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2024.03.23 23:34

우민거사 조회 수:126

 

네 이놈 흥보놈아

하늘이 사람 낼 제 제각기 정한 분복

잘난 놈은 부자 되고 못난 놈은 가난하니

내 이리 잘 사는 게 하늘이 주신 내 복이지 네 복을 뺏었느냐

몽둥이를 둘러메더니

강짜 싸움에 계집 치듯

좁은 골에 벼락 치듯

후닥닥 뚝딱

아이고~

이 급살을 맞을 놈아 왜 이리 찾아와쌌는단 말이냐

후닥닥 뚝딱

아이고~

---판소리 흥보가 중 흥보가 놀보집에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놀보한테 매맞는 대목의 일부.

 

 

사흘 전에 춘분(春分)이 지났다.

남녘에서 꽃 소식이 전해져오는 것을 보면 분명 봄이 온 듯하다.

그런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떠올리게 하려는지,

월초부터 이어져 온 꽃샘추위가 수그러들 줄 모른다.

춘분에 대관령, 평창 등 강원도에는 최고 26.2cm의 눈이 내렸고,

춘분 다음날인 3월 21일에는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2도였다.

 

그 옛날 왕소군(王昭君)은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어 (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고 했지만,

금당천의 우거(寓居)에는 복수초가 진즉 활짝 피었는데, 어찌하여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입에 올려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봄바람이라지만, “미친X 널뛰듯 한다”는 속담처럼 종잡을 수 없이 불어내는 찬바람이 옷속을 파고드는 통에 추위를 더 느낀다. 

 

그런데 오늘은 또 뭔가. 지난밤에 제법 많은 비가 내리더니 오늘 서울의 낮 최고기온이 예년 평균기온보다 10도 높은 영상 18도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날씨다.

  

복수초.jpg[우거의 복수초]

 

동해시 제설작업.jpg[동해시의 제설작업 모습. 2024. 3. 21. 자 조선일보]     

 

명색이 봄날에 촌부가 피부로 느끼는 날씨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18일 남은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연일 정치권의 공방이 거세고,

 그만큼 관련 기사가 대서특필로 신문지상을 장식한다.

적어도 그 열기만큼은 봄을 넘어 한여름처럼 뜨겁다. 

 

목하 국회를 지배하고 있는 두 거대 정당이 사생결단을 하는 판국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잊을 만하면 힘겨루기를 하여 민심을 등돌리게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반대파를 숙청하다시피 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장마(仗馬)는 불명(不鳴)이어야 하거늘 감히 딴소리를 한 죄를 묻겠다고 눈을 부릅뜨는 모습이다. 

  

위 판소리 대목이 메아리져 들리는 듯하다 

 

하늘이 사람 낼 제 제각기 정한 분복

줄 선 놈은 횡재하고 대든 놈은 횡사하니

내 이리 권력 쥔 게 하늘이 주신 내 복이지 네 복을 뺏었느냐

몽둥이를 둘러메더니

강짜 싸움에 계집 치듯

좁은 골에 벼락 치듯

후닥닥 뚝딱

아이고~

이 주제넘게 건방진 놈아 왜 이리 말이 많단 말이냐

후닥닥 뚝딱

아이고~

---21세기 창작 판소리 "공천가" 중에서

 

그런가 하면 괴물 같은 기형적인 비례대표제로 위성정당을 만들어 놓고는,

두 정당 모두 자기네끼리도 의견이 수렴되지 않는지 비례대표 후보자를 마치 장기판의 졸처럼 넣었다 뺐다 한다.

심지어는 지역구 의원 후보자마저도 하루아침에 바꿔버린다.

그리고는 시스템 공천이라고 강변한다.

영어 단어 'system'의 의미가 우리나라에서는 '엿장사 마음'으로 바뀐 모양이다.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귤화위지. 橘化爲枳)고 했던가.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된들 민의를 얼마나 제대로 대변할 수 있을까.

생판 아무런 연고가 없던 곳에 떠밀려 느닷없이 나타나 지역 발전 운운하며 표를 달라는 후보자나,

그런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유권자나,

모두들 속으로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두 거대 정당의 전횡에 반발하여 개혁의 깃발을 들고 나온 소수정당들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다.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툭하면 탈당 소리가 나온다.

범죄로 1심 또는 2심에서 실형의 유죄판결을 받고 현재도 재판이 진행 중인 피고인들이 정당을 만들고 비례대표 상위 순번에 스스로를 후보자로 버젓이 올린다.

기막힌 막장극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정당의 지지율이 높이 올라가는 건 또 뭔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문제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거대 정당이든, 군소정당이든 모두 표를 달라고 읍소하면서도,

정작 이런 중차대한 문제에 관하여는 가부간에 입도 뻥끗 안 한다.

어느 쪽이 득표에 유리한지 계산서가 안 나오는 모양이다.    

     

이쯤 되면 진정한 정치의 봄이 정말 오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아래의 글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정치적 갈등의 골은 자연 치유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불행의 구조적 씨앗부터 제거하는 게 순리다.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고착화한 소선거구제와 꼼수 위성정당을 낳은 기형적 준연동형제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그 시작일 터이다. 여야는 22대 국회 출범 즉시 정치 개혁에 착수하겠다는 약속과 관련 권한의 독립적 기구 위임을 국민 앞에 천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새 정치 공약도 사탕발림에 불과할 뿐이다. 정치의 봄은 춘분 돌아오듯 저절로 오지 않는다.”

(중앙일보 2024. 3. 20.자 임종주 칼럼)

 

이종섭 전 국방장관의 호주대사 임명과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회칼 테러 발언으로 벌어진 사달이 전자의 귀국과 후자의 사퇴로 표면상으로는 수면 아래로 내려가는 듯하다. 

무릇 위정자라면 국민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사리사욕의 불순한 의도로 선거에 나서는 사람은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세상을 위해 일하겠다는 뜻을 품고 선거에 나설 요량이라면 절절하사(折節下士)의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옛날 절대 왕정 시절의 임금조차도 자기 고집을 꺾고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민심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4.10. 총선거는 어쩌면 대한민국의 향후 명운을 좌우할지도 모른다.

용비어천가나 부르면서 장마불명(仗馬不鳴)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사람과

절절하사(折節下士)의 자세로 국민 곁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하여야 할까. 

답은 자명(自明)하다.

문제는 국민이다. 국민이 취사선택을 제대로 할 때 진정한 정치의 봄이 오지 않을까.

 

춘분(春分)이 지난 시점에 춘래불사춘을 정말로 되뇌어야 하는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정녕 한낱 촌부의 주제넘은 바램일까.  

 

James Strauss & Marcela Roggeri_Prokofiev _ Flute Sonata in D Major, Op. 94 - I. Moderato.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