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루어지고(지리산 종주)

2010.02.16 11:56

범의거사 조회 수:9557


                       꿈★은 이루어지고


   도보산행의 교과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은 도전해 보고픈 지리산 종주(縱走), 그 동안 마음 속으로만 그려 오던 그 종주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지난 봄에 바래봉에서 바라보았던 천왕봉부터 노고단까지의 지리산 全景이 얼마나 멋있었던가....

2002. 10. 3.

   이 나라의 하늘이 열린 지 4335년째 되는 날, 우여곡절을 되풀이하던 지리산 종주길에 올랐다. 이를 위해 4일과 5일은 가을휴가를 냈다. 이번 산행의 동반자는 거의 1년만에 다시 모인 白冬선생(김태준), 白河선사(조완영), 쓸뿌리도사(박용근)이다.

    대전역에서부터 지리산 북쪽 백무동(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까지는 승용차로 정확히 2시간 걸렸다. 대전부터 통영까지의 大晉고속도로가 생긴 덕분이다. 강원도를 횡단하는 영동고속도로보다도 더 산간지방을 관통하여 뚫려 있는 이 고속도로를 타고 南行하다가, 함양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를 만나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주행하다 보면, 이내 지리산  톨게이트가 나온다.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1시간 30분.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면 바로 왼쪽으로는 함양, 오른쪽으로는 남원, 직진하면 실상사로 가는 사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실상사 쪽으로 직진하여 가다보면, 다시 실상사길(마천쪽)과 뱀사골길(산내쪽)이 갈리는데, 왼쪽의 실상사길로 들어서서 차를 몰아 가다가 실상사 입구를 지나면 七仙溪谷 가는 길과 백무동(白武洞) 가는 길이 또 갈린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리를 건너 산 속으로 더 들어가면 백무동이다. 지리산 톨게이트부터 백무동까지는 30분이 걸린다. 등산로가 시작되는 초입에는 넓은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가서 보니 동서울부터 이곳까지 직통버스가 다니고 있다. 분명 산행객들을 위한 것이리라.  

하동바위길

  Uni12c50.gif 다소 이른 시각이긴 하지만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11시30분에 지리산 종주를 위한 산행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오늘의 목적지는 장터목산장. 천왕봉 등정을 위한 베이스캠프가 되는 곳이다.

   백무동에서 장터목까지 오르는 길은 寒新계곡(한신주곡)길, 寒新지(계)곡길, 하동바위길의 세 가지가 있다. 그 중 한신계곡(한신주곡)길이 폭포와 소(沼)가 많아 제일 멋지다고 하는데 이 길은 세석산장까지 갔다가 촛대봉, 삼신봉, 연하봉을 거쳐 장터목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걸려 택할 바가 못 된다. 반면 하동바위길은 장터목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최단코스(5.8km)이나 도중에 폭포 하나 없을 정도로 이렇다 할 볼거리가 없어 다소 무미건조하다. 그래서 폭포도 구경할 수 있고 거리도 비교적 짧은 한신지계곡코스를 택하기로 하였는데....
   지리산국립공원의 매표소에서 공원직원이 들려주는 말에 그만 시작부터 맥이 풀린다. 한신지계곡코스는 豪雨로 곳곳이 유실되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단다.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동바위코스를 택할 수밖에.

   매표소를 지나면 이내 한신계곡길과 하동바위길이 갈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왼쪽 하동바위길로 접어들자 곧바로 오르막이 시작된다. 어느 산에나 가면 으레 있기 마련인 소위 깔딱고개를 처음부터 만난 것이다. 이 길이 장터목 가는 최단코스인 이유를 알 만하다. 신소재로 만든 등산복 상ㆍ하의와 배낭을 새로 구입한 데다 힘까지 넘쳐나는 백하선사는 휘적휘적 잘도 가는데, 고속철도 업무에 바쁜 탓인가 그 동안 운동을 못했다는 쓸뿌리도사가 뒤로 처지기 시작한다. 그를 맨 앞으로 내세워봐도 힘들어하기는 마찬가지다. 하필이면 길마저 너덜길이다.

   출발한 지 1시간이 좀 더 되었을까 눈앞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버티고 있다. 이 길의 주인공인 하동바위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 이름의 연유를 짐작할 단서를 찾을 수 없다. 함양땅에 웬 하동바위란 말인가(一說에 의하면 하동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보단 더 위 길가에 그리 크지 않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생김새가 거북이를 닮았다. 백하선사의 발견이다. 내가 보기엔 백하선사의 얼굴과 비슷하여 그를 닮았다고 하였더니 다른 친구들도 공감한다. 그렇다면... “ 야, 이제부터 네 호를 龜岩이라고 해라. 거북바위 말이다. 거북이처럼 느리면서도 바위처럼 의연한 자세를 견지해라.” 백하선사의 새로운 아호 “龜岩”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 바위를 지나 1시간을 더 가자 샘터가 나타났다. 이 샘의 이름은 참샘.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집수정을 만들고 꽂아놓은 파이프에서 시원한 물이 콸콸 나오는데, 그 물맛이 일품이다.
   참샘의 무공해 천연수로 회복한 기운을 이용하여 다시 깔딱고개를 오른다. ‘도대체 이 오르막은 언제 끝나는 거야’ 투덜거림도 잠깐, 마침내 이 코스의 중간지점인 소지봉에 다다랐다. 이제부터는 하늘이 보이는 능선길이다. 쓸뿌리도사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돈다. 왼쪽의 아래로는 그 유명한 七仙溪谷이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고, 소슬하게 부는 가을바람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을 멈추게 한다. 그 바람소리가 무거울수록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아니 가벼워져야 한다. 지리산의 千變萬化하는 날씨에 등산객들이 애를 먹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넓어져 장엄하기 그지없는 지리산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평소 詩的인 감Uni12c60.gif각과 날카로운 관찰력을 자랑하는 龜岩선사와 백동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껏 힘들어하던 쓸뿌리도사의 입에서도 탄성이 절로 나오는데, 지리산은 역시 찾아오는 손님을 얌전하게만 맞이하는 새색시가 아니다. 이미 단풍이 물든 하늘에는 분명 밝은 해가 떠 있건만 느닷없이 마른 번개가 몇 번 치더니 천둥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리고는 구름이 몰려와 해를 가렸다 풀어줬다 한다. 저 먼 발치로 장터목산장이 보이는데, 이제 30분만 더 가면 되는데....

   발걸음을 재촉한 보람도 없이 목적지까지 10여분을 남겨 놓은 상태에서 결국 비를 만나고 말았다. 급히 비옷을 꺼내 입었지만 배낭위로 걸친 터라 아랫도리는 가릴 길이 없다. 빗줄기가 굵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갈아입으면 되기 때문에 사실 옷이 젖고 안 젖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비가 많이 올 경우 길, 특히 바위길이 미끄럽다는 것이다. 자칫 발목이라도 삐끗하는 날이면 그것으로 종주는 끝이다.

  “天地神明이시여, 이 불쌍한 중생들을 굽어살피시옵소서!”

애타게 기원한 보람이 있는 것일까, 5분만에 비가 그친다. 그리고는 장터목산장에 도착하기까지 가랑비가 오다 말다를 되풀이한다. 백무동을 출발한 지 4시간30분만에 장터목산장에 짐을 풀을 수가 있었다. 걸은 거리는 5.8km.

장터목산장의 애환

  장터목(1,750m)은 옛날에 남쪽의 산청과 북쪽의 마천 사람들이 만나서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곳에 본래 조그만 산장이 있었는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1997년 11월에 통나무로 새롭게 크게 지었다. 천왕봉까지 1시간 거리에 있어 정상 등정의 베이스캠프로 이용하기에 적격이다. 실제로 피서철과 新年 해돋이 때는 산장 안에다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고 한다.

01 (3).jpg   때문에 산장에서 하루 밤을 머물려면 미리 예약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며(전화 055-973-1750), 1박에 1인당 5,000원을 받는다. 그리고 담요를 빌려주는데  한 장에 1,000원이다. 수용인원은 160명 정도로서, 나무로 된 침상에서 일렬로 잔다. 예약을 안 하고 가면 배낭을 끌어안고 쭈그린 자세로 자기 십상이다. 산장 내에 취사장이 있어 밥을 해 먹을 수 있으며, 매점에서 햇반과 라면(봉지라면 및 컵라면)을 판다. 단 술은 팔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아무래도 사고의 위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양변기가 설치된(그러나 수세식은 아님) 화장실에 앉으면 지리산의 시원한 계곡바람이 엉덩이를 시원하게 해준다.  
                
   이 곳에 근무하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분소 직원들은 애환이 많다. 15일 근무하면 이틀 정도 산을 내려가 집에 다녀올 수 있다고 한다. 돌아올 때는 부식거리를 짊어지고 온다. 산장의 관리도 관리지만 조난 당한 사람들의 구조요청이 오면 즉각 출동하여야 하기 때문에 하루 24시간 내내 대기상태로 있으면서 틈틈이 눈을 붙인단다. 산을 여간 좋아하지 않으면 근무하기 어려운 여건이 아닐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는(아니 이곳뿐만 아니라 지리산 전체가 다 그렇다) 휴대폰이 거의 안 터진다는 것이다. 한국의 산악지형에 강하다는 에니콜(Anycall)도, 언제 어디서나 터진다고 자랑하는 011도 다 지리산에서는 헛소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구조요청이 들어오느냐고 직원에게 물었더니 ‘귀신의 조화’로 돌린다. 사람이 살려면 휴대폰이 터진다는 것이다. 구조대가 도착하고 나면 다시 휴대폰이 안 터진다는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실제로 나와 쓸뿌리도사는 몇 번의 시도 끝에 휴대폰으로 서울의 집에다 산장 도착 사실을 알릴 수 있었는데, 백동선생과 龜岩선사는 그것이 끝내 불가능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여름이면 지리산에서 조난사고가 잦은 것은 公知의 사실인데, 유독 이동통신회사의 관계자들만 눈과 귀를 막고 사는 모양이다. 어떻게 이 험하고 넓고 깊은 지리산에 기지국이나 중계탑을 설치 안 한단 말인지... 이동통신회사 사장이 지리산에 갔다가 조난이라도 당해봐야 그 필요성을 느끼려나....
  

천왕봉(天王峰)의 日出

   산장측의 배려로 따뜻하고 편한 잠을 자고 2002. 10. 4. 새벽 4시30분에 일어났다. 바깥 날씨를 살피고 들어온 龜岩선사가 바람이 몹시 불어 매우 춥다고 한다. 가지고 간 옷을 모두 껴입고 플래쉬를 든 채 5시에 산장을 나섰다. 천왕봉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어제 깔딱고개에서 혼이 난 데다 오늘 하루 종일 걸을 생각을 하니 엄두가 안 나는지 쓸뿌리도사는 잠이나 더 자겠다고 한다.  

   천왕봉까지의 거리는 1.7km, 시간상으로는 1시간 20분 걸린다고 안내판에 씌어 있다. 하늘에는 그믐달이 걸려 있고,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다. 서울에서 보던 희미한 별이 아니라 맑디맑은 별이다. 그 별을 헤며 가기엔 산길이 너무 험하다. 그렇지만 플래쉬 불빛에 의존하며 걷는 등산로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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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석봉의 枯死木지대를 지나면서 주위가 뿌옇게 보이기 시작한다. 枯死木지대는 본래 구상나무, 전나무 등이 우거진 곳이었는데 자유당  말기에 농림부장관의 삼촌 되는 자가 특혜를 받아 도벌을 한 후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질러 남은 나무들마저 모두 불타 죽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6.25 때 공비 토벌을 위하여 불을 질러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 곳이다. 결국 枯死木이 아니라 非命橫死木인 셈이다. 아무튼 살아 있는 나무는 없고 풀만 우거진 곳에 죽은 나무들이 띄엄띄엄 눈에 띄는데,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하다.

   제석봉(帝釋峰. 1,806m)을 넘으면 천왕봉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로 통하는 곳이라 하여 通天門이라고 이름지어진 바위굴을 지나면 마지막 오르막이다. 이젠 플래쉬가 더 이상 필요 없다. 여명(黎明)에 주위가 환해졌기 때문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최후의 발걸음이 닿은 곳에는 “韓國人의 氣象 이곳에서 發源되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천왕봉 정상인 것이다(1,915m). 시계를 보니 정각 6시. 추위를 이기느라 부지런히 걸은 탓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일출시각인 6시 20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정상 부근의 목 좋은 자리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비석 옆에 서면 바람이 날아갈 듯이 부는데, 거기서 동쪽으로 몇 걸음만 내려서면 微風조차 느낄 수 없으니 이 또한 자연의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예정된 일출시각이 다가오자 일순간 구름 사이로 햇빛의 줄기가 먼저 확 뻗쳐오른다. 그리고 잠시 후 회색 구름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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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멋진 보습을 어찌 筆舌로 표현하랴. 그야말로 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장관이라고 밖에는 달리 그려낼 재간이 없다. 그냥 넋을 잃고 바라볼 따름이다. 지리산의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천왕봉에서 일출을 볼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고작 30일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三代에 걸쳐 덕을 쌓지 않고는 볼 수 없다는 그 일출을 보고 있는 것이다.        
           
벽소령 가는 길  

   천왕봉에서 장터목산장으로 다시 내려와 아침식사를 한 후 짐을 꾸려 종주 둘째날의 본격적인 장정을 시작하였다. 몇 년 전 수술을 하였음에도 통증이 여전히 남아 있는 오른쪽 무릎에는 트라스트를 붙이고, 오른쪽보다는 형편이 좋은 왼쪽 무릎에는 바이오파스를 붙이고, 다시 그 위에 각각 무릎보호대를 착용(이쯤 되면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다)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후였다.

  목표지점은 벽소령산장. 출발시각은 오전 9시 30분. 산장의 안내판에 나와 있는 총거리는 9.7km(장터목에서 세석고원까지 3.4km + 세석고원에서 벽소령까지 6.3km)이고 소요시간은 5시간(1시간 30분 + 3시간 30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쉬지 않고 걸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장터목장에서 벽소령까지의 길은 연하봉(烟霞峰. 1,667m), 삼신봉(三神峰), 촛대봉(1,704m), 영신봉(靈神峰. 1,652m), 칠선봉(七仙峰), 덕평봉(德坪峰. 1,522m) 등 높은 봉우리를 계속 넘어야 한다.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에 세석고원(1,500m)이 있어 휴식을 통한 기력의 충전이 가능하다지만 결코 쉬운 旅程이 아니다. 봉우리마다 해발 1,500m를 넘는 위용을 자랑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능선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을 되풀이하며 이어지는 이 구간이야말로 지리산 종주의 白眉이다.Uni12ca0.gif산세가 험한 대신 그만큼 지리산의 절경을 다 볼 수 있다. 높은 곳에 올라 앞을 보면 첩첩이 놓인 봉우리들 뒤로 아스라이 보이는 반야봉과 노고단까지의 길고도 긴 산행길이 가을 山客의 기를 질리게 하지만, 눈을 돌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어느 새 이만큼 왔나 싶게 천왕봉이 한 발짝씩 멀어져 간다. 그 천왕봉이 다음에 또 오라며 아쉬운 손길을 보내온다. 그런가 하면 동서로 길게 뻗은 이 길을 가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산 아래쪽을 보노라면 지리산의 남북으로 자리잡은 계곡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으리만큼 이어진다. 참으로 어머니의 품속 같은 푸근함을 느끼게 한다.

  연하봉(烟霞峰)은 안개가 많이 끼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계곡 저 아래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 바람에 실려 안개구름이 밀려오며 仙境을 연출한다. Uni12cb0.gif 그 봉우리 꼭대기에서 내려오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기묘하게 생긴 깊지 않은 검은 바위 협곡이 나온다. 그 모양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龜岩선사의 표현을 빌리면,

  “야~, 저게 바로 도올선생이 좋아하는 현빈(玄牝)이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럴싸하게 생겼다.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 산에 아무렇게 놓인 일단의 바위들에서 '가물한 암컷'(玄牝)을 발견하다니.... 본래 詩人의 기질이 넘쳐나는 그답다. 그의 예고된 장편 敍事詩 “아, 지리산!”을 기대해본다.
   그가 요즈음은 나무에 관심이 쏠려 산행 중에도 설명문을 붙여놓은 나무들이 눈에 띄면 그것을 녹음하느라 정신이 없다. 신갈나무, 떡갈나무, 당단풍나무, 주목, 구상나무, 올벚나무, 굴참나무, 미역줄나무, 가문비나무... 조만간 나무박사가 탄생하려나보다.  

   지나는 줄도 모르게 三神峰을 지나면 촛대봉이 기다린다. '촛대봉'하면 흔히 뾰족하게 솟은 형상을 연상하는데, 이곳은 그렇지는 않다. 다만, 정상 주위가 온통 바위이다. 그리고 바람이 드세다. 덕분에 넓은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촛대봉에서는 세석고원과 그곳에 자리한 세석산장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세석고원(細石高原. 잘디잔 돌이 10만여 평에 걸쳐 광활한 평원을 이루고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Uni12cc0.gif종래 ‘細石平田’이란 말을 많이 썼으나 平田은 전형적인 일본식 표기여서 이젠 안 쓴다), 말 그대로 넓은 평원인 이곳은 야생식물의 자연학습장이다. 자연을 보호하면서 탐방객의 관찰을 돕기 위하여 곳곳에 세워 놓은 안내판에서 국립공원관리공단측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이젠 우리나라도 이 정도까지는 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하다. 그 안내판들 중 하나가 가르쳐주는 이곳의 생태계 변화가 흥미롭다. 처음엔 잡풀로 뒤덮였었는데, 그들 사이로 철쭉과 같은 작은 관목이 번창한 후, 지금은 구상나무와 같은 키가 큰 교목으로 교체중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래도 ‘세석평전’ 하면 봄의 철쭉구경을 떠올리지만(실제로 아직은 철쭉 군락지가 많다), 언젠가는 그것이 과거의 일로 될 때가 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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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상나무는 학명인 “Abies Koreana Wilson”이 말해주듯이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고유 樹種이다. 소나무과 속하는 이 나무는 한라산, 무등산, 지리산, 덕유산 등 남부지방의 해발 500-2,000m 사이 서늘한 지역에 분포한다. 멀리서 보면 꼭 크리스마스 때 사용하는 장식용 나무처럼 보이지만(실제로 그렇게 쓰이기도 한다) 다 자란 것은 높이가 18m에 이른다. 그 잎에서 나는 진한 향이 木製가구를 집안에 처음 들여놓았을 때 맡을 수 있는 냄새를 연상케 한다.  이 나무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이번 산행의 귀중한 수확 중의 하나이다.

  세석산장에 도착하니 어느 새 12시가 되었다. 예정보다 1시간이 더 걸린 셈이다. 점심은 애당초 준비를 안 했기 때문에 산장의 매점에서 사발면과 햇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진공포장된 종가집김치를 사가지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절로 난다. 하다 못해 김이라도. 세석산장이야말로 지리산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인 만큼(1박2일로 종주를 할 경우 대개 이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수용인원이 300명이다. 전화 055-973-1600) 매점에서 팔 만도 하련만... 취사장에는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식수대에는 설거지를 하는 사람들이 들끓는다. 산장의 직원들이 환경오염을 염려하여 설거지를 말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산에서 취사가 금지된 게 오래 전의 일이나, 산 속에서 밤을 지새야 하는 지리산에서는 산장에서 음식을 팔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산장에 식당을 열고 체계적으로 쓰레기를 관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쉽게 정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점심과 휴식을 겸해 세석산장에서 1시간을 지체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을 거쳐 벽소령까지 6.3km, 3시간 30분의 여정이다. 오전처럼 느긋하게 걷다가는 저물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겠기에 이번엔 속도를 낸다. 자연히 땀을 더 흘리게 되고, 물도 더 마시게 마련이건만 준비한 물통은 500cc 정도 들어가는 두 개뿐이다. 지리산의 종주길에서는 적어도 2시간마다 샘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짐을 줄이기 위해 물통을 적게 가져 온 것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날이 좀 흐린 것이 좋은데, 오늘따라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날씨가 갈증을 더하게 한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는 그보다 못한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어쩌랴. 인간의 가이없는 욕심을 다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할 수 없이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는 것으로 갈증을 달래가며 허위허위 달려가 마침내 덕평봉 못 미쳐 있는 선비샘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샘에 집수정을 설치하고 파이프를 박아 물이 나오게 했는데, 이 높은 산의 어디에서 저렇게 나올까 싶게 산삼 썩은 물이 콸콸 쏟아진다. 목마른 사람이 '선비'가 나만은 아닌 듯 줄이 길게 늘어서 있지만, 워낙 수량이 풍부하다 보니 그 줄이 금새 사라진다. 덕분에 세수까지 하면서 땀을 식힐 수 있다.

    Uni12ce0.gif 덕평봉을 넘으면서 시계를 보니 벌써 4시다.  가는 길의 왼쪽 하늘에 떠 있던 해가 어느 새 앞으로 와서 비추려 한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길에 방향잡이라도 해주려나보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난 후유증인지, 다리도 아프고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껏 꿋꿋이 걷던 백동선생도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누가 그랬던가 죽을 만하면 살 길이 열린다고. 차라리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어질 무렵에 나타난 평평한 길, 그것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벽소령까지 30여분을 평지나 다름없는 오솔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 길을 냈을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그렇게 해서 오후 5시에 벽소령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벽소령(碧宵嶺)산장의 수수께끼

   이 산장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곳이다. 장터목산장, 세석산장에 비하여 규모는 작지만 내부Uni12cf0.gif시설은 비슷하다. 숙박과 관련된 것들 또한 장터목산장과 다를 바 없다. 화장실이산장 본채와 약간 떨어져 있어 냄새가 덜 난다는 점은 前者보다 더 나은 셈이다.
   오늘 하루 종일 휴대폰이 안 터져 애를 태웠는데, 이 곳도 마찬가지다. 산장의 관리직원이 산장마당에서 유일하게 휴대폰이 터지는 장소라고 가르쳐 준 곳에서도 역시 불통이다. 그런데 장터목산장에서도 그러더니 이곳도 사람을 차별하나보다. 백동선생은 통화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산장 사무실의 벽에다 걸어놓은 그곳 직원들 휴대폰으로는 통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화기도 벽에서 떼면 역시 통화가 안 된다.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수수께끼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역시 귀신의 조화인가?      

   벽소령(碧宵嶺. 1,350m)의 明月은 지리산 10景의 하나이다. 벽소령은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록한 고개인데, 주위를 높고 푸른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 보름날 한 밤중(宵)에 숲 위로 비치는 달칩이 희고 맑다 못해 푸르스름해(
) 보이기까지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호라, 오늘이 음력 8월 28일이니 그믐달밖에 볼 수 없음을 어이할 거나. 안타깝지만 차라리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내일을 위해 좋으리라.


  벽소령산장의 잠자리도 편안하긴 한데,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가볍지 않다. 밤새 난방이 안 돼 추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원이 설명하는 이유를 듣고는 苦笑를 금할 수 없었다. 난방을 위해서는 기름을 때야 하는데, 그 기름을 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젠가 지리산 아랫녘의 어느 소방서장이 지리산 등산을 왔다가 산장에서 기름을 때는 것을 보고는 화재의 위험이 있다며 금지했다는 것이다. 동절기 3개월을 제외하고는 불을 때지 못하게 말이다. 등 따뜻하고 배부른 사람은 춥고 배고픈 사람들의 사정을 모른다더니, 바로 그 꼴이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자는 사람이 어찌 지리산 꼭대기 산장에서 추위에 웅크리고 자는 등산객들의 실정을 알리오. 그럴 바에야 한 여름만 빼놓고는 지리산 등산로를 아예 다 폐쇄해버리지 무엇 하러 등산을 하게 한단 말인가. 등산로의 개방 여부는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강변하려나...  
  
노고단을 향해

  2002. 10. 5. 지리산 종주의 마지막 날이다. 갈 길이 멀어 서둘러 아침을 먹고 7시 30분에 벽소령산장을 나섰다. 형제봉(1,433m), 연하천(烟霞泉. 1,480m), 명선봉(明善峰. 1,586m), 토끼봉(1,537m), 화개재, 삼도봉(三道峰. 1,550m), 노루목, 임걸령(林傑嶺. 1,320m), 돼지령을 거쳐 노고단까지는 무려 14.1km. 거기서 다시 성삼재까지 2.5km. 총 16.6km의 長征이다. 안내판에 나와 있는 소요시간만도 모두 합쳐 9시간 10분이다. 거기에다 동행한 친구들은 서울까지 가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바쁜 마음과는 달리 출발부터 오르락 내리락이 심한데다, 그나마 태반이 바위길인지라 행군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벽소령에서 연하천 방향으로 30분간이 종주길 중 가장 심한 너덜지대라고 하더니 그 말이 실감난다. 그렇지만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라 쓸뿌리도사가 앞장서서 묵묵히 걷는다. 
   
   하루에 20리를 걸어가는 사람이 200리를 달리는 호랑이를 잡는다고 했던가, 걷다보니 형제봉을 Uni12d00.gif지나고, 또 걷다보니 연하천산장이다. 아직 오전 10시가 안 된 시각이다. 한 달음에 3.6km를 주파한 것이다. 烟霞泉은 고산지대인데도 숲 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마치 안개구름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하여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연하천산장은 개인이 운영하는 곳으로서 이제까지 거쳐온 산장들에 비하면 매우 좁고 허름하다(수용인원 50명. 전화 063-625-1586). 처음에 종주 계획을 세울 때 장터목과 노고단의 중간쯤 되는 곳인지라 이곳에서 一泊하려고 했는데, 당시의 남원지청장(김진태부부장검사)이 그런 내 계획을 적극 말리면서 벽소령산장을 추천한 이유를 알 만하다. 여관과 호텔의 차이라고 하면 표현이 적절하려나... 그래도 산장의 주인은 인심이 후하여 당귀차를 공짜로 준다. 
  
   연하천에서 명선봉을 오르는 길은 처음에 나무로 만든 계단이 이어져서 걷기가 쉽다. 어떤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는 것이 더 어렵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바위길을 조심조심 천천히 걷다가 계단을 만나니 쉽다고 빨리 걸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명선봉을 지나면 토끼봉(이는 반야봉에서 보면 正東방향, 즉 卯方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이 보이는데, 이 봉우리는 제법 험하다. 처음에 이야기 들을 때는 여기서부터는 유모차도 다닐 수 있는 신작로나 다름없다고 했는데, 허풍이 너무 심한 소리이다. 온통 바위길에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모두 꽤나 길어 땀 깨나 흘리고 무릎도 조심해야 한다. 토끼봉부터 화개재까지가 종주길 중 가장 긴 내리막(반대방향에서 보면 오르막)인 것이다.

  이 때 그나마 힘을 나게 해주는 것이 맞은 편에서 오는 등산객들이다. 산에 가면 사람들이 순해지고 맑아지는 것을 종종 느낀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고 친해질 수 있다. 천왕봉에서 내려올 때 龜岩선사가 사진을 찍어준 답례로 자신들의 디지털카메라로 우리 일행의 사진을 찍어 이메일(E-mail)로 보내준 사람들도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등산로에서는 먼저 보는 사람이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십니다”하고 인사를 건네고, 서로 동시에 지나가기에는 길 폭이 좁으면 옆으로 비켜서서 기다려준다. 그러면 상대방은 “감사합니다. 즐거운 산행 하십시오”하고 답례를 한다. 목적지를 말하고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면 크게 과장되지 않은 범위 내에서 “금방입니다. 힘 내세요”하고 대답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면 ‘금방’이 아님을 알면서도 거기서 힘을 얻는 것이다. 갚을 빚은 없지만 말 한 마디로 힘을 불어넣어 주니 얼마나 좋은가.      
  
뱀사골산장과 노루목산장의 喜悲雙曲線

  Uni12d10.gif  토끼봉에서는 반야봉이 제법 가깝게 보인다. 둥그런 두 봉우리가 잇대어 있는데, 가운데가 푹 파여 마치 여인의 엉덩이 두 짝 같은 모습이다. 그 왼쪽으로는 노고단의 뾰족한 봉우리가 자태를 뽐내고, 더 왼쪽으로는 시루를 엎어놓은 형상의 왕시루봉(1,243m)도 보인다.

  그 토끼봉과 三道峰의 중간지점이 화개재이다. 남쪽 화개장터에서 올라온 소금과 해산물이 북쪽 운봉, 산내에서 뱀사골을 거쳐 올라온 내륙 특산물과 맞교환되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이려니 하고 상상을 해본다. 그곳에 뱀사골산장이 있는 것으로 알고 거기서 점심을 먹을 요량으로 도착했다. 그런데 아뿔싸, 지도를 잘못 읽는 바람에 여늬 산장처럼 종주길 능선에 산장이 있는 줄 알았건만, 막상 다다르고 보니 능선에서 뱀사골로 200m를 내려가야 한다. 이제 보니 지도상으로도 능선길에서 비켜나 있는 것을...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고, 저기를 내려갔다 점심 먹고 올라오면 그 사이 1시간이 후딱 지나갈텐데.... 그러나 어쩌랴, 점심을 굶고 산행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백동선생이 앞장을 선다. Uni12d20.gif

   화개재 능선에서 산장까지의 200m는 계단으로 이어진다. 그 계단을 보는 순간 쓸뿌리도사의 안색이 변하며 한 숨을 크게 내쉰다. 뱀사골산장에서도 햇반과 사발면을 팔지만 이번에는 다 외면하고 초코파이, 초콜렛, 복숭아통조림, 비스켓, 포카리스웨트 등을 집어들었다. 옆자리에서 일단의 젊은이들이 봉지라면을 끓이는데, 라면 냄새가 그렇게 역겨운 줄 처음 알았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세 친구 모두 그렇단다. 무공해지대에서 사흘을 보내는 동안 전형적인 인스턴트식품인 라면에 대한 거부항체가 몸 안에 저절로 생긴 모양이다. 그것을 줄창 먹어대는 우리 청소년들의 건강이 어찌 되려나...
  
   12시 30분. 점심을 후딱 해결하고 200m를 헉헉대며 다시 화개재로 되돌아 올라가 지도를 펼쳤다. 그런데, 아! 그 순간의 낭패감이라니... 삼도봉을 지나면 바로 능선길에 노루목산장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지 않은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며 비통에 잠겨야 했다. 뱀사골산장으로 내려가는 길을 앞장섰던 백동선생이 괜히 미안해하며 나더라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三道峰을 오르는 길도 나무계단이다. 이 계단이야말로 여간해서는 끝을 모를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숫자를 세면서 올라가는 것이 지루함을 덜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스민다. 숨이 턱에 찰 때쯤이면 정상에 다다른다. Uni12d30.gif이곳은 경상남도(하동), 전라남도(구례), 전라북도(남원)의 三道가 만나는 곳이라고 해서 三道峰이다. 그 사실을 알리는 조그만 표석도 세워져 있다. 잠시 숨을 돌리는데, 일단의 남녀들이 몰려온다. 뱀사골산장에서 점심 먹을 때 본 사람들이라고 백동선생이 아는 체를 하며, 뱀사골을 올라오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물으니까 2시간 30분만에 올라왔다고 한다. ‘원장님’이라고 불리는 젊은 아가씨(?)가 하도 빨리 걷는 통에 자기들도 죽을 뻔했다며 일행 중의 한 남자가 혀를 내두른다. 가히 지리산 女타잔이라 할 만하다.      

   삼도봉에서 노루목은 지척이다. ‘으흐, 뱀사골산장에서 힘들여 점심을 먹은 게 억울해서라도 노루목산장은 그냥 지나쳐야지’ 하고 내심으로 다짐하며 노루목에 이르렀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산장이 보이질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모두 어리둥절해하다가 그곳에 먼저 와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한테 물어보았다.
  “전에는 이곳에 산장이 있었대요. 그러나 지금은 없어요. 언제 없어졌는지는 몰라요.”

천만 뜻밖의 대답이다.

  “우하하하~, 人間事가 塞翁之馬라더니, 정말 그러네 그려”

  이렇게 되면 뱀사골산장에서 점심을 해결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방금 전까지도 지도를 잘못 본 자책감에 시달렸는데, 그것이 轉禍爲福으로 될 줄이야. 하마터면 속절없이 점심을 굶을 뻔했던 것이다. 갈 길은 아직도 하염없이 먼 데 말이다.

마침내 노고단

   삼도봉에서 노고단까지는 6.3km로 4시간 거리이다. 노루목 못 미쳐서 반야봉(般若峰. 1,732m)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결국 반야봉은 종주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셈이다. 가까이서 보는 반야봉은 이젠  더 이상 여자의 예쁜 엉덩이 모습이 아니지만, 그래도 붉게 물든 단풍이 잘 어울리는 여전히 여인네 같은 봉우리이다. 그곳을 올라 그 유명한 반야낙조(般若落照)를 보고 싶은 유혹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러면 1시간 넘게 지체가 될 거라는 어느 이름 모를 등산객의 이야기에 이내 단념한다.

   단숨에 임걸령(林傑嶺)까지 내달아 그 곳 샘터에서 다시 목을 축이고 고개를 드니 노고단이 드디어 사정권내에 들었음을 알겠다.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의 능선이 동남풍을 가려주어 산속 깊이 자리한 아늑하고 조용한 천혜의 요지로서 샘에서 솟는 차가운 물의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옛날에 義賊 임걸(林傑)의 본거지였다 하여 임걸령이라 불린다고 한다. 義賊의 물로 만든 녹차는 더욱 일품이다. 녹차 한 잔을 네 명이 돌려가며 마신 후 왼쪽 아래로 이어지는 유명한 피아골의 계곡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하늘이 갑자기 흐려온다. 다행히 아직 비는 오지 않지만 언제 쏟아질지 몰라 불안하다.

  Uni12d40.gif노고단을 앞둔 마지막 오르막이 돼지령(돼지고원, 1,424m)이다. 그 이름이 참으로 기이하나 연유는 알 수가 없다. 대신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많이 피어 있어 산사나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단풍 또한 아름다워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이 한껏 운치를 뽑낸다. 문득 매 한 마리가 하늘을 맴돌아 시선을 끈다. 산이 높아서일까, 지리산에 와서 사흘 동안에 두 번째로 보는 새이다.
  그 새를 쫓아가던 눈길이 갑자기 멈춘다. 돌로 쌓은 제단이 보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들린다. 마침내 노고단이다.

  오후 4시 정각. 국립공원의 안쪽과 바깥쪽을 구별짓는 나무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넷이서 서로 얼싸안았다. 드디어 해낸 것이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감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구름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 구름이바로 지리산 10景의 하나인 老姑雲海가 아닐는지.(끝)  

Uni12d50.gif  (후기) 1. 노고단의 정상(1,507m)은 1991. 1. 1.부터 2002. 12. 31.까지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그 동안 사람들의 발길에 너무나 많이 훼손되어 그것을 복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오후 4시부터 5시까지는 출입증을 받아 제한된 통로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우리는 마침 운이 좋게도 오후 4시에 그곳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정상에 가볼 수 있었다. 天地神明의 도움이라고 생각하고 정상에 쌓아놓은 돌제단에 엎드려 큰 절을 했다.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와 國泰民安을 빌면서...   
    
  2. 노고단에서 성삼재까지 2.5km의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와 숲속으로 난 오솔길의 두 가지가 있다. 어느 쪽이나 1시간 정도 걸린다. 오솔길은 언뜻 보니 바위길인지라 신작로를 택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이라 평평한 신작로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성삼재에서 차에 오르는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 중에 그 동안 덕을 쌓은 사람이 있나보다. 누굴까.  

  3.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는 도대체 몇 Km일까. 짧게는 20km에서 길게는 45km까지 지도마다 틀리고 안내책자마다 다르다. 조선일보사에서 월간 ‘山’의 별책부록으로 펴낸 ‘전국 산악국립공원 16곳 가이드’(2001년판)에 의하면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분소에서 1999년에 줄자로 잰 결과 34.2km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분소에서 장터목산장, 세석산장, 벽소령산장에 세워놓은 안내판의 거리표시를 적어왔다. 이 글에서 밝힌 거리들은  바로 그 안내판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그 거리를 다 더하면 25.5km이다.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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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번 산행에 도움을 주신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분소와 남원지청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