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간 길(유명산)

2010.02.16 11:38

범의거사 조회 수:9608

 


                       거꾸로 간 길  

 


   2000. 2. 18.자로 사법연수원에서 서울지방법원으로 전보되어 근무를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났다. 그 동안 북한산을 한 번 갔다 온 것 외에는 철저하게 산과 담을 쌓고 살았다. 홈페이지에 등산이 취미라고 당당하게(?) 올려놓은 필자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나,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어찌 보면 더 안타깝다. 서울지방법원 민사항소부장의 업무량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말을 이용하여 등산하는 것마저 부담스러운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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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지방법원 산악회에서 6월의 마지막 주말 토요일(24일) 日課 후에 유명산 등산을 간다기에 큰마음 먹고 따라나섰다.  유명산은 이름 그대로 유명한 산이다. 그래서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어도 이름은 자주 들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이 알려졌을까가 늘 궁금하던 차였는지라, 심신의 피로도 풀 겸 겸사겸사 잘 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법원 근처의 식당에서 설렁탕으로 간단히 점심식사를 한 후 대기중인 버스에 올랐다. 참가자는 모두 31명. 목적지인 유명산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버스가 출발한 후 얼마 안 되어 김경종 산악회장께서 산행 일정을 설명하면서, 유명산의 유래를 곁들인다. 본래는 ‘마유산’으로 불리었는데, 1973년 국토자오선 종주대가 이 산을 통과하면서 당시 대원 중 홍일점이었던 '진유명'씨의 이름을 따 ‘유명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오후 2시 40분, 산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정상까지 1시간10분이면 족하다고 한다. 어, 그러면 청계산 수준 아냐?  
   나방이라고 해도 괜찮을 성싶을 검은 나비들이 떼를 지어 날며 서울에서 온 주말등산객들을 제일 먼저 맞이한다. 다른 산에서는 못 보던 풍경이다. 일기예보에서는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데도, 비는 안 오고 날만 후덥지근하여 이내 땀이 비 오듯 한다. 바람 한 점 없어 더욱 덥다.  

   매표소에서 정상으로 곧바로 오르는 길은 시종일관 오르막길인데다 출발부터 깔딱고개의 형국인지라 만만치가 않다. 숲 속으로 난 등산로인 까닭에 시야도 좁다. 비록 전체 거리가 짧기는 하나, 마치 소백산의 희방사에서 제1연화봉으로 오르는 길을 연상케 한다. 다행히 계속 흙길이어서 등산화를 통해서 전달되는 촉감이 아주 좋다. 아스팔트만 걷던 발이 "이게 웬 일이야?" 하고 놀랄 판이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면서 8부능선 쯤 오르니 오른 쪽으로 드디어 시야가 트이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중미산으로 생각되는 산도 보인다. 이쯤 되면 정상까지는 한 달음이다. 푹신푹신한 흙길에다, 쉬엄쉬엄 걸어도 출발지에서 정상까지 1시간 30분이라! 정말이지 이 때까지만 해도 청계산 등산과 다를 바 없다는 데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적어도 오늘 처음 유명산을 찾은 사람들 사이에서만큼은.  

   頂上의 고도가 해발 864m임을 알리는 標石에는 친절하게도 이곳의 행정구역이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가일리’임을 알리는 글까지 새겨져 있다. 이렇게 행정구역까지 기재한 표석은 처음 본다.  
   이 정상을 경계로 하여 남쪽은 양평군 옥천면 신북리에 속하지만, 표석에 비추어 볼 때 유명산은 분명 가평에 있는 산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런데 정상에서 정작 남쪽으로 양평읍은 보여도 북쪽으로 가평읍은 보이지 않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쪽으로 용문산(1,157m)이 지척인데 정상부분이 구름에 가려 있어 그 자태를 조망할 수 없음이 아쉽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아무튼 일대에서 제일 높은 산답다.  

  유명산 정상의 남쪽 바로 아래에서는 패러글라이딩이 한창이다. 이른바 鳥人들이 여럿 하늘에 둥둥 떠다닌다. 그런가 하면 그 鳥人이 되려는 사람들을 실은 트럭이 연신 올라온다. 쯧, 유명한 유명산의 정상 바로 아래까지 찻길을 내다니.... 레저를 즐기려는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  

   하산길은 올라온 쪽과는 방향을 달리 하여 계곡 쪽을 택하였다. 유명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계곡이다. 정상에서 동쪽으로 가파른 급경사길을 30여분 내려가면 계곡을 만나게 된다. 이름하여 입구지계곡(또는 '유명계곡'이라고도 한다)이다.  
   이 계곡은 본래 용문산에서부터 발원한 것으로서 북쪽으로 매표소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해발 864m의 산에 이런 계곡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암반 사이로 흐르는 물이 맑고 경치가 빼어나다.

   그리고 곳곳에 마당소, 용소, 박쥐소 등 깊은 웅덩이(沼)가 있어 수영도 가능하다. 다만 생명은 책임지지 못한다. 아마도 이곳이 국립공원이라면 틀림없이 '위험! 수영금지' 팻말이 세워져 있으련만, 도립공원에 지나지 않아서인지 그런 경고판은 볼 수 없다. 경고판은 고사하고 웅덩이의 이름을 알려주는 팻말조차 없어 지도상의 웅덩이와 실제의 웅덩이를 연결시키기가 쉽지 않다. 불쌍타, 도립공원이여!

   계곡에 발을 담그고 앉으니 神仙이 따로 없다. 어느 새 땀은 다 들어가고 寒氣마저 느낀다. 발이 시려 물에서 나오려는데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제법 큰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노닐고 있다. 손바닥만한 놈도 있다. 누군가가 "저게 열목어인가?" 하고 묻지만, 누가 있어 대답할 수 있으리오. 한양 땅 아스팔트촌에서 온 사람들뿐인 것을.  

   오후 6시 30분까지는 하산을 완료하여야겠기에 아쉬운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맙소사 이 하산길이 장난이 아니다. 끝까지 계곡 옆으로 난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 길이 온통 돌길, 아니 울퉁불퉁한 바위길(이런 길을 '너덜길'이라고 표현하던가)이다. 올라갈 때의 흙길과는 영 딴판이다.  

   아무리 계곡을 따라 길이 나 있다 하더라도 대개의 등산로가 흙길과 돌길이 반복되기 마련인데, 유명산의 이 유명한 계곡은 흙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바위에서 바위로, 그것도 며칠 전 내린 비로 물기를 잔뜩 머금어 미끄럽기 짝이 없는 바위 위로 발을 옮기려니 苦行 그 자체이다. 더구나 발에 힘이 빠진 상태인지
라 雪上加霜이다. 새삼스레 산행일정표를 다시 꺼내 본다. 등반시간 1시간 10분, 하산시간 2시간 30분이라고 씌어 있다. 으흐흑, 그 의미를 이제서야 깨닫다니...  

   결국 수석부장님을 비롯하여 몇몇 부장들이 미끄러지며 찰과상을 입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내려온 길을 되돌아서서 가을에 단풍 들 때 오면 더 멋지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발이 미끌, 하마터면 나도 넘어질 뻔했다. 이쯤 되면 이젠 경치 구경은 물 건너갔다. 조심조심 무사히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어느 새 다시 땀으로 목욕을 한다.  

드디어 하산을 마치고 난 權五坤 부장의 一聲,  

   "청계산 등산하는 것 같다는 말 취소!"
  
집에 와서 인터넷을 통해 유명산의 등산코스를 조회하여 본즉,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에 띈다.  

   "유명산 산행을 효과적으로 끝내려면 먼저 계곡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협곡을 천천히 완상하면서 산행을 하는 것이 능선을 먼저 통과한 뒤 계곡을 걸어 나오는 것보다 훨씬 낫다. 왜냐하면 계곡 길은 반 너덜지대이므로 지친 다리로 통과하기엔 상당한 피로도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http://www.kormt.co.kr/yumung.html). (2000. 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