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싶었던 남자의 辯(연수원 고별강의)

2010.02.16 11:13

귀터도사 조회 수:11549

 부드럽고 싶었던 남자의 辯

1997. 3. 2.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이 자리에 섰던 이후 어느 덧 3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오늘 마지막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孟子는 천하의 영재를 모아 가르치는 것을 君子의 세 번째 즐거움(得天下英才而敎育之君子之三樂)으로 꼽았지만, 저는 이야말로 인생의 첫 번째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난 3년은 바로 그 즐거운 나날의 계속이었습니다.

이제 그 즐거운 날의 끝에 서서 돌이켜 보니, 本業이 판사인 제가 강단에 섰었다는 것이 참으로 분에 넘치는 짓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얄팍한 지식을 내세워 여러분을 야단치고, 때로는 혼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어찌 보면 蠻勇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같이 배운다는 생각에, 그리고 법조 선배로서 비록 미미하나마 여러분보다 먼저 겪었던 경험을 하나라도 전한다는 생각에, 때로는 밤잠을 설쳐가며 지내온 기간이었습니다.

제가 연수원 훈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이렇게 마지막 강의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여러분들과 28기와 29기의 여러분들 선배들이 저의 오만을 감내하며 잘 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강의실에서는 오줌보가 터지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고, 술집에서는 못 먹는 폭탄주를 마시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으며, 태풍이 몰아치는 산에서는 아픈 다리를 이끌고 끌려 다니느라 죽을 고생을 하였건만, 불평 한 번 제대로 안 하고 따라준 여러분들께 정말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다 때로는 모욕까지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습니
까? 때묻지 않은 여러분을 타락시키지는 않았는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저더러 '순악질교수'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여러분들이 다른 반 연수생들로부터 "너희들 어떻게 사느냐"고 동정을 받았겠습니까. 이 점 솔직히 有口無言입니다.
그렇지만 저도 본래는 가슴이 따뜻한 남자이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금년 초에는 올해를 "부드러운 남자 元年의 해"로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부드러운 남자의 길=훈장이기를 포기하는 길"이라는 등
식이 제 머리 속에 자리하였고, 결국은 제 버릇 개 못 주고 어느 순간 그만 '순악질교수'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시 사람은 생긴 대로 살게 마련인가 봅니다.
그래도 지금도 외치고 싶답니다. 저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고!

  이제 마지막 강의를 끝내며 여러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옛 先賢의 말씀 한 가지만 전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지난번에 29기들한테도 들려준 것인데, 앞으로 여러분들도 싫든 좋든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기에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바른 사람이 사악한 법을 말하면 사악한 법도 바르게 되고,
      사악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면 바른 법도 사악하게 된다.
        (正人說邪法 邪法亦隨正, 邪人說正法 正法亦隨邪)

잘못된 법도 올바르게 쓰면 바른 법이 될 수 있지만, 잘된 법도 바르지 않게 쓰면 나쁜 법으로 되고 맙니다. 여러분이 장차 어느 직역으로 진출하든 법조인으로 활동하는 이상 법을 올바르게 쓰는 법률가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다가다 발끝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사법연수원 30기 7반을 매개로 맺어진 여러분과 저의 만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소중한 인연일 것입니다. 이제 그 고귀한 인연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천리 밖을 내다보려면
        한 층을 더 올라가라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는 말을 떠올리십시오. 마지막 한 층의 차이가 千里를 보고 못 보고를 결정합니다.

앞으로 남은 1년 동안 여러분 모두 건강하게 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훌륭한 법조인으로 성장하여 다시 만나게 되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감사합니다.

                            1999. 11. 18.

                                     범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