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창에 기대어

가인 김병로 선생 50주기 추념사(퍼온 글)

조회 수 7955 추천 수 0 2014.01.15 10:48:10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새해를 맞아 여러모로 바쁘신 가운데에도 오늘 추념식에 참석하여 주신, 가인 선생의 유가족을 비롯한 모든 내외 귀빈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초대 대법원장이자 우리나라의 큰 어른이신 가인 김병로 선생의 서세 50주기를 맞아 선생의 생애와 정신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하여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모든 법조인의 사표로서 그리고 민족의 지도자로서 온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가인 선생과 같은 분이 우리 곁에 계셨다는 것은, 사법부 나아가 우리나라 전체가 크게 자랑스러워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추념식이 선생의 크나큰 업적과 발자취를 함께 되새겨 봄으로써 그 올곧은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사법부를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영원히 빛나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가인 선생의 일생은 일제 지배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우리나라의 가장 암울했던 시대를 걸어오며 오로지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헌신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선생께서는 약관(弱冠)에 들기도 전에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항일 의병투쟁에 직접 뛰어드셨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운동 관련 주요 재판 때마다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하셨을 뿐 아니라 신간회 등 민족운동단체에 가입하여 민족 독립과 통합을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선생께서 직접 지으신 ‘나라를 잃고 거처할 곳 없는 거리의 사람’이란 뜻의 ‘가인(街人)’이라는 아호만 보아도, 우리는 일생동안 낮은 곳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길을 걸었던 선생의 우국애민(憂國愛民)의 마음이 얼마나 진정한 것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가인 선생께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하시어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의 사법부를 바로 세우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특히 9년여의 재임기간 동안 정치 권력 등 외부의 압력과 간섭에 단호히 대처하면서 사법부의 존엄과 권위, 그리고 독립을 확고히 한 것은 선생의 큰 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재판 독립의 원칙은, 원칙과 대의를 저버리지 않고 사법부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일신의 안일을 내던지신 선생의 결연한 의지와 곧은 기개가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선생께서는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민법, 형법, 상법, 민사·형사소송법 등 법치국가의 근간이 되는 법률을 마련하는 데에도 중추적 역할을 하셨습니다. 법률 조문 하나하나에 선생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할 정도로 선생의 헌신적인 노고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법치주의의 굳건한 토대 위에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선생께서 사법부 구성원의 인격 수양과 청렴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몸소 법관으로서의 청렴하고 강직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선생께서는 평생을 ‘계구신독(戒懼愼獨)’, 즉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에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동을 삼간다’라는 교훈을 좌우명으로 삼고 생활하셨습니다. ‘법관은 양심과 이성을 생명처럼 알아야 하며’, ‘법관으로서의 본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사법부를 용감히 떠나라’라는 서릿발 같은 말씀으로 법관의 막중한 사명감을 후배들에게 일깨우기도 하셨습니다. 청렴과 강직의 표상으로서 선생께서 보여준 수많은 일화는 아직도 법관들이 옷깃을 여미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대법원장으로서 신임법관을 맞이할 때마다 가인 선생께서 이토록 소중히 여긴 법관의 자세와 본분을 가슴 깊이 새기는 것으로 첫발을 내딛어야 한다는 점을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인 선생의 삶과 업적을 돌이켜 볼수록 가인 선생께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는 것은 선생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는 대한민국 사법부 더 나아가 대한민국에 크나큰 행운이자 축복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가인 선생이 한평생 조국과 사법부에 바쳐 온 뜨거운 충정은 참으로 사법부를 비롯한 이 나라 전체를 수호하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습니다. 가인 선생이 떠나신지 반백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선생의 의연한 기개와 끝없는 열정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비추어 주는 불꽃이 되고 있습니다. 사법부 구성원 모두는 가인 선생이 당신의 삶 자체로써 일깨워 주신 귀한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길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법관은 오직 정의의 변호자가 됨으로써 3천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법의 권위를 세우는 데 휴식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선생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법부 존립과 권위의 기반이 국민의 신뢰에 있고,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사법부 구성원 모두가 한마음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사법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가인 선생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추모의 자세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경건한 마음으로 가인 선생의 거룩한 생애와 고결한 정신에 깊은 존경과 추모의 염을 바치면서 추념사를 마치고자 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4. 1. 13.

대법원장 양 승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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