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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다가 주인장하고 이 양반이 어떤 면에서는 닮은 꼴이 아닐까, 생각돼서용..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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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온 많은 일 중 결혼이 최고의 선택"
민노당 사무총장 노회찬
‘밤늦게 김치를 썰다 손을 베었다. 정초(正初)부터 사소한 실수가 잦다.’ ‘소한(小寒)인데 밤공기가 차갑지 않다. 아내는 엠티가고 새벽까지 책을 보다 혼자 잠자리에 들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총선일지의 한 부분(1월 5~6일)이다. 그는 이 문장들을 ‘난중일기’라고 이름 붙였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이 인기다. 각종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도 ‘노회찬’은 검색순위 상위를 지키고 있다. 그는 지난 4·15총선을 앞두고 각종 TV 토론에 출연, 뛰어난 말솜씨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의 팬 카페가 생겨났고, 어록(語錄)까지 등장했다.
노 총장은 1956년생이다.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군대 갔다 온 후 197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자생적’으로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학교 공부보다는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아무런 ‘끈’ 없이 혼자만의 판단으로 1982년부터 노동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에 취직시험을 친 곳은 기아자동차였다. 시험에는 붙었지만 대학 출신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합격이 취소됐다. 이후 노 총장은 당시 인천에 있었던 현대정공 하도급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초보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한 곳도 이곳이다. 노 총장은 그때만 해도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청소년 직업학교에 나가 용접을 배우는 등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84년이 지나면서부터 공장에 소위 ‘대학물’을 먹은 위장 취업자들이 하나 둘 늘었다. 노 총장은 이들을 모아 서클을 만들었다. ‘인천노동자 해방투쟁동맹’이라는 긴 이름의 이 서클은 훗날 민주노총의 일부가 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노동운동가’라고 소개한다. ‘정치가’보다는 ‘운동가’란 말이 더 가깝고 또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겐 강인하거나 투쟁적인 운동가의 이미지보다는 부드럽고 자상한 면이 더 많다. 그의 ‘난중일기’에는 선대본부장으로 바쁜 일정에 쫓기면서도 밥을 짓거나, 장을 보는 등 집안살림을 챙기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는 34세의 나이에 같은 공장에 다니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노 총장은 “이 여자랑 결혼하면 내 인생이 질적(質的)으로 좋아질 것 같았다”면서 “내가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해왔는데 딱 한 가지 성공한 게 결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성 운동가로 일하는 그의 부인은 이제 국민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초선 국회의원의 아내가 됐다.
(황대진기자 djhwang@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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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온 많은 일 중 결혼이 최고의 선택"
민노당 사무총장 노회찬
‘밤늦게 김치를 썰다 손을 베었다. 정초(正初)부터 사소한 실수가 잦다.’ ‘소한(小寒)인데 밤공기가 차갑지 않다. 아내는 엠티가고 새벽까지 책을 보다 혼자 잠자리에 들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총선일지의 한 부분(1월 5~6일)이다. 그는 이 문장들을 ‘난중일기’라고 이름 붙였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사무총장이 인기다. 각종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도 ‘노회찬’은 검색순위 상위를 지키고 있다. 그는 지난 4·15총선을 앞두고 각종 TV 토론에 출연, 뛰어난 말솜씨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의 팬 카페가 생겨났고, 어록(語錄)까지 등장했다.
노 총장은 1956년생이다.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군대 갔다 온 후 1979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자생적’으로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학교 공부보다는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졌고, 그 결과 아무런 ‘끈’ 없이 혼자만의 판단으로 1982년부터 노동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가 처음에 취직시험을 친 곳은 기아자동차였다. 시험에는 붙었지만 대학 출신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합격이 취소됐다. 이후 노 총장은 당시 인천에 있었던 현대정공 하도급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 초보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한 곳도 이곳이다. 노 총장은 그때만 해도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에 청소년 직업학교에 나가 용접을 배우는 등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84년이 지나면서부터 공장에 소위 ‘대학물’을 먹은 위장 취업자들이 하나 둘 늘었다. 노 총장은 이들을 모아 서클을 만들었다. ‘인천노동자 해방투쟁동맹’이라는 긴 이름의 이 서클은 훗날 민주노총의 일부가 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노동운동가’라고 소개한다. ‘정치가’보다는 ‘운동가’란 말이 더 가깝고 또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겐 강인하거나 투쟁적인 운동가의 이미지보다는 부드럽고 자상한 면이 더 많다. 그의 ‘난중일기’에는 선대본부장으로 바쁜 일정에 쫓기면서도 밥을 짓거나, 장을 보는 등 집안살림을 챙기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는 34세의 나이에 같은 공장에 다니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노 총장은 “이 여자랑 결혼하면 내 인생이 질적(質的)으로 좋아질 것 같았다”면서 “내가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해왔는데 딱 한 가지 성공한 게 결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성 운동가로 일하는 그의 부인은 이제 국민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초선 국회의원의 아내가 됐다.
(황대진기자 djhwang@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