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창에 기대어

지록위마(指鹿爲馬)

조회 수 24 추천 수 0 2019.05.20 21:27:11


지난 주말에는 금당천변의 우거(寓居)에 봄비가 종일 내렸다.

오랫동안 가물었던 까닭에 반가운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고 했던가, 덕분에 화단과 밭에서 씨름하는 대신에 책상머리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죽자(BC 210년),

환관 조고(趙高)는 승상 이사(李斯)와 짜고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황제로 앉힌 후 국정을 농단하였다.

많은 신하들을 모함하여 축출한 그는, 승상 이사마저 죽이고 자신이 승상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급기야 나중에는 스스로 황제가 될 욕심까지 품는다.

그래서 그는 조정의 중신들 중에서 올바른 소리를 하며 자신에게 반대할 사람들을 골라내려고 획책하였다.  

 

조고가 어느 날 황제 호해에게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면서,

이것은 말입니다.”

라고 하였다.

 

호해가 웃으며,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어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오?”

라고 하였다.

(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사기 진시황본기(史記 秦始皇本紀)]

 

조고가 짐짓 말이라고 계속 우기자,

호해가 중신들에게 물었다.

아니, 경들 보기에는 저게 무엇 같소? 말이오, 사슴이오?”

 

호해가 중신들을 둘러보자,

그들 중에는 조고의 의중을 금방 알아채고 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적은 수일망정 말이 아니라 사슴이라고 제대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한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린다.

어리석은 황제 호해는 결국 그 사슴이 말인 줄 여기게 된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간신에 의해 눈과 귀가 가려져

죽기 전까지도 진나라가 천하태평인 줄 알았던 우매한 군주 호해(胡亥),

그리고 그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한 간신의 전형 환관 조고(趙高),

이 두 인간에 의해 진나라는 BC 206년에 멸망하고 만다.

BC 770년부터 550년 동안 이어져 온 춘추전국의 기나긴 시대를 정리하고

BC 221년 마침내 전국을 통일했던 나라가

그로부터 불과 15년 만에 실로 허망하게 종국을 맞이한 것이다.


간신의 농간에 의해

군주가 사슴과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나라가 어찌 오래 유지될 수 있었으랴.

진나라의 멸망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역사는 증명한다. 간신이 혼란을 일으키는 근원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반대로 사회적 혼란 또한 간신이 마구 생산되도록 촉진한다는 사실도.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한 자가 늘 기회를 엿보며 기다리다 혼란을 틈타 권력을 빼앗는 것은 하나의 규칙이다.

간신들은 이보다 한술 더 뜬다.

그들은 물을 흐려 물고기를 잡는 데 훨씬 익숙해 있다.

...(중략)...

사회의 혼란은 간신을 생산하고 간신으로 하여금 뜻을 얻게끔 부추긴다.

뜻을 얻은 간신은 다시 사회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는 무수히 많은 사례들이 증명하는 중요한 역사의 경험이자 교훈이다.

[김영수 편역 간신론”(2002), 218-219]

 

온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5월의 봄날에

오래전에 읽었던 간신론을 다시 꺼내 보았다.

계절의 여왕에는 안 어울리는 책인데, 우연히 손이 그리로 갔다.

 

이 책은 또 말한다.

 

간신은 봉건제의 산물로서 일정한 사회역사 발전단계와 관계가 깊다.

오늘날 사회체제는 간신의 발생을 최대한 제약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봉건적 독소는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간신의 출현은 피할 수 없다.

간신이나 정치적으로 자질이 나쁜 자들이 국가의 주도권을 장악하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러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정치를 그르쳐

사회 혼란을 조성하고 말 것이다.

국민의 생활과 생업은 타격을 받고 생산 발전은 저해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재난이 닥칠 것이다.

(위 책 39-40)

 

한 마디로 소름 끼치는 경고이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한없이 정겨웠던 무지렁이 촌자는,

이 경고를 접하며 지극히 소박한 소망을 하나 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위와 같은 경고가 말 그대로 그냥 경고에 그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경고가 우리 사회에서 현실화된다면 실로 비극이니까 말이다.


나무관세음보살.

 

기해년 소만(小滿)을 하루 앞둔 5월의 봄날 삼경(三)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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