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 저 산 꽃이 피니(예봉산-운길산)

2010.02.16 12:40

범의거사 조회 수:12729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나 했더니 연일 계속되는 더운 날씨로 초여름을 연상케 하는 4월이다. 여의도의 벚꽃이 피기가 무섭게 져 버리는 지경이라, 어영부영하다가는 봄맞이도 못 하고 여름으로 들어서겠다 싶은 조바심이 나던 차에, 법원도서관 산악회의 정기산행 계획에 따라 예봉산-운길산 종주에 나섰다.
   4월의 둘째 주 토요일인 12일(2008. 4. 12.)의 일이다.

   서초동에서 아침 8시에 출발하였기에 팔당역까지 50분 정도면 갈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1시간 30분이 걸렸다.
   중간에 잠실역에서 일행을 기다리느라 다소 지체하긴 했지만, 팔당대교를 건너기가 그렇게 힘들 줄이야. 어찌 나만 賞春을 하리오. 우리 팀만 해도 21명이나 되지 않는가.

  예봉산(禮峯山)

   “팔당2리”임을 알리는 큼지막한 표지석을 지나 중앙선 굴다리를 통과하면 마을이 나오고, 이 마을을 지나면 바로 예봉산 등산로가 시작된다.
    등산을 시작하기에 앞서 산악회장의 말을 믿고 마을회관 화장실에서 사전 준비를 하겠다던 우리 일행의 계획은 야속하게도 잠겨 있는 문 앞에서 좌절의 쓴 맛을 보아야 했고, 이후 수종사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서 자연에 동화되어 해결하든지 참든지 하여야 했다.
     이 코스로 등산하려면 미리 팔당역의 화장실을 이용하여야 한다는 교훈 아닌 교훈을 얻은 셈이다.


    예봉산 정상까지의 길(2.2km)은 시종일관 오르막이다. 어느 산에서나 등산을 시작하면 만나기 마련인 ‘깔딱고개’가 예봉산에서는 산 전체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래도 이따금 고개를 돌려 올라온 길 쪽을 바라보면 팔당대교와 미사리 조정경기장 주위의 한강변풍경과 강 건너의 검단산이 한 눈에 들어와 제법 그럴싸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더구나 등산로가 시종일관 흙길이어서 등산화를 통해 전달되는 감촉이 바위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예봉산(옛이름은 예빈산, 禮賓山)은 수림이 울창하여 조선시대에는 인근과 서울에 땔감을 대주던 연료공급지였다고 한다.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은 시점이라, 길의 양 옆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진달래꽃의 분홍색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일부러 마음먹고 찾아도 여간해서는 보기 어려운 무궁화를 국화로 할 게 아니라, 봄산의 어디를 가든 만날 수 있는 진달래를 국화로 하면 좋겠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 진달래의 군무 속에 아우러져 사진을 찍으니, 꽃밭의 나비들이 이 아닌가.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산악회장인 송봉준 판사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해가 잘 드는 남사면(南斜面)에서는 진달래꽃을 거의 볼 수 없고, 해가 잘 안 드는 북사면(北斜面)에 주로 만발해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남사면의 진달래는 이미 다 피었다가 진 것일까. 산행 내내 의문으로 남겨 두었고,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산행을 시작하여 1시간 30분만에 예봉산 정상(해발 683m)에 도달하였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정상은 등산객들로 만원이다.
    누구 작품인지는 모르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나쁠 거야 없지만 그리 높지도 않은 이곳에는 어쩐지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산 백운대에 꽂혀 있는 것과는 품격이 다르다.

   예봉산 정상의 최고인기품목은 감로주(甘露酒)이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시원하여 입에 짝짝 붙는다고 다들 난리다.
   말 그대로 단 이슬로 만들었나 보다. 총무과의 김영록 과장은 술장사와 동업이라도 하는 것일까 가판대를 떠나지 않는다.

   그 가판대 옆 나무에 걸려 있는 광고지의 내용이 걸작이다. 이 술은 단순 甘露酒가 아니라 減勞酒이자 減老酒이고 感動酒란다.
   이 술을 마시면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쌓인 피로가 풀리고, 그에 따라 젊어지고, 마침내 감동을 받을 거라니,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만석(萬石)의 난(亂)

   예봉산 정상부터 철문봉을 거쳐 적갑산을 지나 운길산에 이르는 길(총연장 7.2km)은 능선길이다. 교통편 때문에 예봉산 정상에서 팔당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이 능선길은 호젓하다.
   예봉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甘露酒로 減勞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점심을 먹기에 이른 시각이라 적갑산 부근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예봉산 정상에서 600m 거리에 있는 철문봉(喆文峰. 해발 630m)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형제들이 이곳까지 와서 학문(文)의 도를 밝혔다(喆)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꼬집어 말할 만한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봉우리를 넘어 적갑산(赤甲山)으로 향할 무렵 어디선가 “점심 안 먹어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평소에 12시면 점심을 먹어 배가 고파요!”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노총각인 이만석 과장이다. 萬石(?)을 먹어야 배가 부르니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배가 고플 법도 하다. 동조자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시계바늘이 12시를 진즉에 넘어갔다. 산악회장이 다소 난감해하다가 적갑산이 멀지 않으니 거기 가서 먹자고 달랜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더 진군하는데, 당연히 나타나야 할 적갑산의 표지가 안 보인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길옆 이정표에는 이미 적갑산을 지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맙소사, 적갑산은 봉우리가 높지 않고(해발 561m) 표지석도 없어 지나치면서도 몰랐던 것이다. 순간 산악회장은 당혹해하고 또 다시 들려오는 소리,
“배고파요, 밥 안 먹어요~?”

    이제는 거의 민란이 일어날 수준이다. 이름하여 ‘만석(萬石)의 난(亂)’? 고려시대에 비슷한 이름의 난이 있었다. 다름 아닌 ‘만적(萬積)의 난(亂)’.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노비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만적(萬積)

    고려 시대 무신 정권의 수립으로 문신 귀족 중심의 지배 체제가 붕괴하고, 신분 질서가 흔들리자 천민들도 신분 해방을 내세우고 반란을 획책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198년(신종 원년) 개경에서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이다.
     만적은 당시의 집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의 사노(私奴)로서 개경 뒷산인 송악산에 노비들을 모아놓고 위와 같은 선동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획책했던 반란은 내부자의 밀고로 실패로 돌아갔고, 수많은 노비들이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도서관에 근무하기 시작한 이래 우리는 12시가 되면 점심을 먹어 왔다. 밥 먹는데 어찌 장소를 가리랴. 때가 되면 어디에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까지 다이어트하는 산악회장을 따라 배고픔의 고통을 감내할 수는 없다. 각자 자기가 준비하여 온 음식을 꺼내 놓고 먹으면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우리 산악회를 배고픔이 없는 풍요로운 곳으로 만들 수 있다.”---만석(萬石)

     환청일까, 마침내 ‘만석의 난’이 일어나고 그 격문이 들리는 것 같다. 순간 빨라지는 산악회장의 발걸음 덕분에 평평한 자리를 잡고 배낭을 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행히 난은 진압되고...

  운길산(雲吉山)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던가, 배가 부르니 이제껏 안 보이던 양수리와 그곳의 두물머리가 보이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덕소의 시가지도 보인다.
   예봉산에서 운길산까지의 능선길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을 몇 개 넘는데,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는 아닐지라도 左진달래 右산수유라고 할 만큼 길의 양 옆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을 감상하며 유유자적할 수 있다.

   진달래는 그렇다 쳐도 웬 산수유가 이리도 많을까 싶었는데, 식물박사인 오경미판사가 산수유가 아니라 생강나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 산수유 같은데 권위자가 아니라니...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판소리 사철가를 다시 흥얼거리며 걷는 길은 말 그대로 미음완보(微吟緩步)이다.

   평탄하기만 한 능선길이 새우젓고개를 지나 운길산을 지척에 둔 503봉에서 갑자기 가파르게 변한다. 밧줄을 잡아야 겨우 오를 수 있을 정도이다.
   그 봉우리를 넘으면 바로 나타나는 운길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 역시 이에 못지않다.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입에서는 가쁜 숨이 몰아쳐 진다. 역시 산은 산이다.

   오랜만에 하는 산행이건만 21명의 참가자 전원이 낙오 없이 걷는 게 새삼 감사하다. 강원도 출신의 최진영 국장님이나 제주도 출신의 홍진호판사야 설악산이나 한라산에서 단련이 되었을 테니 말할 것도 없지만, 상가에 다녀오느라 간밤에 잠을 못자 힘들다며 처음 출발할 때는 얼마 못가 포기할 것 같던 조외숙 계장이 끝까지 완주한 것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땀을 흘린 사람만이 정상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오후 4시 10분, 운길산 정상(해발 610m)에 도착하였다. 팔당에서 6시간 40분 걸린 셈이다.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 멈춘다고 해서 운길산(雲吉山)이라고 부른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해발 610m가 구름이 걸릴 만큼 높은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정상에서 쉬고 있던 등산객 중 한 사람이 어디서 오냐고 묻는다. 팔당에서 온다고 했더니 눈을 크게 뜨고 대단하다고 감탄한다. 새삼 뒤를 돌아보니 예봉산이 아스라이 보이는 게 먼 길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운길산 정상에서 내려와 수종사(水鐘寺)로 향했다. 이 절은 동국여지승람의 저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동방의 사찰 중 최고로 전망이 좋은 곳이라고 격찬한 곳이다.
    그래서일까,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등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를 모르는 범부의 눈에도 참으로 명당자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특히 ‘삼정헌(三鼎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찻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양수리의 두물머리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 시름이 홀연히 사라진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스스로 녹차를 우려 원하는 만큼 마실 수 있다.
    찻값은 내도 그만 안 내도 그만이다. 이 날은 21명이나 되는 인원이 다 들어갈 수는 없는지라 아쉽지만 차 마시는 것을 단념해야 했다.

    수종사
(水鐘寺)의 이름에 얽힌 유래는 이렇다. 1458년(세조 4년) 세조가 신병 치료차 금강산에 다녀오다가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어 깊은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가 들려 잠을 깬 왕이 부근의 운길산을 조사하게 하였다.
   뜻밖에도 바위굴이 하나 있고 그 굴속에는 18나한(羅漢)이 있었는데, 굴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왔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水鐘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절의 경내에 있는 수령이 500년 되는 은행나무는 갖은 풍상을 겪었을 법한데, 긴긴 세월을 참으로 용하게 버티고 여전히 꿋꿋한 모습이다. 몇 년 전 가을 그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을 때 와 본 기억이 새롭다.

  수종사로부터의 하산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과 오솔길의 두 가지가 있다. 혹시나 모를 자동차의 매연을 피하기 위하여 후자를 택하였다. 매연을 피하는 대신 가파른 길을 내려가느라 어쩔 수 없이 무릎에 전해져 오는 통증을 견뎌야 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2008. 4. 18.)    
 

유미리(국악),김지숙,장문희,박애리 - 13 - 김지숙 단가-사철가(四節歌) - 192k.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