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그리고 현실

2010.02.16 11:57

범의거사 조회 수:13321

리 콴유,
그는 風前燈火같던 작은 섬나라 싱가포르를 오늘날의 번영과 안정을 구가하는 나라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는 1955년에 국회의원이 되어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총리를 지낸 후 지금도 원로장관(senior minister)으로서 계속 활동하고 있는 정치가이다. 그의 회고록인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 류지호 옮김, 문학사상사, 2001)을 읽으면서 본래 변호사 출신인 그의 법률관에 눈길이 쏠렸다.
  
  "법과 질서는 안정과 발전의 기본틀을 마련해 준다.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은 나는 제대로 움직이는 사회를 위해서는 법 앞에서 모든 이가 평등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점령시기와 뒤이어 영국 군부 통치하의 무질서한 싱가포르에서 가졌던 경험은 죄와 벌의 문제에 대한 나의 접근을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선회시켰다.
......1959년 총리가 된 나는 곧바로 살인사건을 제외한 모든 재판에서 배심원제도를 폐지시켰다. 살인을 예외로 한 것은 말레이시아의 법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1969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후 나는 법무부장관인 에디 바커에게 살인사건 재판에서도 배심원 제도를 폐지하는 안건을 국회에 상정하도록 했다. 의회 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싱가포르에서 가장 성공한 형사 전담 변호사인 데이비드 마셜은 자신이 맡은 살인사건의 99%가 무죄평결이었다고 주장했다. 내가 그에게 변호를 맡았던 99%의 피고인이 결백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임무는 그들을 변호하는 것이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수많은 재판을 보아왔던 '스트레이트 타임즈'의 한 법정 출입기자는, 미신을 강하게 믿고 사형과 같은 중형을 내리는 부담감을 회피하려는 아시아 배심원들은 유죄평결을 내리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특별위원회에서 증언했다. 그들은 무죄방면을 선호했고, 가벼운 죄목에서나 유죄평결을 내렸다. 그 기자는 살인사건의 배심원 중에 임신한 여자가 있으면 유죄평결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저주를 받을 거라는 미신 때문이었다. 법률안이 의회를 통과하자 배심원제도는 폐지되었고, 변덕스런 배심원들 때문에 엉뚱한 판결이 나오는 일은 없어졌다.
  일본 점령기간 동안 인간이 비참한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왔던 나는 범죄자는 사회의 희생물이라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4년과 1945년에는 먹을 걸 제대로 못 먹는 상황인데도 형벌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에 도둑이 없었고, 사람들은 낮이나 밤이나 현관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었다. 범죄 발생을 없앤 요인은 명백했다. 영국군은 싱가포르에서 채찍이나 등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태형을 가했었다. 전쟁 후 그들은 채찍형을 폐지했지만 몽둥이로 때리는 벌은 그대로 유지했다. 우리는 태형이 장기간의 교도소 복역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마약, 무기 밀매, 강간, 밀입국, 공공기물 파손과 같은 범죄에 이를 적용했다.  
  1993년, '마이클 페이'라는 열다섯 살 된 한 미국 학생이 친구들과 함께 도로 표시판을 파손하고 스무 대가 넘는 차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는 법정에 서게 되자 유죄를 인정했고 그의 변호사는 선처를 요청했다. 판사는 태형 여섯 대와 4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미국인 소년이 '잔인한 아시아인들'에게 곤장을 맞게 되리라는 사실은 미국 언론을 격분시켰다. 그들이 얼마나 여론을 흥분시켰는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몸소 나서 옹 탱총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했다. 싱가포를 아주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이 소년이 미국인이기 때문에 태형을 면해 준다면 어떻게 우리 국민을 처벌할 수 있을 것인가? 각료회의가 끝난 후 총리는 옹 대통령에게 태형을 네 대로 감해줄 것을 건의했다. 그래도 미국 언론은 만족하지 않았다.  
......페이는 네 대의 태형을 받은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몇 달 후 미국 언론은 그가 술에 취해 늦게 귀가한 아버지에게 덤벼들어 구타한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 한 달 후 그는 부탄가스를 마시다 친구가 켠 성냥불에 의해 가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중화상을 입었다. 그는 자신이 싱가포르에 있을 때부터 부탄가스 중독자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러한 조치가 싱가포르에서의 법과 질서를 가능케 했다. 1997년 세계경제포럼의 국가경쟁력 보고서에서, 싱가포르는 '조직범죄가 사업에 심각한 손해를 끼치지 않는 나라' 중 1위에
올랐다.  같은 해 국제경영개발연구소가 편찬한 세계경쟁력연감에 싱가포르는 치안 부문 1위에 올랐다. 그 책은 싱가포르를 '국민들이 자신과 자신의 재산이 보호되고 있는 완벽한 신뢰를 갖고 있는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다."(위 책 302-304쪽)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까지는 형벌의 종류에 태형(笞刑)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야만적(?) 내지 비인간적이라는 이유로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현재 우리가 채택하고 있지 아니한 배심원 제도를 도입하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따금 들린다. 모든 것이 서구,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 지향적인 세태, 그들의 제도는 모두가 至高至善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정작 법을 집행하는 현장에서는 태형의 필요성이 심심치 않게 거론되건만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던 어느 미국판사는 아이러닉하게도 이런 독백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사법제도 중 반드시 없어져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가 법관의 선거제도요, 또 다른 하나가 바로 배심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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