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말의 가능성

2023.11.25 23:27

우민거사 조회 수:155

   

   어영부영하다 보니 사흘 전에 소설(小雪)이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이름에 걸맞게 적게라도 눈이 왔으면 상기했으련만 그도 아니었으니, 나날이 시절 감각이 둔해져 가고 있는 촌노(村老)라 그만 절기의 흐름을 놓치고 만 것이다. 

 

    소설이라고 해봐야 한 해 24절기 중 하나에 불과한 날일 뿐 특별히 할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날이 지남을 몰랐다 해서 새삼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나,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서글픈 것이다.

    판소리 단가 사철가 중에 나오는 “세월아 가지 마라, 가는 세월을 어쩔거나”라는 대목이 새삼 가슴에 다가온다.

   

    그나저나 더웠다 추웠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에 이 옷을 입었다 저 옷을 입었다 해야 하는 둔자(鈍者)의 모습이 우습다. 아무리 인간이 자초한 것이라지만, 하느님도 너무하시지 무슨 날씨 변덕이 그리도 심한지 모르겠다. 하루 만에 기온이 10~15도를 오르내리면 도대체 촌노 같은 무지렁이는 어쩌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지난 주말에 김장을 담그기를 참으로 잘했다. 며느리들을 비롯한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집사람과 둘이 배추와 무(지난여름에 우거의 뒤뜰에 심어 농약과 화학비료 없이 퇴비로만 길렀다)를 뽑고 다듬어 배추김치, 깍두기, 총각김치를 담그려니 꽤나 힘이 들었다. 

    작업의 성질상 종일 찬물을 가까이해야 해서 찬 기운에 몸을 움츠렸었는데, 그렇게라도 했으니 망정이지 영하 5-6도의 날씨가 연일 이어지는 이번 주말로 미뤘으면 추위에 정말 고생했을 것이다(만일 다음 주까지 미뤘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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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에 수은주가 갑자기 영하 6도로 급강하하였는지라 겨울 내의를 아래위로 챙겨입고 길을 나섰지만, 탑골공원 옆 원각사 무료급식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만만치 않았다. 

    돌이켜보면 젊었을 때는 더운 여름보다 추운 겨울이 좋았는데, 지금은 그 반대이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한 게 장점이라지만,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시점이 되고 보니 겨울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본래 이기적인 인간은 처지에 따라 생각이 바뀌게 마련이다. 오죽하면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촌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겨울과 추위는 오게 마련이다. 그러니 춥다고 방안 아랫목에 움츠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탑골공원에서 추위에 떨며 몇 시간씩 무료급식을 기다리시는 노인분들을 생각하면 촌노가 추위를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사치이다. 

 

     원각사 무료급식소에서 오늘 메뉴로 준비한 소고기국밥이 추운 날씨에 딱 어울려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더 달라고 하시는 분들이 유독 많았다. 비록 한 끼에 지나지 않지만, 따뜻한 국밥으로 배를 불리고 잠시라도 추위를 녹이시는 모습이 보기 좋다. 덩달아 촌부도 추위를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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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전에 건강하게 보이던 분들이 점차 노쇠해지고 마침내는 안 보이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촌부 역시 언제까지 급식을 하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럴 때면 혼자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다. 

 

   “이 땅에 무료급식소가 필요 없는 날이 오게 하여 주소서.”   

 

     세월이 가지 말라는 기도가 효험이 있다면야 몇 만 번이라도 하겠지만, 그건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이니, 그 대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을지 모를 기도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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