 가쁜 나그네에게 정기를 불어넣어 준다.
월출산보다 훨씬 더 높은 산인 설악산이나 오대산, 가리왕산을 오를 때보다 훨씬 속도가 느리다. 그만큼 산이 험한 것이다. 그럼에도 동시에 300여명 정도가 머물 수 있다는 월출산 정상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지나가는 가을을 아쉬워함이 어찌 한양나그네만의 일이겠는가.
월출산(月出山)!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
달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어디선가 영암아리랑의 노랫말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이 노래(백 암 작사, 고봉산 작곡)를 부른 가수 하춘화씨가 바로 영암 출신이다.
월출산이 제아무리 달이 뜨는 산이라 한들 정오에 달이 뜨지는 않을 테니 그 달을 보려고 한없이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쉬운 발걸음을 아래뫼길로 향하는데, 발아래 펼쳐지는 암릉길이 장관이다. 향로봉(743m)과 구정봉(703m)을 비롯하여 이름 모를 암봉들이 연이어 있다. 그 길로 5.7.km를 가야 도갑사이다.
흔히들 월출산을 멋진 경치로 인해 ‘호남의 소금강’이라고 부른다지만, 그보다는 ‘호남의 공룡능선’으로 부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천왕봉 정상에서 도갑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도 급경사라 만만치 않다. 두 손 두 발을 다 동원해야 한다. 아무튼 쉬운 곳이 없는 산이다.
힘들게 내려와 도갑사 공양주 보살님이 싸 주신 주먹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나니 한결 힘이 솟는다.
산을 오를 때 힘들어하던 구암(龜岩)대사도 한결 밝은 표정이다. 이날 산행의 도반들인 백동(白冬)선사와 담허(淡虛)선사 역시 언제나처럼 활기가 넘친다.
특히 백동선사는 천사표 마나님이 챙겨 준 간식거리들로
“남자가 이 정도 대접은 받고 살아야 하는 거 아냐?”
벗이여! 그러하이, 가히 뽐낼 만도 하오.
남근바위를 지나 바람재에 이르니 시원한 가을바람이 땀을 식혀 준다. 정상에도 없던 바람이 부는 것을 보면 역시 이름값을 한다. 우리 조상님들이 괜히 ‘바람재’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도갑사까지는 4.5km를 가야 한다.
월출산의 명물 중 하나인 구정봉(738m)을 오르는 길도 쉽지 않다. 절묘한 형상의 베틀굴을 옆으로 지나 오르면 커다란 암괴가 앞을 막는다. 그 암괴의 바위 틈새를 비집고 올라가야 구정봉 정상에 도달한다. 때문에 큰 배낭을 짊어진 사람은 밑에다 풀어놓고 가야 한다.
월출산의 봉우리들은 모두 암봉(岩峰)이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그 정상은 다 바위이고, 구정봉도 예외가 아니다. 그 바위에 아홉 개의 우물(웅덩이라는 표현이 더 맞다)있어 구정봉(九井峰)이라고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이라고도 하고, 어느 건방진 한량이 이곳에서 하늘에 대들다 아홉 번 벼락을 맞은 곳이라고도 한다. 길어지는 가을 가뭄에 웅덩이가 모두 말라, 용은커녕 이무기도 안 보인다. 하긴 물이 고인들 송사리 몇 마리 살 정도의 크기이긴 하지만...^^
13년 전 태풍이 부는 비바람 속에 이곳에 왔을 때는 개구리 4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는데...
천왕봉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올랐다는 것으로 용도 이무기도 못 본 아쉬움을 달래고 내려왔다. 13년 전의 회향(回向)을 기억 속에서 불러와 떠올리며.
아래는 그 때 쓴 글의 일부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縱走를 하려면 천황봉 쪽으로 가야 하지만, 자신이 없다. 서울 갈 비행기 시간도 문제려니와, 무엇보다도 천황봉에서 하산하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는데 과연 이 빗속을 뚫고 갈 수 있을까? 그러다 조난이라도 당하면?
이왕 온 김에 종주를 하자는 김관하 연수생 등 강경론자들을 다음에 다시 오자고 달랜 후, 결국 눈물의 回軍을 하여야 했다.
구정봉에서 능선길로 1시간을 더 오르락내리락 하면 미왕재이다. 월출산에서 많은 억새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선의 민둥산이나 영남알프스 같은 광활한 군락지는 아닐지라도, 나름 가을 햇빛에 빛나는 은색 억새들이 산객의 발걸음을 부여잡는다. 억새밭 가운데 헬기장만 없어도 더 좋을 듯하다. 보아하니 헬기장을 사용한 지 꽤 오래 된 듯 군데군데 망가졌던데....
미왕재를 지나면 도갑사까지 2.7,km는 내리막길이다. 이제는 흙길도 종종 나오지만 이쯤 되면 무릎이 아플 때가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이미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벗님네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담허선사는 높은 산에 갔다가 허벅지 뒤쪽의 근육인 햄스트링(hamstring)를 다친 후로 내리막길이 쥐약이라고 툭하면 주저앉는다.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가 어디 있으리오.
늦가을의 무심한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구나. 계곡은 가뭄에 물이 말라 먼지가 풀풀 난다.
40년 지기인 도반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도선국사비(보물 1395호)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정식 명칭은 ‘도갑사도선수미비(道岬寺道詵守眉碑)’이다.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와 조선시대에 중창한 수미대사를 기리는 비석이다.
전에는 노천에서 비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는데, 지금은 비각 속에 모셔져 있다. 도갑사 스님들의 세심한 배려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오후 4시 35분 도갑사에 도착하였다. ‘왜 이리 늦었냐’며 주지 스님이 반가이 맞아 주신다.
‘나이가 들다 보니 예전 같지 않네요’
입속에서만 맴돈 말이다. 대신 笑而不答心自閑이다.(끝)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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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거사
2023.10.2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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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23.10.23 22:43
계획하신 것도 아닌데 음력까지 똑같은 날짜에 같은 곳을 간다는 건 정말 우연치고는 대단한 일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좋은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볼 때 새로운 감흥을 느끼는 것처럼 명소 역시 오랜만에 다시 찾을 때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군요.^^ -
우민거사
2023.10.24 10:09
그러게요. 참으로 기막힌 우연 속에 접신까지 한 뜻깊은 산행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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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텃골
2023.10.24 03:06
법관님의 글을 읽거나 아침 사진을 보면 언제나 감탄을 금할 수 없음니다.
사소하게 스치고 지날 일상적인 길가의 모습을 의미있게 가치 부여하며 되새기고 그 걸 다 기억해 기록해 내는
기억력과 필력은 전문 글쟁이가 부러워 할 정도고
사용하는 어휘력은 사전 출판 교정부에서도 사전 찾아가며 교정을 본듯 풍부하니 말예여.
특히 현학적인 전문 용어는 워낙 배움이 크니 그렇다 쳐도 아라뫼길이니 바람재같은 토박이 말까지 일상 언어로 사용하시며 천황봉이란 말에 울분까지 토하시는 걸 보노라니 존경스러움에 숨이 막힙니다.
그리고 또 하나
어케 11년전 일들까지 기억하고 그 기록들을 찾아내 검증해 내다니..
더구나 사진까지..
그 천재제인 기억력에 부지런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네요.
댓글을 더 달 말이 있으나 3.40분 인천 공항행 버스를 타야 해서 이만. -
우민거사
2023.10.24 10:13
어딜요, 촌부는 머리가 나쁘고 아둔하여 그저 적자생존(적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의 이치만 추종할 따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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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회
2023.11.22 22:41
제가 산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3d글을 보고있습니다,
역시 남다름이 한방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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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1년 만에 월출산을 다시 찾았다.
2012. 10. 20.(음력 9.6.) 도갑사에서 하루 묵고 그다음 날인 2012. 10. 21.(음력 9.7.) 아침 천황사 쪽으로 이동하여 월출산을 올랐는데, 정확히 11년 후인 2023. 10. 20.(음력 9.6.) 똑같이 도갑사에서 하루 묵고 그다음 날인 2023. 10. 21.(음역 9.7.) 아침 천황사 쪽으로 이동하여 월출산을 오른 것이다. 음력 날짜까지도 똑같은 게 신기하다. 일부러 맞추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게 있다면, 11년 전에는 도반이 고교 동창의 죽마고우(竹馬故友)들이었는데, 이번에는 도반이 킬리만자로를 함께 오른 산우(山友)들이었다는 점이다.
[왼쪽부터 박재송님, 촌부, 월우스님, 도갑사 주지 수관스님, 오강원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월출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그러나 고희를 눈앞에 둔 60대가 되어 찾아온 나그네는 세월의 흐름을 못 이겨 그사이 머리가 반백이 되고,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그리고 그 나그네의 눈에 비치는 월출산의 가을이 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다가왔다. 백내장 수술을 하여 안경에서 해방된 때문일까, 세상 만물을 보는 안목이 진화한 것일까.
월출산의 정상인 천황봉(天皇峯. 해발 809m) 앞에서 뜻밖의 호사를 누렸다. 마침 태극기를 가져온 등산객들이 있어 그들로부터 빌린 태극기를 앞세우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름이 영 못마땅한 이 봉우리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월출산의 많은 봉우리 중에서 명물이라고 할 만한 구정봉(九井峰. 해발 738m)에 힘들여 올랐는데, 이번에는 가장 큰 우물에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산행 시작 전에 도갑사에서 만난 민속학자 조용헌박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선사시대에 족장들이 바위에 손으로 우물을 팠고, 물은 하늘에 기도하는 정화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구정봉은 접신(接神)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날 정말로 접신이라도 하려는 걸까, 구정봉 정상에 오르니 갑자기 하늘이 흐려지고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우물의 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솟아나는 듯했다. 무어라 설명키 어려운 기운이 감돌아 섬찟했다.
구정봉에서 내려와 도갑사 쪽 종주길 대신 북쪽의 마애불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이쪽은 이번이 초행길이다.
국보 144호인 마애불(전체 높이 8.6m)은 전국의 국보 중 고도가 가장 높은 곳(해발 600m)에 있다. 신라 말기 내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이 마애불은 노천에 있으면서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표정이 자비롭기보다는 근엄하다는 말이 어울린다.
마애불에서 북쪽으로 난 하산길은 길고 지루했다. 영암군에서 지은 길이름이 '하늘아래첫부처길'이건만, 산객에게는 결코 자비롭지 않은 돌길이 많아 걷기도 힘들었다. 산 밑에서 기다리는 월우스님 일행을 생각해 딴에는 부지런히 걸었건만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8시간에 걸친 긴 산행을 하고 나니 무릎이 꽤나 아프고 힘들다. 오호애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