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의거사

     (김은호 주례사)

 

                                                                 겨울 장갑

                                                         

  겨우 내내, 아니 겨울이 지나가고도 한참 동안 기승을 부리던 시베리아의 찬 공기도 멀리 물러가고, 이제는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꽃이 함께 어울려 자태를 한껏 뽐내는, 말 그대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의 계절이 찾아왔습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기에, 그야말로 만물이 생동하는 화창한 4월에 백년해로를 약속하는 신랑, 신부의 결혼을 먼저 진심으로 축하하고, 아울러 양쪽 집안의 어른들께도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혼식을 빛내 주기 위하여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걸음을 하여 주신 내빈 여러분께, 신랑, 신부 및 양가의 혼주(婚主)를 대신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인 신랑 김은호군은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매일유업에서 마케팅홍보업무를 담당하고 있고, 신부 김주연양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맥쿼리증권의 파생운용부에서 주식 매매를 담당하고 있는 훌륭한 인재들입니다.


   본격적인 주례사를 하기에 앞서 잠시 시계바늘을 지금부터 1년 3개월 전인 2010년 1월 12일로 돌려보겠습니다. 당시 2년차 새내기 회사원인 신랑 김은호군은 아직은 직장에 적응하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이제는 벌써 8년차가 된 중참의 증권맨인 신부 김주연양은 ‘내 님은 어디에’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추운 겨울을 춥게 보내면서도 정작 그 추위의 정체를 모르고 있던 차에, 김은호군의 절친한 친구이자 김주연양의 직장동료인 수호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두 선남선녀를 서울시청 부근의 삼겹살집으로 이끌었습니다.


  청춘 남녀가 처음 만남을 가질 때는 근사한 호텔 커피샵을 이용하는 게 보통인데, 이 자리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는 이렇게 첫 만남을 삼겹살 구워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된장 맛이 나는 구수한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삽겹살을 그렇게 잘 굽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는 신랑 김은호군은 그만 신부 김주연양의 삽겹살 굽는 솜씨에 홀딱 반하였고, 그 후 이어지는 만남에서 서로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끼던 어느 날, 신부 김주연양이 장갑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살을 에는 칼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부는 모습을 보고 신랑 김은호군이 그 여린 손을 꼭 잡아주면서, 마침내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필이면 이 때 장갑을 왜 잃어버렸는지, 혹시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는지 청문회를 개최하여 진실을 규명하여야 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시간 날 때마다 데이트를 하며 사랑의 깊이를 더해 가던 2010년의 마지막 날,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서울 명동의 밤거리,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커피를 마셨던 ‘커피애’라는 찻집을 두 사람이 일부러 찾아갔습니다.

  그 곳에서 신랑 김은호군은 직접 피아노 반주를 하며 이적의 “다행이다”라는 노래를 부르고,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공개구혼을 하였습니다.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펼쳐진 것입니다. 이런 멋진 청혼을 거절할 여자는 아마도 이 지구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장갑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떨리며 처음 잡았던 손을 앞으로 영원히 놓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제껏 외로 달려오던 두 물줄기가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흘러가니, 두 사람이 서로 맞잡은 손 안에서 향기 높은 꽃 한 송이를 피워 내고, 기쁨의 노래를 드높이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의 부모님은 이럴 때 써먹으라고 김은호군에게 어릴 적에 피아노를 가르치신 건가요? 


  지구상의 인구가 60억 명 중 대략 반이 남자이고 반이 여자일 테니, 30억 남자 중의 한 명인 신랑 김은호군과 30억 여자 중의 한 명인 신부 김주연양이 만나서 결합할 확률은 900억분의 1인 셈입니다. 로또 1등에 당첨되기보다도 훨씬 어려운 그 900억분의 1인 확률이 현실화되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부모 자식의 사이가 되려면 천 겁의 인연을 쌓아야 하는데, 남녀가 부부가 되려면 그보다 두 배인 이천 겁의 인연을 쌓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영겁의 세월을 두고 쌓은 인연의 끈을 맺은 두 사람이 저에게 주례를 부탁하러 찾아왔을 때, 제가 김주연양에게 김은호군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대답이 뜻밖으로 간단하고 명쾌하였습니다. 김은호군의 따뜻한 마음씨가 무엇보다 좋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신랑 김은호군을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보아 오면서 느낀 모습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 그 자체였습니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감싸고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신랑 김은호군한테서 그런 따뜻한 모습을 발견하고, 거기에 반한 신부 김주연양이야말로 진정으로 착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착함과 슬기로움을 갖추었기에 신부 김주연양의 빼어난 미모가 더욱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잘 생긴 남자를 만나면 결혼식 한 시간 동안의 행복이 보장되고, 마음이 따뜻한 남자를 만나면 평생의 행복이 보장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예쁜 여자를 만나면 삼 년이 행복하고, 착하고 슬기로운 여자를 만나면 영원히 행복하다”고 합니다.


  내빈 여러분 어떻습니까, 마음이 따뜻한 남자의 표상 김은호군과 착하고 슬기로운 여자의 상징 김주연양이 오늘 부부로서 백년가약을 맺는 것이야말로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제 말씀에 동의하신다면 커다란 박수로 두 사람을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듯 천생배필의 두 사람이기에, 어느 누구 못지않게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생활을 꾸려 나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신랑 김은호군을 어릴 적부터 보아 왔고, 오늘 이 자리의 주례를 맡아 두 사람으로부터 혼인서약을 받은 사람으로서, 신랑, 신부에게 이제 몇 가지 당부를 하고자 합니다.


  우선, 결혼생활은 천리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천리 길을 가려면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급하게 뛰어서는 천리 길을 결코 갈 수 없습니다. 황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가야 합니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입니다. 무엇이든 서둘러 한꺼번에 이루려 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듯이 착실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에 얽힌 이야기를 늘 염두에 두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머나 먼 천리 길을 감에 있어 두 사람은 서로서로 상대방을 공경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핑계로 상대방을 홀대하여서는 안 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사랑할수록 상대방을 더욱 공경하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때로는 상대방을 어려워할 줄 알아야 그 사랑이 오래오래 지속됩니다.

  남을 존경하여야 내가 존경받는다는 것은 부부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만고불변의 이치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혈육인 부자지간에도 1촌의 촌수가 있는 데 비하여 부부간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만큼 부부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뜻하지만, 역설적으로는 그만큼 먼 사이라는 뜻도 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 한 마디에 쉽게 상처받고, 말 한 마디에 쉽게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를 공경하고 고마워하라고 당부를 드립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은 서로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결혼생활은 수학공식을 푸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간에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니라, 셋이나 넷이 될 수 있고, 때로는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왜 그러냐고 그 이유를 캐려 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결혼생활은 홍보할 상품과 고객의 심리를 살피거나 주식시장의 시황을 분석하듯, 그렇게 따지고 캐는 것이 아닙니다. 똑똑함을 뽐내며 상대방에 대하여 이기는 삶을 사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는 실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보다는 너그럽게 져주는 현명한 삶이 필요합니다. 똑똑함보다는 현명함이 요구된다는 이 말을 꼭 염두에 두기 바랍니다.


  두 사람은 이 자리에 서기 전까지 30여년의 세월을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신랑은 화성에서 온 남자이고, 신부는 금성에서 온 여자이니,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연애할 때는 공통점만 보이고, 결혼 후에는 차이점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연애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차이점이 그 콩깍지가 벗겨진 결혼생활에서는 한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런 차이점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나냐고 따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 대신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 번만 참으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다음의 시구(詩句)를 떠올리십시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당신만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생겨나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언제나 따뜻함으로 날 맞아주기 때문입니다.

  상처로 얼룩진 마음으로 다가가도

  기다렸다는 듯 당신의 따뜻함으로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김은미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 중에서)

 

  그렇습니다. 서로의 가슴 속에 가득 채워져 있는 따뜻함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감싸십시오. 시이불견(視而不見)하고 청이불문(聽而不問)하십시오.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따지고 캐묻는 똑똑한 사람보다는, 너그럽게 포용하고 감싸는 현명한 사람이 되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두 사람 모두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기 바랍니다. 


  결혼은 일방통행도 아니고, 계약도 아닙니다. 결혼은 공통의 목표를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합동행위입니다.  

  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이 자리에 서게 되기까지를 두 사람 인생의 첫째 단계라 한다면, 오늘 이 순간부터는 그 인생의 둘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지금부터는 남편이 있기에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기에 남편이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서로의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는 그러한 삶이 펼쳐져야 합니다.


  두 사람은 이제 말 그대로 일심동체(一心同體)입니다. 너와 내가 다른 것이 아니라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옛말에 “꽃은 벌을 부르고 벌은 꽃향기를 좋아하니, 꽃과 벌은 서로 도우며 영원히 상생한다(花召群峰 蜂樂花香, 花峰相助 終古不變)”는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바로 이 꽃과 벌처럼 살기 바랍니다. 


  끝으로, 두 사람은 모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제껏 어려움 없이 성장하여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로부터 많은 은덕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 은혜에 보답하여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주위의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애국자가 되기 바랍니다. 애국자라고 해서 거창한 게 아닙니다. 애국의 길, 알고 보면 참으로 쉽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최소한 둘 이상 낳으면 그게 바로 애국의 길입니다. 이는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거의 꼴찌에 이른 우리나라가 이 지구상에 계속 존립하기 위하여 이 땅의 신혼부부에게 꼭 요구되는 의무이자 덕목입니다. 꼭 애국자가 되기 바랍니다.     


  이제 주례사를 마치면서 신랑, 신부에게 숙제를 한 가지 내줄까 합니다. 1년 전에 돌아가신 법정스님은 언젠가 주례를 서시면서 신랑신부에게 한 달에 두 권의 산문집과 한 권의 시집을 사 볼 것을 숙제로 내주신 일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까지는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 신랑신부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여행을 할 것을 숙제로 내주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뿌리내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을 정기적으로 찾아다니면서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취를 느끼다 보면, 이제껏 몰랐던 색다른 감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에게 내준 이 숙제를 잘 하는지는 앞으로 두고두고 지켜보겠습니다.

  

  이상으로 다소 장황했던 주례사를 마치려고 합니다. 요컨대, 이 자리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따뜻한 마음씨와 빛나는 슬기로, 서로를 공경하고 이해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자세로 공동선을 추구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새 며느리, 새 사위를 맞이하신 양가의 부모님께 다시 한 번 축하를 드리며, 이 자리에 계신 내빈 여러분께도 신랑, 신부를 대신하여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1. 4. 16.


                                                                                       주례    민 일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