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떠났나, 산으로 떠났나 (속리산)

2010.02.16 12:44

범의거사 조회 수:12958



          산을 떠났나, 산으로 떠났나  


옥봉선사(沃峰禪師)님,

    선사님의 어릴 적 발자취가 서린 충청북도에 닻을 내린 지도 정확히 3개월이 지났습니다. 입춘(立春)이 지나 봄이 오는 길목에 찾아왔는데, 어느 새 입하(立夏)가 지나고 여름이 오는 길목입니다. 돌이켜 보면 너무나 황망히 보낸 기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고, 사람 좋은 양반의 고장에 왔건만, 범부의 삶은 여전히 세속에 찌들어 있답니다.

    그 세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려고 지난 주말(2009.5.9.)에 속리산(俗離山)을 찾았습니다. 천성에 내재하는 역마살(驛馬煞)이 도지기도 하였구요.  
    속리산은 전에도 세 번 올라간 적 있는데, 매번 문장대(해발 1,054m)만 갔었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코스를 달리 하여 속리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해발 1,058m)을 올랐답니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 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떠나는구나(山非離俗 俗離山)”
      

신라 헌강왕 때 속리산을 찾은 최치원이 남긴 시의 한 구절이라는군요. 소생은 세속을 떠나 산으로 가는데, 어찌하오리까. 아래와 같은 이야기는 어떤가요?

   서기 766년 김제 금산사에 머물던 진표율사가 구봉산(속리산의 옛 이름)에 미륵불을 건립하라는 미륵보살의 계시를 받고 구봉산에 들어가기 위해 보은에 이르렀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다. 이를 본 농부들이 크게 감화되어 스스로 낫으로 머리를 자르고 '세속을 떠나'(俗離)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세속(俗)을 떠나(離) 이곳(山)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이 산을 속리산(俗離山)이라고 불렀다.    

선사님,

    법주사 매표소 앞 주차장에서 9시에 출발하여 한 시간 정도 가니까, 경업대로 해서 천왕봉을 가는 길과 상환암으로 해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가 나오더이다. 당초 계획은 전자로 올라가서 후자로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이 삼거리에서 뜻밖에도 관세음보살의 현신으로 보이는 아줌마를 만났답니다.

“아 뭘 망설여유, 당연히 상환암 쪽으로 가야지유. 그래야 좋은 경치도 보구, 못난이 아줌마도 보구, 아새끼도 빨지유~~”  

헉,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더구나 아새끼를 빨다니... 알고 보니, 그렇게 가면 구경을 잘할 뿐만 아니라 하산길에 경업대 아래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그 아줌마를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 아이스케이크를 사서 먹으며 땀을 식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칭 ‘못난이 아줌마’가 시키는 대로 산행코스를 잡은 게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답니다. 상환암을 거쳐 능선에 오르기까지의 산길에는 주말임에도 다른 등산객을 찾아보기 어려워, 마치 우리 일행이 속리산을 전세 낸 기분이었지요. 게다가 이렇듯 호젓한 등산로에는 기암괴석(奇巖怪石), 기목괴수(奇木怪樹)가 즐비하여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린 중생에게 이 길을 일러 준 아줌마를 어찌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리까.
  
    세종대왕이 7일간 머무르며 법회를 열고 크게 기뻐하여 상환암(上歡庵)이라는 이름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작은 암자는, 언뜻 보아서는 과연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하였지만, 아무튼 속세와는 멀리 떨어져 있더군요.

    상환암을 지나면 나타나는 상환석문(上歡石門)은 일부러 그렇게 만들려고 해도 만들기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집채만한 거대한 바위가 서로 맞물려 있는 틈으로 등산객들이 통행을 한답니다. 이런 석문이 속리산에는 8개가 있지요. 흥미 있는 것은 속리산에는 8봉(峰), 8대(臺), 8석문(石門)이 있다고 합니다. 8봉은 천왕봉 등 8개의 봉우리이고, 8대는 문장대 등 8개의 대(臺)이고, 8석문은 상환석문 등 8개의 석문이지요.

    왜 하필이면 모두 8자 돌림일까 궁금했는데, 불교의 8정도(八正道)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군요. 8정도를 수행하여 열반에 들듯이, 8석문을 지나 8대에 올랐다가 8봉의 너른 품에 안기면 그대로 부처님의 품에 안긴 듯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지요. 속리산과 불교의 오랜 인연이 연상되지 않나요?  

선사님,

    출발지로부터 3시간 걸려 12시에 천왕봉 정상에 도착했습니다(법주사 매표소로부터 5.7km). 정상에는 온통 바위밖에 없고, 전후좌우를 둘러봐야 높고 낮은 산밖에 안 보이지만, 백두대간에 우뚝 솟은 봉우리답게 사방이 탁 트여 호방하더군요. 북쪽으로 뻗은 백두대간능선에는 비로봉, 입석대, 신선대, 청법대, 문수봉, 문장대가 줄을 서 있고, 반대로 이 봉우리에서 남서쪽으로는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이 갈라져 나가지요.
    한편, 이곳에 내린 빗물이 동쪽으로 떨어지면 낙동강이 되고, 서쪽으로 떨어지면 한강이 되고, 남쪽으로 떨어지면 금강이 된답니다. 그래서 그 물을 삼파수(三派水)라고 한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웬만한 산의 정상에는 다 있게 마련인 표지석이 이곳에는 없어 참으로 의아했지요. 마침 속리산에 도통한 것으로 보이는 어느 등산객이 연유를 설명하여 주더이다. 본래 “천황봉”이라는 표지석이 있었는데 작년 11월경에 철거하였다네요.
    “천왕봉(天王峰)”과 “천황봉(天皇峰)” 중 어느 것이 맞냐를 놓고 오랫동안 논란이 벌어졌었는데(본래 “천왕봉”으로 대동여지도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 일본인들이 일본 천황의 땅이라고 왜곡하여 “천황봉”으로 고쳤다는 것이지요), 국토지리정보원이 최종적으로 2007. 12. 천왕봉으로 정했답니다. 그래서 “천황봉” 표지석을 철거하였는데, 아직 “천왕봉”의 새 표지석을 세워 놓지 않은 것이지요. 표지석이 있어야 갑제1호증이 완성되는데...쩝. 새 표지석 만드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새것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먼저 것을 철거하면 안 되었을까... 부수고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리라.

선사님,

    천왕봉에서 속리산 주능선을 따라 신선대 앞 안부(鞍部)에 이르는 동안(천왕봉→안부 2.1km)에는 천왕석문(상고석문), 비로봉, 입석대 등을 거치게 되는데, 능선상의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펼치는 동물의 왕국은 말할 것도 없고, 능선 왼쪽으로 충청북도 보은, 오른쪽으로 경상북도 상주의 산하가 펼쳐 보이는 경치 또한 장관이더군요.

    그나저나 선사님, 아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곳이 그래도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그 어느 곳에도 안내판이 없더이다. 그래서 다 지나놓고 나서야 어디어디를 지나왔네 하고 알게 되더군요. 이걸 누구한테 알리고 항의해야 하나요? 이러려고 국립공원 입장료를 폐지했나요? 산림청이든 국립공원관리공단이든, 관계자 여러분들께 하소연합니다.


“입장료 얼마든지 낼 테니 제발 안내판 좀 세워 주세요!”

    중간에 점심을 먹으며 세월아 네월아 하다가, 신선대 앞 안부에서 경업대 쪽으로 하산길을 잡았습니다(이곳에서 법주사 매표소까지는 5.8km). 문장대까지 가면 더 바랄 게 없지만(이리 되면 속리산을 종주하는 셈이지요), 시간상 무리일 것 같아 욕심을 접은 것이지요. 임경업장군이 독보대사와 함께 7년 동안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경업대는 그냥 커다란 암반지대이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보는 경치가 백미였습니다. 주능선 밑으로 펼쳐지는 녹색의 향연은 필설(筆舌)로 다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입니다. 한 번 가보시지 않으렵니까? 임경업장군이 지고 가다가 무거워 중간에 내려놓았다고도 하고, 임경업장군이 신통력으로 세운 것이라고도 하는 입석대(立石臺)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지요. 아무튼 잘 드는 칼로 바위를 직사각형으로 잘라 세운 듯한 입석대는 그 모습이 마치 광개토대왕비를 옮겨놓은 것 같았습니다.

    경업대에서 더 내려가니 앞서의 못난이 아줌마가 운영하는 금강휴게소가 나오더군요. 관세음보살의 현신인 이 아줌마가 어찌나 살갑게 맞이하던지요.^^ 도리 없이 평소 잘 먹지 않던 ‘아새끼’를 빨았답니다. 이 아줌마는 20년도 넘게 이곳에서 남편과 둘이 휴게소를 운영한다고 하더군요. 음료수나 빙과류, 빵 같은 식품만 파는 것이 아니라, 각종 버섯, 약초술도 팔고, 원하면 오소리쓸개도 구해 준다네요. 오소리쓸개 하나에 값이 무려 80만원이라는데, 그것도 싼 편이라니...

선사님,

    잠시나마 속세를 떠나는 것이 주목적이었는지라 법주사 경내를 들르지 않고 매표소에 도착하니 벌써 오후 5시 30분이더군요. 총 8시간 30분 걸렸으니 13.6km(매표소→천왕봉 5.7km, 천왕봉→신선대 안부 2.1km, 신선대 안부→매표소 5.8km)의 산행 치고는 오래 걸린 셈이지요. 워낙 신선놀음을 한 까닭이지요.
그런데 선사님, 사람(人)이 산(山)에 오르면 다 신선(仙)이 된다는 말이 맞나요?
(2009.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