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의거사

(김승주 주례사)

 

                                                  지척에 놓인 인연

                                                     

  봄이 온 줄 알고 겨울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오던 개구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이제는 누가 뭐래도 완연한 봄의 길목으로 접어든 3월의 화창한 주말입니다. 이처럼 좋은 시기에 이 자리에서 백년해로를 약속하는 신랑, 신부의 결혼을 먼저 진심으로 축하하고, 아울러 양쪽 집안의 어른들께도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혼식을 빛내 주기 위하여 주말의 귀한 시간을 내서 어려운 걸음을 하여 주신 내빈 여러분께, 신랑, 신부 및 양가의 婚主를 대신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인 신랑 김승주군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현재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에서 판사로 근무하고 있고, 신부 전혜원양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리랜서로 중국어를 통역하고 있는 훌륭한 인재들입니다.


   신랑 김승주군과 신부 전혜원양이 처음 만난 것은 작년 8월 2일이었습니다. 마침 그 날이 김승주군 아버님의 생신날이었습니다. 한 집안의 장남이면서도 불혹이 멀지 않은 나이가 되도록 혼자만의 삶을 즐기던 신랑 김승주군이, 뒤늦게나마 부모님께 효도해야겠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처음 마주한 미모의 중국어 통역사 아가씨, 늘씬한 키와 또렷하고 큰 눈망울을 지닌 신부 전혜원양한테 신랑 김승주군은 그만 첫눈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12년 전 사진 속의 미소년을 상상하며 약속장소에 나갔던 전혜원양의 눈에 비친 신랑 김승주군은 “아니 이럴 수가!” 사진 속의 남자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부 전혜원양의 그런 실망스런 기분은 마주 앉은 카페에서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이내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그날 밤 한 시간 동안의 전화통화와 이틀 뒤 신랑 김승주군의 생일에 이루어진 재회, 그리고 그 후의 주말마다 계속되는 만남 속에서 서서히 상대방에 대한 신뢰로 변하고, 마침내 사랑이 샘솟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이지 김승주군과 전혜연양은 신사중학교, 구정고등학교를 3년 차이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다닌 선후배 사이였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장남과 장녀로 사는 곳마저 한 동네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서로의 짝을 바로 옆에 두고도 그 사실을 모른 채 두 사람 모두 엉뚱한 곳을 헤매고 다녔던 것입니다.


  지구상의 인구가 60억 명 중 대략 반이 남자이고 반이 여자일 테니, 30억 남자 중의 한 명인 신랑 김승주군과 30억 여자 중의 한 명인 신부 전혜원양이 만나서 결합할 확률은 900억분의 1인 셈입니다. 그래서 부모 자식의 사이가 되려면 천 겁의 인연을 쌓아야 하는데, 남녀가 부부가 되려면 그보다 두 배인 이천 겁의 인연을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영겁의 세월을 두고 쌓은 인연의 끈이 바로 지척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개월이 갓 넘은 상태에서 오늘의 결혼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느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이제껏 외로 달려오던 두 물줄기가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흘러가니, 두 사람이 서로 맞잡은 손 안에서 향기 높은 꽃 한 송이를 피워내고, 기쁨의 노래를 드높이 부르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7개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그 동안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을 거쳐 봄이 왔습니다. 두 사람에게 있어 그 7개월은 남들의 7년에 버금가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신랑 김승주군은 머나먼 창원에서 판사로 근무하고, 신부 전혜원양은 서울에서 중국어 통역 업무에 종사하느라 바쁘다 보니 데이트를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매일 밤 한 두 시간씩 전화기를 붙들고 살아야 했습니다. 통신회사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고마운 고객이겠지만, 매달 몇 십만 원씩 나오는 그 전화비를 혹시 양가 부모님이 내 주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낮 없이 일하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비가 오나 눈가 오나 주말마다 창원에서 서울까지 천리길을 달려오는 김승주군, 통역과 번역에 바쁘면서도 이제나 저제나 김승주군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전혜원양, 두 사람한테 주말은 말 그대로 축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주중에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주말에 다 풀어야 하는 두 사람에게는 서울 근교의 드라이브길도, 에버랜드의 동물원도, 그리고 공포의 청룡열차도 모두 환희의 대상이었고, 늦은 밤 정종대폿집에 주고받는 정종 한 잔은 후일 상봉 言約酒였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찾은 부산의 해운대 모래사장은 그 위에 심장모양을 그려 사랑을 고백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밀어를 나누며 애정의 깊이를 더해 가는데, 야속한 시간은 왜 그리도 빨리 흐르는지,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두 사람은 다시 일주일 후를 기약하며 헤어져야 했으니... 서로서로 꼭 잡은 두 사람의 손은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판소리 춘향가 중 이도령과 춘향이가 오리정에서 이별하는 대목의 마지막 장면인 “둘이 서로 꼭 붙들고 떨어지지를 못 하는구나”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중국 유학 다녀오랴, 그리고 통번역대학원 다니랴 30대 초반이 다 지나도록 공부밖에 할 줄 모르던 여자, 신부 전혜원양에게 도대체 김승주군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내 아이의 엄마가 되어 평생 함께 살다가 내가 죽을 때 눈을 감겨 달라”는 정말로 멋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프로포즈를 받고도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대답이 뜻밖으로 간단하고 명쾌하였습니다. 김승주군의 착한 마음씨가 무엇보다 좋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신랑 김승주군을 사법연수원생시절부터 지금까지 보아 오면서 느낀 모습은 “착한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늘 소탈한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착한 어린이”입니다. 

  그러고 보면 신랑 김승주군한테서 그런 착한 모습을 발견하고, 거기에 반한 신부 전혜원양이야말로 진정으로 착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착함과 지혜로움을 갖추었기에 신부 전혜원양의 빼어난 미모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잘 생긴 남자를 만나면 결혼식 한 시간 동안의 행복이 보장되고, 착한 남자를 만나면 평생의 행복이 보장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예쁜 여자를 만나면 삼 년이 행복하고, 지혜로운 여자를 만나면 영원히 행복하다”고 합니다.


  내빈 여러분 어떻습니까, 착한 남자의 표상 김승주군과 지혜로운 여자의 상징 전혜원양이 오늘 부부로서 백년가약을 맺는 것이야말로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제 말씀에 동의하신다면 커다란 박수로 두 사람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듯 천생배필의 두 사람이기에, 어느 누구 못지않게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생활을 꾸려나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신랑 김승주군을 사법연수원에서 가르쳤던 훈장으로서, 그리고 오늘 이 자리의 주례를 맡아 두 사람으로부터 혼인서약을 받은 사람으로서, 신랑, 신부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두 사람은 서로서로 상대방을 공경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핑계로 상대방을 홀대하여서는 안 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랑할수록 상대방을 더욱 공경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때로는 상대방을 어려워할 줄 알아야 그 사랑이 오래오래 지속됩니다.

  남을 존경하여야 내가 존경받는다는 것은 부부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만고불변의 이치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혈육인 부자지간에도 1촌의 촌수가 있는 데 비하여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만큼 부부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뜻하지만, 역설적으로는 그만큼 먼 사이라는 뜻도 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 한 마디에 쉽게 상처받고, 말 한 마디에 쉽게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를 공경하고 고마워하라고 당부를 드립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은 서로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결혼생활은 수학공식을 푸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간에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셋이나 넷이 될 수 있고, 때로는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왜 그러냐고 그 이유를 캐려 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결혼생활은 법조문과 판례를 분석하거나 중국어의 문장을 분석하듯, 그렇게 따지고 캐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이기는 삶을 사려고 하지 마십시오. 너그럽게 져주는 삶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 서기 전까지 30여년의 세월을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는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연애할 때는 공통점만 보이다가 결혼 후에는 차이점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연애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차이점이 그 콩깍지가 벗겨진 결혼생활에서는 한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런 차이점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나냐고 따지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 대신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 번만 참으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다음의 시구(詩句)를 떠올리십시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당신만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생겨나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언제나 따뜻함으로 날 맞아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로 얼룩진 마음으로 다가가도

  기다렸다는 듯 당신의 따뜻함으로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김은미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중에서)

 

  그렇습니다. 서로의 가슴 속에 가득 채워져 있는 따뜻함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감싸십시오. 視而不見하고 聽而不問하십시오.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따지고 캐묻는 똑똑한 사람보다는, 너그럽게 포용하고 감싸는 현명한 사람이 되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셋째로, 두 사람 모두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기 바랍니다. 


  결혼은 일방통행도 아니고, 계약도 아닙니다. 결혼은 공통의 목표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합동행위입니다.  


  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자리에 서게 되기까지를 두 사람 인생의 첫째 단계라 한다면, 오늘 이 순간부터는 그 인생의 둘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지금부터는 남편이 있기에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기에 남편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서로의 共同善을 추구하는 그러한 삶이 펼쳐져야 합니다.


  두 사람은 이제 말 그대로 一心同體입니다. 너와 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옛말에 “꽃은 벌을 부르고 벌은 꽃향기를 좋아하니, 꽃과 벌은 서로 도우며 영원히 상생한다(花召群峰 蜂樂花香, 花峰相助 終古不變)”는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바로 이 꽃과 벌처럼 살기 바랍니다. 


  끝으로, 두 사람은 모두 일반인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전문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로부터 많은 은덕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애국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애국자라고 해서 거창한 게 아닙니다. 애국의 길, 알고 보면 참으로 쉽습니다. 아이를 최소한 둘 이상 낳으면 그게 바로 애국의 길입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거의 꼴찌에 이른 우리나라가 이 지구상에 계속 존립하기 위하여 이 땅의 신혼부부에게 꼭 요구되는 의무이자 덕목입니다. 애국의 길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울러 애국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건강하여야 하는데, 흡연은 한 마디로 건강의 적입니다. 신랑 김승주군은 이번 결혼을 계기로 그 동안 10년 넘게 피워 왔던 담배를 끊겠다고 한 약속을 이 자리에 계신 내빈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서약하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금연서약서를 큰 소리로 낭독)        


  이제 주례사를 마치면서 신랑, 신부에게 숙제를 내줄까 합니다. 1년 전에 돌아가신 법정스님은 언젠가 주례를 서시면서 신랑신부에게 한 달에 두 권의 산문집과 한 권의 시집을 사 볼 것을 숙제로 내주신 일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까지는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신랑신부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여행을 할 것을 숙제로 내주려고 합니다.

  두 사람만의 정기적인 여행은 두 사람에게 색다른 감흥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내준 이 숙제를 잘 하는지는 앞으로 두고두고 지켜보겠습니다.

  

  신랑, 신부의 착한 마음씨와 빛나는 슬기로, 두 사람의 앞날에 무한한 영광과 행복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내빈 여러분께 신랑, 신부를 대신하여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1. 3. 12.


                         주례    민 일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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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약 서


              저는 결혼 이후로부터 담배를 끊을 것을 서약합니다.


2011. 3. 12.


김 승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