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물따라 길따라(내린천,운두령,허브나라)

2010.02.16 11:35

貴陀道士 조회 수:10281

 


             산따라 물따라 길따라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 그 산을 넘게 해 주는 것이 고개요, 그 물을 건너게 해 주는 것이 나루이다. 그 고개, 그 나루가 있기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발길 닿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길을 떠난다. 비록 무릎 수술을 하고 한 동안 병원 신세를 질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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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가철이 끝나 가는 지난 8월 13일, 강원도의 오지(奧地)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1차 목적지는 내린천.  내린천은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홍천군 내면→ 인제군 상남면→인제군 기린면을 거쳐 인제읍 合江里에서 북쪽의 서화천과 만나 미륵천을 이루어 소양호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내면의 '內'와 기린면의 '麟'을 따서 內麟川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하는 이 강은, 태백산맥의 깊은 산 속을 이리 꼬불 저리 꼬불 흐르다 보니 그만큼 사람들의 접근이 힘든 탓인가, 1급수를 자랑하여 열목어, 산천어 등 깨끗한 물에서만 자라는 물고기들의 천국이다.  

   사법연수원을 28기로 졸업한 후 원통에서 군법무관으로 근무하는 조병구 중위가 예약하여 둔 合江里의 노루목산장(0365-461-1966)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우리 식구(凡衣, 한울, 거북이, 말썽이)는 입이 벌어졌다. 경관이 너무나 수려했고, 강가에 붙여 통나무로 지은 산장이 또한 아주 그럴싸하였기 때문이다.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흐르는 내린천의 물은 보기만 해도 서울 나그네의 묵은 때를 씻겨 주는 듯하였다.


   짐을 풀고 잠시 쉬다가 방동약수로 향했다. 인제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南下하다 보면 우리나라 奧地의 대명사인 현리(정확히는 인제군 기린면 현리이다. 경기도 가평의 현리가 아님)가 나오고, 현리를 벗어나는 지점에 위치한 방대교에서 좌회전하여 475번 지방도로 방대천을 따라 양양 쪽으로 7.5km 가면 방동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 다다르면 방태산 휴양림과 함께 방동약수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인제에서 자동차로 대략 50분 정도의 거리이다.  

   내린천과 방태산(해발 1,444m)은 홍천군 내면 일대의 삼둔(달둔, 월둔, 살둔) 사가리(아침가리, 적가리, 명지가리, 연가리)와 더불어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處女地로 칭송을 받는 곳이다. 아침가리는 방동약수에서 그리 멀지 않다.  

   철분과 탄산이 함유되어 있는 방동약수는 300여 년 전 심마니에 의하여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워낙 깊은 산중에 자리한 탓으로 찾는 이가 적지만, 물맛은 오색약수보다 더 낫다. 그 물로 세수한 말썽이의 얼굴에서 이튿날 여드름이 쑥 들어가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찌든 공기 썩은 물로 쇠락해진 뱃속을 藥水로 씻어낸 후, 저녁식사를 위해 '점봉산쉼터'라는 음식점으로 갔다. 31번 국도에서 한계령으로 넘어가는 451번 지방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음식점에서는, 점봉산 터줏대감인 주인이 점봉산(해발 1,424m)에서 채취한 산나물과 약초로 산채정식을 만들어 내놓는다. 값은 1인분에 1만원.  

   수안보 영화식당의 산채정식을 연상케 하는데, 약초의 생잎으로 싸먹는 쌈의 독특한 향이 특히 일품이다. 여기에 역시 주인이 직접 만든 솔잎주를 반주로 곁들이면 錦上添花이다. 점봉산에서 채취한 솔잎을 1년간 발효시켜 만든다고 하는데, 그 향기에 취하면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게 된다. 더구나 소주 등 술을 붓는 것이 아니라 솔잎 자체만으로 발효시켜 알콜 성분이 극히 미미한지라, 나와 같은 맹물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조병구 중위와 더불어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하다 보니 순식간에 한 동이를 비웠다. 조중위의 검게 탄 얼굴에는 어느 새 정식 법조인(Volljurist)의 관록이 붙어간다. 연수원 시절에야 사제지간(師弟之間)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아'(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그 아니 즐거울쏜가)일 따름이다.  

   밤하늘의 별들이 술잔 속으로 떨어진다. 그 별들을 하나, 둘 헤아리며 산장으로 돌아와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넓직한 홀 전체를 온통 골동품으로 장식한 것이 눈길을 끈다. 조병구 중위가 인제 장터에서 사온 옥수수자루를 통째로 넘겨주고 쩌 달라고 했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선선히 응한다. 시골 인심이 좋긴 좋다.  
   주인네 식구들과 카페의 베란다에서 별구경을 하던 다른 투숙객들을 모두 불러 모아 강원도 찰옥수수 잔치를 벌였다.  

   밤이 점점 깊어간다. 서울은 熱帶夜로 고생하지만 이 곳은 뽀송뽀송한 이불 없이는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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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4일 아침, 노루목 산장의 주인 아주머니가 끓여준 라면으로 아침식사를 하였다. 거북이나 말썽이 모두 라면이라면 사족을 못 쓰기 때문에 산 속에서의 아침식사로는 제격이다.
   본래 산장에서 식사를 제공하였으나, 얼마 전 주방장이 그만 두는 바람에 지금은 투숙객들이 알아서 식사를 해결하여야 한다. 생각 끝에 인제읍에 가서 라면을 사왔고, 그것을 주인 아주머니가 끓여준 것이다. 맛있게 익은 열무김치를 곁들여서.  

   식사 후 카페의 베란다에 있는 통나무의자에 앉아 한 동안 주변 경관을 감상하며 명상에 잠긴다. 강가에는 벌써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이 보인다. 그러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가로움을 즐기는 편이 훨씬 좋다. 그렇게 며칠 쉬고 싶은 생각이 절로 인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전 9시 30분, 조중위가 예약하여 놓은 급류타기(rafting) 하는 나루터로 이동하였다. 지난 일요일에 26세 된 청년이 이 곳에서 익사하였다는 뉴스가 신문, 방송을 장식한지라 은근히 겁이 났다. 그래서 집사람은 빠지고 아이들하고 나만 타기로 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간단한 교육을 받은 후 12인승 보트를 끌고 내린천으로 들어섰다. 탑승인원은 부산에서 온 연인 한 쌍과 가이드를 포함해서 모두 6명이다. 오전 시간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보트가 출발하면서 가이드가 코스를 설명해준다. 출발지(제스트캠프장 나루)로부터 도착지(밤골쉼터 나루)까지는 7km 정도, 약 3시간이 걸린다. 물길은 대개 평탄한데, 장수터, 전적비 지점, 피아시의 세 곳은 낙차가 크고 급류이므로 조심해야 한단다.  

   출발 후 20분 쯤 지나 수심이 깊어지고(3-4m) 물살이 완만한 곳에 도착하자, 가이드가 모두 보트에서 내리라고 한다.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탄 나로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그러나 이내 안심이다. 급류에서 보트가 뒤집힐 경우를 대비하여 안전지대에서 30분 동안 물에 대한 적응훈련을 미리 하는 것이다. 물 위에 누우니 구명조끼 덕에 둥둥 떠다닌다. 물에 누워 바라보는 兩岸의 풍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李太白의 표현을 빌려볼거나.

   五臺發源內麟開(오대발원내린개)
   碧水北流至此廻(벽수북류지차회) 
   兩岸靑山相對出(양안청산상대출)
   孤舟一片天邊來(고주일편천변래)

 

    오대산에서 발원한 내린천이 열리니

    푸른 물이 북으로 흐르다 여기서 돌아든다

    양쪽 언덕에는 푸른 산이 마주보고 솟았고

    한 조각 외로운 배가 하늘가에서 내려오누나  

 

   드디어 첫 번째 급류지역인 장수터(人傑은 간 데 없고 이름만 남은 곳이다). 흰 물보라를 일으키며 급히 흐르는 물살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보트가 격랑에 요동을 친다. 가이드가 외치는 대로 노를 젓기도 하고 보트에 매달리기도 하며 물살과 씨름한 끝에 무사히 통과했다. 손에서는 식은땀이 나지만, 그래도 밖에서 볼 때보다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덜 든다.  

   다시 평탄지대를 지나 두 번째 급류지역인 전적비 지점(인근에 6.25 때의 전적비가 있다)에 닿았다. 첫 번째보다 낙차가 크고 물살도 빠르다. 지난 일요일에 사망사고가 발생한 바로 그 곳이다.
   아연 긴장하여 노를 젓다가 가이드의 신호에 따라 보트의 줄을 꼭 잡았다. 보트가 심하게 요동칠 때는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보트 안에 설치된 줄을 꼭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밖으로 튕겨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말썽이가 튕겨 나갈 뻔했다. 그래도 말썽이는 위험한 것은 생각도 않고 깔깔대기만 한다.  

   전적비 지점을 무사히 통과하니 다시 수심이 깊어지고(5m) 물길이 완만하다. 휴식을 겸해서 보트에서 벗어나 물 속으로 들어갔다. 깊은 강 한복판에 들어 누워도 무섭다는 생각은커녕 최고의 피서를 한다는 즐거움이 앞선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름하여 一切唯心造!  

   마지막 급류지역인 피아시. 낙차가 더 커지고 물살은 더욱 빨라지는데 이미 두 곳이나 무사통과해서인지 긴장감은 덜 하다. 보트가 곤두박질치듯 툭 떨어졌다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린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더 좋아한다. 물가에서 집사람이 사진을 찍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급류지역을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물살은 다시 잠잠해지고 수중에 우뚝 솟은 바위에 사람들이 올라가 있는 것이 보인다. 이름하여 다이빙바위이다. 그 위에서 구명조끼를 입은 채 뛰어내린다.  

   급류타기를 하고 나면 낚시를 하기로 본래 계획했었는데, 재미를 들인 아이들이 낚시 대신 급류타기를 한 번 더 하자고 조른다. 처음에 겁을 냈던 집사람도 이번엔 같이 탔다.
   가이드 말이 하루에 연속으로 두 번 하는 사람들은 처음 본다고 한다. 덕분에 요금을 할인받았다. 집사람 역시 너무 재미있다며 내년에 또 오자고 한다. 급류타기가 졸지에 여름철 우리 가족의 피서방법으로 자리 잡을 판이다.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River Wild'라는 영화는 급류타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물론 내린천의 급류가 위 영화 속의 스네이크강의 그것만큼은 안 되지만, 그래도 스릴을 만끽하기에는 충분하다.  
   우리나라에서 급류타기 하는 장소로는 처음에는 한탄강이 유명했다. 그 후 영월의 동강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 곳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렸는데, 재미는 내린천이 제일 낫다고 한다. 한탄강은 수량이 풍부하지 못하고, 동강은 코스가 너무 길어 지루한 반면, 내린천은 수량도 풍부하고 코스도 적당하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한탄강의 급류타기 이벤트 업체들이 올해는 대부분 내린천으로 옮겼다고 한다.  

   우리 가족이 이용한 제스트팀(0365-462-8226)은 내린천에서만 7년째 하고 있어서인지 가이드가 아주 노련했다. 내린천의 급류타기는 10월까지 가능하며 요금은 1인당 2만원∼2만5천원(보험료 포함)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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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류타기를 마친 후 다음 목적지인 장평(행정구역으로는 용평)으로 향했다. 인제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계속 南下하면 속사에서 영동고속도로를 만나게 되는데 거기서 장평은 지척이다.  

   31번 국도를 따라 남하하는 이 길은 워낙 奧地에서 奧地로 이어지는지라 운두령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는 휴대폰도 안 터진다. 그처럼 외부와 단절된 만큼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실컷 즐길 수 있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아 호젓한 드라이브를 원한다면 한 번 쯤 달려볼 만한 길이다.
   그러나 '사람은 길을 잃고 길은 사람을 잃는다'던가, 깊은 산 속에 홀로 갇힌 듯한 외로움이 뒤따른다.  

白雲深處行人絶(백운심처행인절)
山中山下唯我存(산중산하유아존)


흰 구름 피어 나는 깊은 곳엔 인적이 끊어졌고  
산의 위아래에는 오직 나 혼자 뿐이구나  

 

이니 그럴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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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도 머리를 조아리는 고개, 雲頭嶺은 계방산(해발 1,577m)의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재인데, 양옆의 원시림으로 덮여 마치 나무터널을 연상케 하는 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며 석양빛에 물든 山河가 발 아래 펼쳐진다. 그 아름다움을 어찌 筆舌로 다 표현하랴.  

   계방산이 남한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인지라 자연히 고갯길도 높고(해발 1,089m) 험하지만, 한계령이나 대관령만큼 굽이가 많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운전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그래도 몇 년 전 겨울에 눈 덮인 이 고개를 넘다가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차가 180도 회전하는 바람에 아찔했던 기억이 새롭다.  

   운두령을 남쪽으로 다 내려오면 왼쪽에 그 유명한 이승복 어린이를 기리는 기념관이 나온다. 과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소리치고 학살당하였는지, 아니면 어느 신문기자의 창작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아이들에게 훌륭한 반공교육장으로 쓰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잘 꾸며 놓았다.
   멀지 않은 곳에 '감자꽃 필무렵'이라는 찻집이 있는데, 자연의 나무와 돌로 장식한 실내가 운치를 돋우며 길손을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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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평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8월 15일, 李孝石의 고장 봉평을 지나 흥정리 계곡으로 향했다. 봉평에서 보광피닉스 쪽으로 20여분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오고 그 곳에서부터 계곡이 시작된다.  02.jpg

 

   이 곳은 물놀이를 하는 유원지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허브나라'라는 정원이 있어 더 유명하다. 깊은 계곡의 한 옆에 터를 닦아 양박하(spearmint), 百里香(thyme) 등 각종 향료식물(herb)들을 심어 놓은 곳이다. 경기도 가평의 축령산 기슭에 있는 '아침고요수목원'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다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온갖 허브향이 어우러져 짧지 않은 旅程의 피로를 잊게 한다. 예쁘장하게 지은 통나무집 음식점에서는 허브를 넣은 인절미를 파는데(한 접시 5,000원) 그 맛이 또한 일품이다.  

   허브나라에는 이름에 걸맞게 나무로 지은 알프스풍의 산장이 몇 채 있어 숙박도 가능하다. 값을 물어보니 크기에 따라 1泊에 6만원-24만원이란다. 두메산골의 산장치고는 꽤 비싼 편이지만, 언제고 꼭 다시 와서 하룻밤을 묵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새벽에 눈을 떠 창문을 열었을 때 코끝을 스치는 허브향기에 한껏 취할 수 있으리라. 아니 그 새벽향기로 인하여 눈을 뜰지도 모르리라.  
   박신양과 최진실이 주연한 영화 '편지'의 무대가 되고 나서 '아침고요수목원'(영화에서보다 실제 풍경이 훨씬 더 아름답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듯이, 이 곳 '허브나라'도 어느 영화에고 등장하는 순간 서울 사람들로 복작거리겠지....

   산따라 물따라 길따라 나선 이번 여행길도 서서히 막을 내린다. 귀경길에 봉평에 다시 들러 '봉평막국수집'에서 순메밀로 만든 부침과 막국수로 배를 채우는 일만 남았다. 속초에서 가을에 열리는 관광엑스포 덕분에 봉평의 길도 눈에 띄게 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可山선생의 묘는 경기도 파주 땅으로 옮겨졌으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