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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 판사님!
어제 판사님 논문과 관련하여 전화드렸던 우시정이라고 합니다.
좋은 홈페이지를 볼 수 있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후 박사과정은 형편상 거치지 못하였지만 직장에 들어와서 채권관리업무를 하면서 제가 법학을 공부하기는 잘하였구나 생각이 들었고, 공부를 위해 언어습득이 긴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법률적으로 판결이나 교과서에서 나타나지 않는 문제들도 많이 만나는데 우리가 계수받은 나라의 법리는 어떤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덕분으로 사법연수원 사이버강의실에서 교수님의 강제집행관련 논문을 통해 상당히 많은 이론적인 무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판사님의 논문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족하지만 간략한 논문(논문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실무와 관련한 나름대로의 법적인 이론구성이라고나 할까요)을 하나 적고 있는데 혹시 심사평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숭인동 사무실에서
우시정 올림.
어제 판사님 논문과 관련하여 전화드렸던 우시정이라고 합니다.
좋은 홈페이지를 볼 수 있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후 박사과정은 형편상 거치지 못하였지만 직장에 들어와서 채권관리업무를 하면서 제가 법학을 공부하기는 잘하였구나 생각이 들었고, 공부를 위해 언어습득이 긴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법률적으로 판결이나 교과서에서 나타나지 않는 문제들도 많이 만나는데 우리가 계수받은 나라의 법리는 어떤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덕분으로 사법연수원 사이버강의실에서 교수님의 강제집행관련 논문을 통해 상당히 많은 이론적인 무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판사님의 논문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족하지만 간략한 논문(논문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실무와 관련한 나름대로의 법적인 이론구성이라고나 할까요)을 하나 적고 있는데 혹시 심사평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숭인동 사무실에서
우시정 올림.
을미사변과 장춘단 공원, 그리고 충성심
- 김지욱(성우회 정책 연구실장, 전 국방부 대변인)
비극의 을미사변
서울 시민에게 제일 정겨움을 안겨 주는 남산, 그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장충단 공원은 현재 야외무대와 게이트 볼, 배드민턴, 롤러스케이트장 들이 조성된 휴식공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109년 전,주권국가의 수도서울에서 일국의 왕비를 죽이려는 외국인 폭도들의 침입에 맞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다가 장렬히 죽어간 선배 군인들의 충성심이 서려있는 공원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일본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간여하다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에는 박영효(朴泳孝)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 확장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 등 3국이 일본에게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소위 '삼국간섭'을 계기로 일본의 세력 확장은 더 이상 어렵게 되었다.
주변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그동안 일본정부의 강요에 의해 내정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정부는 조정내의 친일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위세를 잃어가는 일본을 멀리 하고 새로운 세력인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정부는 조선의 이러한 정책변화가 명성황후(당시는 민비)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공사 대신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 일본공사로 새로 파견하였다.
그는 일본군 예비역 육군중장 출신에 정삼위 훈일등(正3位 勳1等) 자작(子爵)의 지위에 있는 강골의 무장이었는데 1895년 7월 15일(음력)에 창덕궁의 장안당(長安堂)에서 고종을 배알하고 국서를 올렸다.
일본정부는 미우라에게 조선국 국모 시해 계획을 세우고 강력하게 추진하도록 하였다. 그 비밀작전의 암호는 “여우사냥”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이에 대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을 남산에 있는 일본 공사관 내에 스님복장으로 칩거하면서 불상 앞에서 염불만 외는데 전념하는 위장 행동을 취하였다.
또한 조선의 군부와 궁내부의 고문으로 와 있는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왕비시해 계획에 일급 참모로 가담시켰다. 이 사람은 원래 일본군 포병소좌로서 일찍부터 작전의 신동이라고 불렸는데 쿠데타[竹橋事件]를 주도하였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일만을 기다리고 있던 자였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미리 그를 가석방으로 살려내어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보내놓고 있었으니 그저 놀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한편 조선정부에서는 이러한 일본 측의 기막힌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했던 신제도를 다시 구제도로 복구시키기 위해 그 동안 일본인 교관에 의해 조련되어 왔던 조선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일본 측에 통고하였다. 이에 일본은 상황이 급박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라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앞당겨 결행하게 되었다.
D데이 H아워는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03시였다. 이날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 별장에 있던, 당시 76세의 흥선대원군은 안타깝게도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는 일본 흉도(兇徒)들의 앞잡이가 되어 경복궁으로 향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이 사건을 조선인에 의한 사건으로 위장해야 할 필요에 따른 오카모토의 절묘한 계략이었다. 이 행렬에는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 조선인까지 가담하였다.
심지어 조선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 이진호(李軫鎬) 등 3명의 현직 대대장들도 한심한 매국노가 되어 이 만행에 합세하였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비참한 명성황후의 최후
이때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단의 일본 낭인(浪人)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 등이 지휘하는 조선훈련대와 합류하여 경복궁으로 쳐 들어갔다.그런데 이들이 경복궁에 당도할 때까지의 경위를 보면 엄청난 비밀작전치고는 한심할 정도로 짜임새가 엉성했다. 그래서 이들의 움직임을 조선정부에서 사전에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을 정도였는데도 몰랐었다.
무엄하게도 이들이 경복궁의 담장을 뛰어넘는 범궐을 감행하려하자 이를 저지하는 궁궐 시위대와 총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숙직하고 있던 경복궁 수비대장 홍계훈(洪啓薰)과 휘하의 많은 조선 시위대 장병들은 목숨을 걸고 이 흉악한 무리들의 기습적인 경복궁 난입을 적극 저지하려 했으나 끝내 장렬히 순국하고 말았다.
결국 궁궐 난입에 성공한 이들 무리들은 각종 무기를 들고 피에 굶주린 이리떼와 같이 경복궁 내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으니 말 그대로 지옥도(地獄圖)와 같았다.
그러다가 명성황후의 침전인 건청궁(乾淸宮) 옥호루(玉壺樓)로 들이 닥쳤다. 현장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왕비를 보호하려다가 미친 듯이 날뛰는 일본 흉도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때 영문도 모른 채 상궁들에게 섞여 잠옷바람으로 떨고 있던, 춘추 44세의 명성황후는 이들에 발견되어 무자비하게 칼에 찔리고 옷이 모두 벗겨졌다.
이들은 처참하게 쓰러진 왕비를, 평소에 왕비가 산책했던 바로 앞의 향원지(香遠池) 물속에 담가서 숨을 끊은 뒤 나무 판자위에 시신을 싣고 옥호루 뒤편에 있는 녹원(鹿園)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곧 바로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묻어버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당시 시해주범들이 일본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왕비를 끌어내 두서너 군데를 칼질한 다음 나체로 만들어 국부검사를 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이 극악무도한 무리들이 왕비 시신의 국부까지 희롱하였다는데 (일부에서는 시간(屍姦)까지 했다고 주장하고 있음) 어찌 이 나라 산천초목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일본 흉도들의 만행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도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우리가 만일 일본 궁성을 쳐들어가 일본 왕 부인을 이런 식으로 처참하게 죽였을 때 저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물론 일본을 비난하기에 앞서 먼저 당시 철저하게 무능하였던 조선왕조를 탓하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아무튼 이 사건은 파란만장했던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처참한 비극으로 꼽히는 국모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의 주모자들
당시 일본 정부는 뻔뻔스럽게도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거짓말을 하였지만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는 미국인 교관 윌리엄 매키 다이와 러시아인 기사(技士) 세레진 사바틴, 그 외 많은 조선인들이 그날 새벽의 천인공노할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이 사건에 일본인들이 관여한 사실을 따지고 나서자, 일본정부는 하는 수 없이 시해범인 미우라 등 사건 관련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가두어 놓고 이들에 대한 재판을 형식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자기네들 끼리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증거 불충분”이라는 말 같지 않는 이유를 대면서 피고인 전원을 무죄 석방시키는 쇼를 벌렸다.
그 후 이들 주범들은 이 사건에 대한 공로(?)로 일본의 정계, 관계 등에 거물급으로 출세하는 영광을 누렸다.
장충단의 설립 배경
그 후 고종황제는 을미사변 때 장렬하게 순국한 홍계훈 등 여러 장병들의 충성심을 적극 선양할 필요를 느낀
나머지 이들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제사지내기 위한 초혼단(招魂壇)을 만들게 했다. 지금의 서울 장충체육관과 신라호텔 사이에 조선시대 수도방위와 왕실호위를 맡은 어영청의 한 분영으로서, 도성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다.
이곳에 1900년 9월 19일에 순국한 장병들을 위한 초혼단과 장충비가 완공됐는데 이 초혼단의 이름을 장충단(奬忠壇)이라 했다. 그 후 해마다 봄, 가을에 이곳에서 군악을 연주하고 조총을 쏘면서 제사를 지냈는데 일제는 이 초혼제가 반일감정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장춘단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다가 3.1 독립운동 후인 1919년 6월에는 아예 이 일대에다 벚꽃 수천그루를 심고 광장과 연못, 놀이터, 산책로 등을 꾸민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일제는 엄숙해야할 제사단을 놀이공원으로 둔갑시켰다. 이로써 당시 남산 일대에 살던 자국민들에게 훌륭한 위락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장충단 본래의 고귀한 취지를 완전히 말살시켜 버린 것이다.
그런데 장충단은 6.25 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고,장충단 비석은 서울시 사적 제1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서울지하철 3호선 동국대역 옆에 말없이 서 있다.
한자로 된 `獎忠壇'의 세 글자는 고종황제의 어필이고 비(碑) 뒷면에는 충정공 민영환이 글을 짓고 직접 쓴 143자의 비문이 음각돼 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보면
“군인으로서 어려움에 당면해서 죽은 사람이 많으니 슬프다. 그 서릿발, 눈보라에도 늠름하고 당당했던 뛰어난 절개는 밝기가 해.별과 같다”라고 돼 있다.
항상 새롭게 인식해야 할 장충단
지금은 시민들의 친근한 근린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는 장충단 공원이지만 시대가 변하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극일의 민족의지는 묵묵히 감돌고 있다.
그런데 장충단 공원을 찾는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실제는 이곳이 한국 군인정신의 메카(Mecca)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지난 10월 8일 오전 서울 장춘단공원에서 을미사변 때 순국하신 이경직, 홍계훈등 9인의 선열을 추모하는 109주기 장충단제가 봉향되었다. 여기에 관심을 갖는 국민은 얼마나 될 까.
가수 배호의 노래에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있다.
그런데 장충단 공원에 안개가 얼마나 자주 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노랫말도 을미사변과 관련된 기막힌 역사적 의미를 포함하여 순국장병들의 충성심을 기리는 내용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 까.
우리는 이 나라 장래를 책임질 우리의 2세들에게 을미사변과 같은 과거 역사와 장춘단과 같은 사적지에 대해 얼마나 교육을 잘 하고 있는가. 일찍이 “현명한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하였다.
변하지 않는 충성심
충성의 사전적인 의미는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다.” 자기의 진심을 다하는 것이 충(忠)이고 거짓없는 진실된 마음이 성(誠)이다.
을미사변 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병들은 비록 국모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군인으로서 충성 한 가닥에 목숨을 걸고 한 점 부끄럼 없는, 장엄한 최후를 마친 무인들이었다. 저녁노을 붉게 물들이며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 석양처럼.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오히려 우리 역사에 영원히 살아남아 충절의 귀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장충단 공원을 찾을 때마다 오늘도 말없이 홀로 서 있는 장충단 비석 앞에 서서 이 비석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고 다시 한번 조국수호를 위한 자세를 더욱 확고하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jeewoog@hanmail.net)
( "향방저널" 200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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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법대19회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 김지욱(성우회 정책 연구실장, 전 국방부 대변인)
비극의 을미사변
서울 시민에게 제일 정겨움을 안겨 주는 남산, 그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장충단 공원은 현재 야외무대와 게이트 볼, 배드민턴, 롤러스케이트장 들이 조성된 휴식공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109년 전,주권국가의 수도서울에서 일국의 왕비를 죽이려는 외국인 폭도들의 침입에 맞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다가 장렬히 죽어간 선배 군인들의 충성심이 서려있는 공원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일본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간여하다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에는 박영효(朴泳孝)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 확장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 등 3국이 일본에게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소위 '삼국간섭'을 계기로 일본의 세력 확장은 더 이상 어렵게 되었다.
주변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그동안 일본정부의 강요에 의해 내정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정부는 조정내의 친일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면서 위세를 잃어가는 일본을 멀리 하고 새로운 세력인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정부는 조선의 이러한 정책변화가 명성황후(당시는 민비)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공사 대신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 일본공사로 새로 파견하였다.
그는 일본군 예비역 육군중장 출신에 정삼위 훈일등(正3位 勳1等) 자작(子爵)의 지위에 있는 강골의 무장이었는데 1895년 7월 15일(음력)에 창덕궁의 장안당(長安堂)에서 고종을 배알하고 국서를 올렸다.
일본정부는 미우라에게 조선국 국모 시해 계획을 세우고 강력하게 추진하도록 하였다. 그 비밀작전의 암호는 “여우사냥”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이에 대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한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을 남산에 있는 일본 공사관 내에 스님복장으로 칩거하면서 불상 앞에서 염불만 외는데 전념하는 위장 행동을 취하였다.
또한 조선의 군부와 궁내부의 고문으로 와 있는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를 왕비시해 계획에 일급 참모로 가담시켰다. 이 사람은 원래 일본군 포병소좌로서 일찍부터 작전의 신동이라고 불렸는데 쿠데타[竹橋事件]를 주도하였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일만을 기다리고 있던 자였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미리 그를 가석방으로 살려내어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보내놓고 있었으니 그저 놀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한편 조선정부에서는 이러한 일본 측의 기막힌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했던 신제도를 다시 구제도로 복구시키기 위해 그 동안 일본인 교관에 의해 조련되어 왔던 조선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일본 측에 통고하였다. 이에 일본은 상황이 급박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라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앞당겨 결행하게 되었다.
D데이 H아워는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03시였다. 이날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 별장에 있던, 당시 76세의 흥선대원군은 안타깝게도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는 일본 흉도(兇徒)들의 앞잡이가 되어 경복궁으로 향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이 사건을 조선인에 의한 사건으로 위장해야 할 필요에 따른 오카모토의 절묘한 계략이었다. 이 행렬에는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 조선인까지 가담하였다.
심지어 조선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 이진호(李軫鎬) 등 3명의 현직 대대장들도 한심한 매국노가 되어 이 만행에 합세하였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비참한 명성황후의 최후
이때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단의 일본 낭인(浪人)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 등이 지휘하는 조선훈련대와 합류하여 경복궁으로 쳐 들어갔다.그런데 이들이 경복궁에 당도할 때까지의 경위를 보면 엄청난 비밀작전치고는 한심할 정도로 짜임새가 엉성했다. 그래서 이들의 움직임을 조선정부에서 사전에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을 정도였는데도 몰랐었다.
무엄하게도 이들이 경복궁의 담장을 뛰어넘는 범궐을 감행하려하자 이를 저지하는 궁궐 시위대와 총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숙직하고 있던 경복궁 수비대장 홍계훈(洪啓薰)과 휘하의 많은 조선 시위대 장병들은 목숨을 걸고 이 흉악한 무리들의 기습적인 경복궁 난입을 적극 저지하려 했으나 끝내 장렬히 순국하고 말았다.
결국 궁궐 난입에 성공한 이들 무리들은 각종 무기를 들고 피에 굶주린 이리떼와 같이 경복궁 내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으니 말 그대로 지옥도(地獄圖)와 같았다.
그러다가 명성황후의 침전인 건청궁(乾淸宮) 옥호루(玉壺樓)로 들이 닥쳤다. 현장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왕비를 보호하려다가 미친 듯이 날뛰는 일본 흉도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때 영문도 모른 채 상궁들에게 섞여 잠옷바람으로 떨고 있던, 춘추 44세의 명성황후는 이들에 발견되어 무자비하게 칼에 찔리고 옷이 모두 벗겨졌다.
이들은 처참하게 쓰러진 왕비를, 평소에 왕비가 산책했던 바로 앞의 향원지(香遠池) 물속에 담가서 숨을 끊은 뒤 나무 판자위에 시신을 싣고 옥호루 뒤편에 있는 녹원(鹿園)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곧 바로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묻어버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당시 시해주범들이 일본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왕비를 끌어내 두서너 군데를 칼질한 다음 나체로 만들어 국부검사를 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이 극악무도한 무리들이 왕비 시신의 국부까지 희롱하였다는데 (일부에서는 시간(屍姦)까지 했다고 주장하고 있음) 어찌 이 나라 산천초목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일본 흉도들의 만행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도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우리가 만일 일본 궁성을 쳐들어가 일본 왕 부인을 이런 식으로 처참하게 죽였을 때 저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물론 일본을 비난하기에 앞서 먼저 당시 철저하게 무능하였던 조선왕조를 탓하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아무튼 이 사건은 파란만장했던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처참한 비극으로 꼽히는 국모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이다.
을미사변의 주모자들
당시 일본 정부는 뻔뻔스럽게도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거짓말을 하였지만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는 미국인 교관 윌리엄 매키 다이와 러시아인 기사(技士) 세레진 사바틴, 그 외 많은 조선인들이 그날 새벽의 천인공노할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이 사건에 일본인들이 관여한 사실을 따지고 나서자, 일본정부는 하는 수 없이 시해범인 미우라 등 사건 관련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가두어 놓고 이들에 대한 재판을 형식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자기네들 끼리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증거 불충분”이라는 말 같지 않는 이유를 대면서 피고인 전원을 무죄 석방시키는 쇼를 벌렸다.
그 후 이들 주범들은 이 사건에 대한 공로(?)로 일본의 정계, 관계 등에 거물급으로 출세하는 영광을 누렸다.
장충단의 설립 배경
그 후 고종황제는 을미사변 때 장렬하게 순국한 홍계훈 등 여러 장병들의 충성심을 적극 선양할 필요를 느낀
나머지 이들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제사지내기 위한 초혼단(招魂壇)을 만들게 했다. 지금의 서울 장충체육관과 신라호텔 사이에 조선시대 수도방위와 왕실호위를 맡은 어영청의 한 분영으로서, 도성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다.
이곳에 1900년 9월 19일에 순국한 장병들을 위한 초혼단과 장충비가 완공됐는데 이 초혼단의 이름을 장충단(奬忠壇)이라 했다. 그 후 해마다 봄, 가을에 이곳에서 군악을 연주하고 조총을 쏘면서 제사를 지냈는데 일제는 이 초혼제가 반일감정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장춘단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다가 3.1 독립운동 후인 1919년 6월에는 아예 이 일대에다 벚꽃 수천그루를 심고 광장과 연못, 놀이터, 산책로 등을 꾸민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일제는 엄숙해야할 제사단을 놀이공원으로 둔갑시켰다. 이로써 당시 남산 일대에 살던 자국민들에게 훌륭한 위락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장충단 본래의 고귀한 취지를 완전히 말살시켜 버린 것이다.
그런데 장충단은 6.25 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고,장충단 비석은 서울시 사적 제1호로 지정되어 지금도 서울지하철 3호선 동국대역 옆에 말없이 서 있다.
한자로 된 `獎忠壇'의 세 글자는 고종황제의 어필이고 비(碑) 뒷면에는 충정공 민영환이 글을 짓고 직접 쓴 143자의 비문이 음각돼 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보면
“군인으로서 어려움에 당면해서 죽은 사람이 많으니 슬프다. 그 서릿발, 눈보라에도 늠름하고 당당했던 뛰어난 절개는 밝기가 해.별과 같다”라고 돼 있다.
항상 새롭게 인식해야 할 장충단
지금은 시민들의 친근한 근린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는 장충단 공원이지만 시대가 변하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극일의 민족의지는 묵묵히 감돌고 있다.
그런데 장충단 공원을 찾는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실제는 이곳이 한국 군인정신의 메카(Mecca)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지난 10월 8일 오전 서울 장춘단공원에서 을미사변 때 순국하신 이경직, 홍계훈등 9인의 선열을 추모하는 109주기 장충단제가 봉향되었다. 여기에 관심을 갖는 국민은 얼마나 될 까.
가수 배호의 노래에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있다.
그런데 장충단 공원에 안개가 얼마나 자주 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노랫말도 을미사변과 관련된 기막힌 역사적 의미를 포함하여 순국장병들의 충성심을 기리는 내용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 까.
우리는 이 나라 장래를 책임질 우리의 2세들에게 을미사변과 같은 과거 역사와 장춘단과 같은 사적지에 대해 얼마나 교육을 잘 하고 있는가. 일찍이 “현명한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고 하였다.
변하지 않는 충성심
충성의 사전적인 의미는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다.” 자기의 진심을 다하는 것이 충(忠)이고 거짓없는 진실된 마음이 성(誠)이다.
을미사변 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병들은 비록 국모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군인으로서 충성 한 가닥에 목숨을 걸고 한 점 부끄럼 없는, 장엄한 최후를 마친 무인들이었다. 저녁노을 붉게 물들이며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 석양처럼.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오히려 우리 역사에 영원히 살아남아 충절의 귀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장충단 공원을 찾을 때마다 오늘도 말없이 홀로 서 있는 장충단 비석 앞에 서서 이 비석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고 다시 한번 조국수호를 위한 자세를 더욱 확고하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jeewoog@hanmail.net)
( "향방저널" 200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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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법대19회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범의 거사님
풍악산 산행길을 준비한다고 무척 바쁘시지요?
거사님의 포르투갈, 스페인, 모로코의 여정기를 잘 읽었습니다.
그길을 따라 저도 곧 출발합니다.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길은 가기위하여 있는것이 아니라, 머물면서(止) 생각하기(觀)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데, 거사님께서 예놀았던 길을 많이 생각하면서 한껏 머물고 오겠습니다.
끝마무리가 조금 달라지는데, 바로셀로나에서 하루 더 머물면서 피레네 산맥 안쪽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안도라 공화국을 들릴 예정입니다.
이후로는 地低國에 이틀밤을 쉬면서, 거사님께서 마드리드에서 해후한 권사범을 만날 예정입니다.
한 소식 듣고 오겠습니다.
귀국할 때까지 풍악산, 북한산 산행기가 잘 마무리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