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창에 기대어

정년퇴임사(이홍훈)

조회 수 19281 추천 수 0 2011.06.01 14:49:36

 

  이홍훈 대법관님이 2011. 5. 31. 65세 정년으로 퇴임하셨다. 한창 더 일하실 수 있는 나이에 정년을 맞이하는 바람에 대법관으로서 주어진 임기조차 다 채우지 못하고 퇴임하시는 것으로 보려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우리의 사법제도가 종신제 대신 임기제와 정년제를 택하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의 일에 대한 열정과 민주법치주의에 대한 신념을 더는 가까이서 접할 수 없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안타깝다.

  비록 경우에 따라 당신과 생각하는 바가 달라 견해가 충돌했던 때도 종종 있었지만, 당신의 그 겸허하신 자세에 감명을 받곤 했다. 이른바 '전관예우 금지법'의 적용을 받는 첫번째 대법관이 되셨지만, 퇴임 후에도 늘 건승하시길 빈다. 

 

  아래는 당신의 퇴임사이다.       

 

 

                             ******************************************

 

  

퇴   임   사


안녕하십니까? 친애하는 법원 가족 여러분들,

 

점점 분주한 일상 가운데,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 이렇게 뜻 깊은 시간을 마련해 주신 대법원장님과 동료 대법관님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 멀리서 오셔서 저에게는 마지막일 이 자리를 함께 해 주신 법원장님들, 법관 및 법원가족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하늘이 푸르고 녹음이 짙어만 가는 오월입니다.

일년 중 가장 생동감이 느껴지는 이 때에 제가 지금껏 지내온 길에 하나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은 저에게는 좀처럼 다가오기 힘든 현실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저에게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불러일으킵니다.

 

독자적인 근대 한국의 사법부가 시작한 이래로 이제 반세기를 조금 더 지나고 있습니다.

세계사의 장구한 흐름 속에서 소용돌이쳤던 입헌주의와 법치주의, 민주주의의 역사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는 반세기 동안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우연찮게도 이는 제가 살아온 시간들, 인생의 길이와 거의 같은 것입니다.

한 개인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한 법관으로서, 제가 살아온 과거의 시간들 속에서 그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젊은 날에 가졌던 패기와 아련한 아쉬움들, 쌓아진 시간의 높이만큼의 자긍심과 통찰력, 그러나 생생한 현실적 촉각과의 어쩔 수 없는 거리감, 그리고 현실에 대한 포용 그러나 나이만큼 늘어가는 세상에 대한 우려와 연민... 이러한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들이 새벽안개처럼 눈앞을 가립니다.

 

그 수많은 기억의 순간들 중에서 지금도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부족했다 할지라도, 그 어떤 한 인생이 던지는 절박한 호소 앞에서 법이 진정 추구하는 바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던 것이며, 또한 우리 사회의 굴곡진 역사과정의 한 가운데서 의미 있는 변화와 함께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쉬움이 남아 있다면 그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아두지 못했었고, 사회의 흐름을 큰 눈으로 굽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 법관으로서 다른 이들의 절박한 인생과 마주하고, 사회의 큰 변화의 정점에 서게 되는 것은 법관이라면 어쩌면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그 자리에 우리의 몫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정의’라고 부릅니다.

 

누군가가 그것이 진정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거기에 한 마디로 대답하는 것은 솔직히 곤란한 일일 것입니다. 누군가는 ‘법이 추구하는 최고의 이념’이라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삼라만상의 원리, 질서’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훌륭한 학자는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익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이는 정의의 개념은 ‘다원적인 것’이라고도 했고, 어떤 이는 ‘해체하는 것’이 곧 정의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사건 법정에서 법관들은 사회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서 사물이 있어야 할 이상적 상태로 환원해 줄 수 있는 정의를 선언하기를 요구받습니다. 그것은 솔직히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벅차고도 벅찬 일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제가 찾은 방법은 나를 비움으로써, 나 자신을 가볍게 함으로써, 사물과 우리 인생의 근본에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사회가 저 자신에 요구하는 것은 보다 더 가까이 다가왔고, 제가 그 사실을 잊게 될 때 그것은 멀어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마음 속에서 잊지 않기 위해 수십 년을 노력하여 오다 보니, 여기까지, 이 오월에까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법원을 떠나게 되면서도 사회가 저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하였습니다.

제가 이 오월에 여러분 앞을 떠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의미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다시 들길 위에 섰습니다.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납니다.

 “뼈에 저미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그 별은 저에게는 역사와 사회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은 이제 앞으로도 법원에서 계속 그 별을 볼 것이고, 저는 들길에서 그 별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별은 같은 별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푸르른 오월을 보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떠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정들었던 법원식구 여러분들, 참으로 그 동안의 보살핌과 격려와 이해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모두에게도 행복과 사랑이 가득하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녹음이 피는 오월,

                                                 법원을 떠나며,

                                                  법관 이 홍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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