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그것 참... (대둔산)

2010.02.16 11:41

범의거사 조회 수:11047



                       허, 그것 참...

 


   용산구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1년도 안 되어 치른 네 번째의 선거(시,구의원 보궐선거)를 마친 다음 날인 2000. 10. 27.(금) 밤 7시, 대둔산행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선거관리위원의 자리가 본래 내 고장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봉사직이라고는 하지만, 한 해에 네 번씩이나 선거를 치르려니 그 때마다 번번이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선거관리위원들 대하기가 미안하기만 하던 차에, 선거 끝나면 단풍 구경이라도 가자고 以心傳心으로 의견이 모아져 진작부터 계획했던 산행이다. 술을 입에 대지 않는 탓에 그 동안 선거관리위원들과 보다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터라, 기꺼이 토요일 하루 휴가를 내고 산행에 나섰다. 더구나 목적지가 평소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대둔산이었기에.


   대둔산(大芚山),


  일찍부터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이 산은 높이가 해발 878m로,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충청남도의 논산시(西)와 금산군(東), 남쪽으로는 전라북도의 완주군에 걸쳐 있는데, 산의 남동쪽, 즉 완주 쪽에 온천장을 비롯한 대규모 숙박단지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주요 등산로도 여기에서 시작된다(전라북도 도립공원).

   북쪽 멀지 않은 곳에 계룡산이라는 名山을 관내에 두고 있는 충청남도로서는, 아무래도 전라북도만큼 이 산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고 상황도 아니리라. 이와 관련하여 대둔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전하는 글이 있다.


   "ㆍㆍㆍ대둔산의 바른 이름은 순수한 우리말인 '한듬산'이다. ㆍㆍㆍ벌곡, 가야곡 등 일부 논산 사람들은, 그 쪽에서 보는 한듬산의 모습이 계룡산과 비슷하지만, 산태극 수태극의 명당자리를 계룡산에 빼앗긴 것이 한이 되어 '한이 든산'의 뜻으로 한듬산이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한듬산의 한을 크다는 대(大)로 하고, 듬은 그 소리만을 비슷하게 둔(芚), 혹은 둔(屯)으로 해서 대둔산이 된 것이다"(http://taedunsan.co.kr/기원. htm)  

 

    집집마다 '전주식당'이라고 이름 붙인 식당가의 한 음식점에서 '전주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산행길에 올랐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니 8시 40분.  
  그런데 이 산행은 산행이라기보다는 유람에 가깝다는 것을 이내 깨달아야 했다. 대둔산광광호텔을 옆으로 끼고 난 길을 따라 100여 미터 갔을까, 도립공원의 매표소에서 漢陽의 객들을 맞이한 것은 입장권과 함께 파는 케이블카 탑승권이었으니....
  편도 2,500원(왕복 3,900원) 짜리 탑승권 한 장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불과 5분만에 가을 등산객을 해발 680m 지점에 올려놓은 것이다(경사 27도, 총연장 927m이다).
  허, 그것 참, 최고 높이가 878m에 불과한 산에 케이블카라니... 북한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는 발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겠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이내 대둔산의 자랑거리인 출렁다리(금강구름다리)가 나온다. 해발 700m 가까운 곳에 까마득한 계곡을 가로질러 설치된 현수교 형태의 이 출렁다리(길이 50m, 지상에서 81m 높이)는 심장이 약한 사람은 건너기가 쉽지 않다.


  그런 심장 약한 사람의 가슴을 더욱 조이게 하는 것이 바로 다리 양끝의 모습이다. 그 곳의 손잡이 쇠파이프가 절단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쇠줄에 다리가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그 다리 위로 사람들이 건너가는 것이다. 그것도 단풍철에는 줄을 서서.
  절단된 쇠파이프를 보고 초기에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서인지 친절하게도 쇠파이프를 절단하여 놓은 이유를 써 붙여 놓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충격을 흡수하기 위하여 일부러 그런 것이며, 안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안심하란다.

   아직은 이른 시각인지 건너는 사람이 별로 없어 다행이라는 극히 소시민적인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내디딘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출렁이는 이 다리의 중간쯤에 도달할 무렵, 하필이면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미국영화 '클리프행어'의 도입부가 생각날 것은 무어람. 이 다리가 끊어지고 저 아래로 떨어진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억지로 용기를 내어 발 아래로 눈길을 돌리니, 깊은 계곡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어서 오라고 유혹하는 듯하다. 이쯤 되면 계곡의 단풍은 눈에 안 들어온다.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릴 뿐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마침내 반대편 立石臺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흐유∼!"

   재미있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사실 대둔산의 정상으로 가기 위하여 이 출렁다리를 꼭 건너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옆으로 등산로가 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상에서 내려 올 때는 그 등산로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슴을 졸이며 이 출렁다리를 줄서서 찾는다. 스트레스가 생명 단축의 큰 원인이라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남들이 가니까? 대둔산까지 갔다가 名物인 이 출렁다리를 건너지 않았다고 하면 웃음거리가 될까봐? 생활이 단조로울수록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아둔한 머리로는 답을 모르겠다. 아무튼 나 자신 또한 이 출렁다리를 놔두고 그 옆의 등산로로 올라간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 이유를 꼬집어 설명할 길이 없다.


   출렁다리를 통과하면 비로소 등산로다운 등산로가 나타난다. 이제부터는 주위의 단풍에 눈을 돌릴 수 있다. 올해에는 초가을에 일교차가 심하였기 때문에 예년에 비하여 단풍이 더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말대로이다. 그야말로 滿山紅葉이다. 거기에 도처의 奇岩怪石이 더해지니 錦上添花이다.

   워낙 바위산인지라 물이 귀한 대둔산에 약수가 나온다 하여 정자까지 세워져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 옛날 麗末鮮初에 나라를 잃은 고려 재상이 딸 셋을 데리고 이 산에 숨었는데, 나라를 잃은 한으로 딸 셋이 흘린 눈물이 藥水井의 샘물이 되었고, 그 딸 셋은 뒤에 바위로 변해서 三仙岩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그런데 등산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작 약수가 아니라 산더미 같은 쓰레기들이다. 바위틈에 자리 잡은 약수터에는 가을 가뭄이 심하여 약수가 말랐다는 안내문이 휑하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약수터에는 약수가 없다! 진짜 약수는 十年大旱에도 안 마르는 것 아닌가?



   꿩 대신 닭이라고, 藥水 대신 페트병의 生水로 목을 축이고 다시 정상으로 향하는데, 마지막 장애물이자 대둔산의 또 하나의 명물인 공포의 철계단(삼선구름다리)이 등산객을 맞는다. 三仙岩에 설치된 이 철계단은 그 계단의 숫자가 무려 127개나 된다(총길이 36m). 처음부터 끝까지 바위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은 공중에 떠 있어 흔들거린다. 게다가 경사가 매우 급하고(51도) 폭이 좁아, 이 계단은 올라가기만 할 뿐 내려오지는 못하는 일방통행로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서 허리를 폈다가는 '아차' 하는 순간 뒤로 자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적어도 그렇게 느껴진다), 여간한 강심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상하좌우의 경치를 바라볼 엄두를 못 낸다. 몸을 앞으로 숙여 눈앞의 계단만 바라보고 그 숫자를 세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것만이 그나마 추락의 공포(?)를 더는 방법이다.

   출렁다리와 마찬가지로 그 옆으로 등산로가 나 있지만, 오늘도 사람들은 공포에 떨면서도 굳이 이 철계단을 오른다. 우리 일행 중 두 사람은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여기서 더 이상의 등산을 포기하고 돌아섰지만.

 

   철계단을 지나면 이번엔 돌계단이 기다린다. 그러나 돌계단은 어느 산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다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시야가 넓어진다. 主능선의 정상삼거리에 다다른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용문골이 나오고, 왼쪽으로 100m를 가면 頂上이라는 이정표가 반기는데, 정상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 거리 표시가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정상이 바로 코앞이라 아무리 보아도 기껏 2-30m 정도밖에 안 될 텐데 100m라니....  


   878m의 대둔산 정상,


   이 정상을 마천대라고 부른다. 하늘을 마주보는 곳인가 했더니, 摩天臺라고 표기한단다. 그러면 하늘을 문지르고 쓰다듬는 곳이란 말인가. 하늘을 마주보든 쓰다듬든 오십보백보이다. 요컨대 그만큼 높다는 뜻이 담겨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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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산, 금산, 완주의 3개 市,郡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마천대에는 놀랍게도 높이가 15m나 되는 거대한 뾰족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정작 정상을 알리는 木製 푯말은 그 발치 아래에 좀 떨어져 초라하게 서 있다. 1972년에 세워졌다는, 그야말로 발상이 놀라운 이 탑은 그 몸뚱이 중앙에 "開拓塔"이라는 큼지막한 명찰을 달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개척하였다는 것일까? 1972년에 처음 이 산을 정복하였다는 것인가? 케이블카, 출렁다리, 철계단을 그 때 처음 '개척정신'으로 만들었다는 것인가? 1972년이면 유신독재가 시작되던 해이다. 설마 그것과는 상관이 없겠지...

 

   저 아래 남쪽으로는 기암괴석이, 북쪽으로는 숲과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이 강산의 가을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그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바로 이 곳에는 천하에 둘도 없을 흉물이 버티고 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대둔산의 그 멋진 경치를 이 흉물이 한 마디로 다 버려 놓고 있다. 산의 정상을 넓직하게 깎아 평지로 만들고 거기에 헬리콥터가 이착륙할 수 있게 해놓은 백암산(울진)의 모습이 겹쳐져 우울하기 짝이 없다. 참으로 일맥상통하는 氣象이 아닐 수 없다.

 

   "허, 그것 참...."


   혀를 차며 입맛을 다시던 이 때의 시각이 아침 9시40분. 등산, 아니 유람을 시작한지 1시간만의 일이다. 下山길은 철계단도 출렁다리도 다 옆으로 비껴나고 돌길로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이어진다.

 

   전국토의 온천화가 대둔산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덕택(?)에 대둔산관광호텔(063-263-1260)의 온천탕에서 몸을 녹인 후 완주군 화산면으로 향했다. 23년간 참붕어찜만 전문으로 해온 식당을 찾아서....
  대둔산에서 17번 국도를 따라 전주 방면으로 南下하다가 643번 지방도를 만나 논산 쪽으로 가다 보면 이 식당을 만나게 된다. 이름하여 '화산식당'(063-263-5109). 이 곳에서 하루 소모되는 붕어가 많을 때는 2,000여 마리 정도 된단다. 1인분에 두 마리로 값은 9,000원이다. 10월부터는 경기도 광주에 분점을 차렸다나.

   그 많은 붕어를 어디에서 가져 오냐니까 주인이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혹시 上海에서 온 것 아니냐고 넘겨짚으니까,
  "상해가 워딘디유?"
하고 웃으며 되묻는다. 쯧, 독심술을 배우지 않았으니 그 웃음의 의미를 어찌 알랴.

 

   전국토의 온천화, 전국토의 가든(음식점)화, 그 다음은? 전국토의 러브호텔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차에 올라 잠을 청한다. 음냐, 음냐.... (2000.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