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에 취하고, 한옥에 홀리고(아,서울!)

2010.02.16 11:42

범의거사 조회 수:9908



            성곽에 취하고, 한옥에 홀리고

 

 


   2001. 6. 17. 일요일.

 


   봄부터 벼르던 일을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그 곳에서 36년이나 살아 왔으면서도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성곽(城郭), 그것이 바로 이 서울 하늘 아래 있으며, 그것을 따라 걷는 길이 참으로 멋지다는 말을 들은 것은 지난 4월 22일, 청계산 등반 때 完英이한테서였다. 바로 답사에 나서 보리라 다짐했었는데, 그 사이 두 달이 후딱 지나갔다. 이즈음 들어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부쩍 드는 것은 왜일까.


   아침 8시 혜화동 전철역 성균관대학교 쪽 출구에서 完英이와 用根이를 만났다. 둘 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친구들이다. 모두 40대 후반으로 접어든 나이인데도,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이 놈, 저 놈" 소리부터 할 수 있는 것은 竹馬故友의 특권이 아닐는지.


   혜화동 로타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서울과학고가 나온다. 영재 교육의 요람답게 고등학교치고는 일견하여 잘 세워진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과학 한국'을 뒷받침할 어린 싹을 키워내는 곳인 만큼 제 구실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학교를 왼쪽으로 내려다보며 조금 더 가면 종로구(명륜동)와 성북구(성북동)의 경계 지점이 나오고, 서울의 북쪽을 감싸고도는 성곽의 안내판이 그 곳에서 일요일 이른 아침의 賞夏客을 맞는다.

 

   안내판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성을 축조하였다. 총연장은 약 18Km. 500년 동안 한양을 지켜오던 성곽은 일본인들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겨우 남은 것마저 6.25 동란 때 손상을 입었다. 1975년 서울시에서 뒤늦게 사적지로 정하고 복원사업을 펼쳤다"
--- 대략 이런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이 안내판에서부터 서쪽으로 그 복원된 성곽이 이어진다. 성곽을 경계로 왼쪽(남쪽, 안쪽)이 종로구 명륜동이고 오른쪽(북쪽, 바깥쪽)이 성북구 성북동이다. 城의 北쪽에 있는 區이고 그 곳의 洞이니, 이름하여 城北區이고 城北洞이다. 그런데, 성북구라는 명칭에 대비되어야 할 城南은 정작 漢陽城의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멀리 남한산성의 남쪽에 있다. 결국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셈이다.

 


   본래 土城이었는데 石城으로 개축된 성곽을 따라 돌계단의 길을 낸 것은 성곽의 안쪽(남쪽)이다. 길의 폭은 차가 지날 수 있을 정도(돌계단길이니 차는 물론 못 다닌다)이니 결코 좁다고 할 수 없다. 돌계단길에 하필이면 초록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놓은 배수로가 눈에 거슬린다. 애써 눈길을 안 주어야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성곽의 주위에 지금이야 학교나 민가가 들어섰지만, 본래 높은 산에다 쌓았던 만큼 이 길에서 종로 쪽을 내려다보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반면, 성의 바깥쪽, 즉 북쪽은 성벽을 잡고 발돋움을 하거나 여장(餘牆 :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방어하면서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구멍을 내거나 사이를 띄워 쌓은 작은 성벽)의 총안(銃眼 :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해서 여장에 낸 구멍)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내다보이는 북쪽의 성벽은 안쪽과 달리 높이가 제법 높다(문헌상으로는 40척2촌이었다고 한다). 하기야 바깥에서 안으로 쉽게 넘어올 수 있다면 성곽의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되, 안 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 곳을 골랐던 것이다.


   아침 일찍 나선 길인데도 얼마 걷지 않아 땀이 제법 난다. 명색이 산길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그보다는 봄부터 몇 달째 계속되는 가뭄 때문이다. 비를 구경한지 오래된 흙길에선 먼지가 풀풀 난다. 마땅히 무성하여야 할 잡초들마저 비실비실 말라가고 있다. 이 무슨 재앙인가. 하늘을 원망해야 하나...

 

   성곽을 따라 30분쯤 걸었을까, 暗門이 하나 나타났다. 暗門은 이를테면 성곽에 낸 비상구이다. 때문에 동대문이나 남대문처럼 정식의 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곽에 개구멍을 낸 것이다. 그 문을 통해 내다보니 성벽 바로 밑에 채소밭이 보인다. 아하! 성벽 바로 밑까지 허름한 집들이 들어섰고, 공터에다 야채들을 심었네 그려. 계곡 건너편 저쪽의 富村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이왕 사적지로 지정하고 복원할 마당이었으면, 성곽 주변의 주민들을 移住시킬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울시의, 대한민국의 재력이 거기까지 감당하기가 아직은 어렵다는 것일까.

 

   명륜동이 끝나고 삼청동이 시작될 즈음에서 뜻밖에도 군부대가 나타나 탐방객의 길을 막는다. 아마도 그 아래 어딘가에 있을 청와대를 경비하기 위해서이리라. 그 옛날 경복궁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랬을까.... 덕분에 자하문까지 가보겠다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통일이라도 되기 전에는 이쪽의 개방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성곽과 군부대 사이에 튼튼한 철조망을 치고 경계를 엄히 서는 대신, 지금까지와 같은 정도의 길을 내어 民草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게 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성곽 바깥으로 나가는 암문을 만들고 그 밑으로 길을 내든지.... 쯧, 혼자만의 생각이다.

   그런데 아니러니컬하게도 이 곳에서는 지금 터널공사가 한창이고, 공사차량의 통행을 위하여 성곽 일부를 헐어제끼는 바람에, 그 곳을 통하여 성밖으로 나갈 수가 있다. 이 터널은 종로구와 성북구를 잇기 위해 뚫는 중이란다. 삼청동의 감사원쪽에서 올라오는 차도가 이미 성곽까지 나 있는 터인지라 성곽을 관통하여 길을 내면 쉬우련만, 굳이 힘들게 터널을 뚫는 것을 보니 성곽을 단절시키지 않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여겨진다. 참으로 그렇다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파괴 일변도를 걸었던 건설행정에 한 줄기 반성의 瑞光이 깃드는 장면이다.  


   성곽 바깥으로 나서면 이곳부터는 성벽 밑에 人家들이 없고 산 속으로 오솔길만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걷노라니 바깥 성벽을 자세히 볼 수 있어 望外의 소득을 얻은 기분이다. 주로 여장(餘牆)밖에 볼 수 없는 안쪽과는 달리 바깥쪽에서는 체성(體城 : 城의 몸체)을 전부 볼 수 있어, 40척의 높이를 느낄 수 있고, 돌들의 모양도 살필 수 있다.  

   1975년 복원 당시에 새로 쌓은 네모반듯한 돌들은 그 색이 희고 틈이 없는 데 비하여, 얼마 남지 않은 초기 축조 당시(아니면 숙종 때의 개축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돌들은 이끼를 머금은 채 회색 내지 검은 색조를 띠고 있고, 그 동안 모서리가 달았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틈이 벌어져 그 사이로 풀들이 자라고 있어 연륜을 말해준다.
  그나저나 그 옛날에는 저 큰 돌들을 어떻게 운반하여 왔으며, 쌓기는 또 어떻게 하였을까.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영혼들의 숨결이 배어 있는 듯하다.  

   이 바깥 길은 숲속으로 나 있어 더위를 잊게 해 주는데, 끝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쉽게도 중간에 되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릉동으로 빠지게 된다.

 

   성곽에서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아스팔트 포장도로이다. 보차도의 구분이 애매하여 가끔 지나가는 대형트럭(터널공사차량)이 겁을 주기도 하지만, 숲이 우거져 그런 대로 운치가 있다.
  특히 바로 밑에 내려다보이는 창덕궁 後園(秘苑)의 숲이 아름답다. 중간에 약수터가 있는데, 가뭄에 바닥이 드러나 오히려 흉물이 되고 말았다. 가을에 단풍이 들었을 때 걸으면 최고라는 用根이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찾는 이가 적어 더욱 좋단다. 언제고 가을에 한 번 다시 와 보리라.01.jpg

 

   한창 增改築(?) 공사 중인 감사원에서 삼청동 쪽으로 바로 빠지지 않고 가회동 쪽으로 길을 잡았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산다는 경남빌라를 지나면서부터 나타나는 전통한옥들을 보기 위함이다. 비록 곳곳에서 고급 빌라를 짓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날아갈 듯한 한옥들이 제법 눈에 띈다. 강남의 아파트촌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이 다음에 늙어서라도 여유가 있다면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동네이다.  

   어려서 이 곳에서 오래 살았던 用根이의 설명을 들으며 많은 집들을 기웃거렸다. 그 중 정주영씨가 살았던 집은 바깥에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커 보였고(어릴 적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요비링'을 누르고 도망쳤다는 用根이의 회고가 재미있다), 윤보선 전대통령이 살았던 집은 잠겨진 대문 틈으로 널찍한 정원들이 들여다보인다. 비록 주인은 갔으되, 그 집은 남아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회동 일대에는 한옥뿐만 아니라 가회동성당과 같이 또 다른 멋을 풍기는 건물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인사동에서 점차 이주하여 오기 시작하는 골동품점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 우리 전통문화거리의 상징인 인사동에서는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정작 골동품 가게들이 잘 안 된다니 이 또한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삼청동쪽으로는 미술관도 들어서고 있는데, 한옥의 아름다움을 현대식으로 살려 2000년도 대한민국 건축대상을 받은 건물은 그 주인의 살림집(2층)과 미술관(서미갤러리, 1층)으로 함께 사용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어느 새 선재미술관을 거쳐 발길이 삼청동으로 접어든다. 청와대 쪽과 삼청공원 쪽으로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들어선 진선북카페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시계를 보니 10시 30분. 성곽에 취하고 한옥에 홀린 사이에 2시간 30분이 휙 지나간 것이다. 여행을 가장 짧은 시간에 하는 방법은 빠른 운송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벗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카페에서 한참 실내 청소를 하던 여종업원이 물에 젖은 손으로 아직 영업 시작 전이라고 미안해한다. 그래도 목을 축일 물이나 한 잔 얻어먹을 수 없냐고 했더니 잔디밭의 파라솔 밑에 마련된 의자에 앉으란다. 청소를 하다 말고 물에 얼음까지 띄워 가져다주는 인심이 고마워 굳이 청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생과일 쥬스를 한 잔 시켜 마셨다.
  진선출판사에서 後援하는 이 카페에는 안으로 들어서면 後援의 취지에 맞게 여러 가지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카페를 찾는 이들에게 제공되는 것인데,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이다. 그렇지만 책들이 놓여 있다는 것 자체로 푹신한 의자와 함께 고즈넉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삼청동까지 온 김에 유명한 '삼청동수제비집'을 찾았다. 다소 이른 시간인데도 겨우겨우 구석에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붐빈다. 해물로 울궈 낸 국물의 맛이 그만이다. 밥해 먹을 쌀이나 보리는 없고 허기는 때워야 하고, 그렇게 어렵게 살던 시절에 한 끼의 끼니를 해결하는 수단이었던 수제비가 일요일 이른 점심시간에도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인기를 끄는 식사가 될 줄이야..... (2001.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