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川依舊란 말...(청계산)

2010.02.16 11:42

범의거사 조회 수:6781

 


                     옛 詩人의 虛辭로고  
 


  기나긴 동면에서 마침내 깨어났다. 지난 해 10월 대둔산 산행을 한 후로 5개월이 지나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아니 세기가 바뀌었다. 그 동안 무엇을 했던가.  
  평창의 스키장(용평, 성우)을 몇 번 찾았던 것 외에는 산도, 길도 외면한 나날이었다. 연말이라고 공연히 들떠 지냈고, 연초부터는 혹시 있을지 모를 인사이동에 대비하느라 괜히 분주하면서도 산만한 日常이었다. 거기에 어머니의 교통사고까지 겹치고....


   재판부가 새롭게 구성된 데다 신모델의 심리방식이 도입되는 바람에, 이래저래 업무에 쫓기느라 바깥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르던 4월 초의 일이다. 구내식당 일변도의 점심 식사에서 모처럼 벗어나 사법연수원 위쪽에 있는 식당가로 발길을 잡던 중, 법원 후생관 주위의 화사한 꽃들과 막 연두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하는 나뭇잎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런, 봄이네!"  

  그렇다. 3월말까지 春雪이 亂紛紛하더니 어느 새 천지가 봄기운으로 뒤덮였는데 그런 변화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心不在焉이니 視而不見이런가. 마음이 따르지 않으니 보아도 보이지 않았구나. 내가 사는 여의도에도 벚꽃이 흐드러졌을 것을...  
   그 꽃, 그 나무들을 보며 이제는 다시 길을 나서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산 따라, 길 따라.

 

    2001. 4. 22.


   화창한 일요일이다. 21세기 들어 첫 산행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淸溪山. 동반자는 30년 지기인 泰俊과 完英이다. 1971년 3월 景福고등학교 1학년 2반에서 처음 만난 후 만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친구끼리는 미안하다는 말 안 하는 기다"로 대변되는 우정을 그린 영화 "친구"가 지금 전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쉬리"(1999)와 "공동경비구역JSA"(2000)에 이어 3년째 헐리우드 영화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한국영화이다. 비록 영화 속의 무대는 부산이고, 우리가 함께 학교를 다닌 곳은 서울이지만, 영화에서처럼 검정 교복을 입고 뒹굴던 그 시절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01.jpg

 

   서울 강남의 허파인 청계산(해발 618m), 그 산 원터골 입구에는 요새 한참 話頭로 등장한 화장터 건설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어지럽게 걸려 있다. 전국토의 묘지화를 막기 위해서는 화장터의 건설이 필수적이고, 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다만, 문제는 장소이다.  

  유럽의 큰 도시에는 시내 한 복판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시민들이 휴식공간으로 즐겨 찾고 있지만(1987년부터 1년간 독일에 법관 연수를 하러 갔을 때 함부르크, 빈, 런던 등지의 시내 한 복판에서 이런 묘지를 보고 받았던 충격이 새롭다), 우리의 정서와는 아무래도 아직 안 맞는 것 같다. 비록 서울에서 다소 떨어진 곳일지라도, 그래서 비용이 더 든다 하더라도, 인적이 드문 곳을 찾는 것이 순리가 아닐는지.... 서울 근교의 그 많은 공원묘지들을 고려하여 그런 곳에 화장터와 납골당을 동시에 세우면 어떨까. 비전문가인 나로서는 거기까지밖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오늘의 등산코스는 옛골로 잡았다. 몇 년 전부터 내가 청계산을 찾을 때면 의례히 찾는 코스이다. 『옛골→이수봉→망경대→마왕굴→혈읍재→옛골』의 이 원점회귀형 路程은 서울 쪽에서 청계산을 오를 경우에 내가 아는 한 가장 환상적인 산행길이다.

   청계산은 원터골에서 매봉으로 오르는 코스가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길은 주말에는 앞사람의 엉덩이만 보면서 올라가야 한다. 그에 비하여 옛골코스는 주말에도 한산하다. 넉넉잡고 3시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어, 운동량도 적당하다.

   그뿐만 아니라 망경대까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푹신한 흙길이어서 발을 통해 전해지는 대지의 촉감이 부드럽기 그지없고, 망경대에서 마왕굴을 거쳐 혈읍재까지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되풀이되어 자칫 단조로울 뻔한 旅程에 변화를 준다. 더구나 곳곳에 역사의 발자취가 스며 있어 조상들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 연산군의 폭정이 거듭되던 시절, 김종직의 제자인 정여창이 이 곳으로 피신하여 몸을 숨김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하여 붙여진 二壽峰(해발 545m),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넘은 고개라 하여 붙여진 血泣재, 그리고 위 등산코스에서는 옆으로 벗어나 있지만 이수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國思峰(해발 540m. 고려 말 조윤, 이색 등이 이 곳에 올라 기울어 가는 나라를 걱정했다는 곳이다) 등이 등산객을 반긴다.  

  거기에 望景臺에 서면 전후좌우로 4개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서울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과천, 성남(분당), 안양(평촌)도 손에 잡힐 듯하다. 望景臺의 뜻이 바로 '경치를 바라보는 곳'이라는 의미이니, 말 그대로 이름 값을 하는 것이다(망경대는 고려가 망한 후 조윤이 움막을 짓고 개성을 바라보며 지낸 곳이라고도 한다).


   이 코스를 처음 와보는 完英이에게 산행코스에 관한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사이에 이수봉에 도착했다. 그런데 지난 가을에 왔을 때만 해도 없었던 새로운 조형물이 객을 맞는다. 높이가 3-4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돌비석이 그곳이 이수봉임을 알리며 세워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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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이수봉에는 막거리와 음료수를 파는 상인 한 명만이 있었을 뿐인데, 느닷없이 웬 비석?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성남시 상적동 주민 일동"이라는 문구가 이 비석을 세운 이들을 짐작케 한다.
  바로 옆 10 여 미터 거리에 있는 봉우리(이 곳이 본래의 이수봉 아닐까?)에 지난 해 세워진 거대한 통신설비(중계탑?)로 인하여 청계산의 명물 이수봉이 사라졌다고 지난 가을에 애통해 하였던 것을 알았음인가, 여기 이수봉이 이렇게 건재하노라고 마치 시위하는 것만 같다. 이 비석을 세운 사람들은 과연 이 곳에 그런 대형 비석이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수봉을 지나 아직은 드문드문 그 자취가 남아 있는 진달래꽃을 구경하면서 조금 걷다 보면 과천 쪽으로 하산하는 길과 망경대쪽으로 가는 갈림길을 만나게 되고, 여기서 망경대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넓직한 공터를 지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곳에 망경대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는 평촌과 성남만이 간신히 보이는데도 말이다. 전에 없던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지?" 하는 궁금증은 본래의 망경대에 도착하자마자 풀렸다.  

   청계산에서 주변을 眺望하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 도리어 禍를 자초한 것일까, 망경대의 넓은 공간은 온통 美軍 시설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등산로에서 망경대로 아예 올라서지 못하도록 줄까지 처져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단골로 기념사진을 찍던 곳인데....(청계산의 主峰인 망경대의 정상은 군사시설로 아예 통제구역이고, 그 동안 망경대로 불리며 사랑을 받아왔던 곳은 정상에 못 오르게 하는 대신 그 밑에 공터를 만들어 주위 경관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접근금지구역이 된 것이다). 주변경관을 조망할 수 없게 된 이상 망경대는 더 이상 "望景臺"가 아니다. 그러니 꿩 대신 닭이라고, 앞서의 공터에다 망경대라는 푯말을 세운 것이리라.  
   어느 누가 山川이 依舊하다고 했던가. 정말로 옛 시인의 虛辭로다. 화장터 문제로 시달리기 전부터 이미 청계산은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망경대의 정상으로 못 오르는 대신 그 옆구리를 끼고 서쪽으로 바위길을 내려가면 마왕굴(魔王窟)이 나타난다. 이  곳은 청계산 주봉 아래 거석이 운집하여 석굴을 형성한데다가 맑은 샘이 있어 자연의 조화가 돋보인다.  
  이수봉이 서서 동동주 한 사발 들이키는 곳이라면 마왕굴은 앉아서 약수를 한 모금 마시는 곳이다. 옛골코스의 휴식공간이라는 이야기이다. 전에는 마왕굴의 유래를 알리는 글이 나무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눈에 띄지 않아 나그네를 아쉽게 한다. 저 굴에 숨어 살면서 저 샘물을 마셨던 마왕은 과연 누구였을까?

 

     마왕굴에서 잠시 쉬면서 배낭 속의 과일로 기력을 보충한 후 혈읍재로 향했다. 마왕굴에서 혈읍재까지는 청계산의 깔딱고개에 해당한다. 저 멀리 발치 아래로 과천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지만 그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별로 없는 것도 바로 이 곳이 깔딱고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자칫 뒷동산에 놀러 가는 것처럼 여겨질 청계산행을 등산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게 하는 곳이 바로 이 곳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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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쁜 숨을 몰아쉬다 마침내 혈읍재 꼭대기에 올라 한숨을 돌리고 고개를 서쪽으로 하면 관악산의 연주대(戀主臺)가 멀리서 손짓을 한다. 고려가 망한 후 그 遺臣들이 그 곳에 올라 개성 쪽을 바라보며 임금(主)을 그리워했다(戀) 하여 연주대라고 이름 지워진 곳이다. 그 연주대 밑에는 연주암이라는 암자(절)가 있는데 풍수지리상의 그 形局이 연소(燕巢-제비집)형에 해당한다. 설명을 기껏 하고 나니까, 完英이가 한 마디 한다

"야, 六堂(최남선의 호)하고 등산 온 것 같다. 높은 사람들이 비서실장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를 알 만하다"

   그러자 泰俊이가 덧붙이는 말,

"니네 둘, 같은 고등학교 다닌 것 맞니?"

   이에 질세라 내가,

"에라 이 망할 놈들아, 좀 배워라, 배워! 배워서 남 주냐?"  

  어떤 소리를 해도 웃어넘길 수 있는 게 바로 친구이다.

 

  혈읍재 정상에서 북쪽 능선을 타면 매봉(해발 583m)으로 연결되는데, 애써 외면하고 당초 예정대로 바로 옛골로 빠지는 쪽을 택하였다. 사람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웃고 떠들면서 걷다보니 어느 새 다시 옛골이다. 청계산을 오늘처럼 원점회귀형으로 올라갔다 오면 그 끝에 발길이 저절로 찾아드는 곳이 있다. 바로 이수봉산장이다. 옛골이라는 동네 이름에 걸맞게 옛날 시골 할머니들의 손때가 묻어나는 듯한 전통적인 순두부의 맛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리를 잡고 시계를 보니 어느 새 3시간이 흘렀음을 알겠다.  
  '길을 나섰을 때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라는 格言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2001.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