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산채(薄酒山菜)를 벗삼아
2022.04.23 23:15
사흘 전이 곡우(穀雨)였다.
봄비가 내려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날이다.
이 즈음 농촌에서는 모내기를 위해 못자리를 만들고,
논에 물을 대고, 갈고, 써레질을 하느라 바쁘다.
예전에는 논을 갈고 써레질하는 일을 소를 이용하여 했지만,
농기계가 널리 보급된 지금은 트랙터가 그 일을 대신한다.
소를 이용하여 하던 때와는 달리 트랙터를 운전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노인뿐인 농촌에서도 써레질이 가능하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트랙터를 운전하고 계신 분도 고희를 진즉에 넘기셨다.
촌부가 지난주에 울안에 심은 상추, 고추, 가지, 토마토의 모종들이
곡우의 시절답게 눈에 띄게 자랐다.
상추는 조만간 첫 수확을 해도 될 판이다.
임인년(壬寅年)도 어느새 1/3이 지나간 것을 생각하면,
계절의 빠른 변화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거기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하릴없이 흰 머리만 늘어가는 촌노(村老)의 처지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반 넘어 늙었으니 다시 젊든 못하여도
이 후나 늙지 말고 매양 이만 하였고자
백발아 너나 짐작하여 더디 늙게 하여라.
이 시조에서 읊은 대로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때가 되면 꽃이 피었다 지고,
곡물이 움을 틔우고 자라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그 섭리는 변함이 없기에 농부는 24절기에 맞추어 그때그때 적합한 일을 한다.
서둘러 미리 할 일도 아니고, 게으름피우며 나중으로 미룰 일도 아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삶이니 욕심을 낼 필요도 없고 억지를 부릴 일도 없다.
말 그대로 순천자(順天者)의 삶이다.
세상만사가 다 이처럼 순천자(順天者)이면 얼마나 좋을까.
각계각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소위 ‘검수완박’의 입법을 한다고 온 나라를 벌집 쑤셔놓듯 하더니,
느닷없이 여야가 합의했다면서,
검찰의 직접 수사를 기존 6대 범죄(경제·부패·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 중에서
경제·부패 사건만 남기고 박탈하며,
그마저도 ‘중대범죄수사청’을 새로 설치하면 완전 폐지한다고 한다.
‘검수완박’을 안 하면 곧 나라가 망할 것 같이 서둘러대던 여당이나,
이와 반대로 ‘검수완박’을 하면 역시 곧 나라가 망할 것 같이 외쳐대던 야당이나,
모두 하나같이,
나라의 형사사법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을
깊은 검토도 없이 밀실에서 후다닥 '검수야합'으로 해치우고는 의기양양해한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만 어이없어 하는 모습이다.
정녕 대한민국의 정치 수준은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일까.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지만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하는 게
고금의 이치임을 모르는 것일까.
뒷메에 뭉킨 구름 앞들에 퍼지거다
바람 불지 비 올지 눈이 올지 서리 칠지
우리는 뜻 모르니 아무럴 줄 모르노라
조선 중기의 시인 정훈(鄭勳. 1563-1640)이 지은 시조이다.
광해군 말기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한 노래다.
그 후 400년 넘은 이 시점에 이 시조가 실감나게 다가올 것은 뭐람,
목하 3월 10일에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앞으로 불과 보름여 남은 5월 10일이면 새 정권이 들어선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경험하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지,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을 할 일이 아니다.
그런 마당에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모르겠다.
새 정권이 들어서서도 힘없는 백성들은 또다시
바람이 불지,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서리가 칠지 아무럴 줄 몰라 전전긍긍해야 하는 걸까.
우거(寓居)의 뒤꼍에 꽃이 만발했다.
그래, 이 풍진 세상에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한낱 촌노(村老)는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그 꽃이나 바라보며
타임머신으로 한석봉(韓濩, 1543-1605)을 불러낸다.
그와 더불어 박주산채(薄酒山菜)를 벗삼아 안빈낙도(安貧樂道) 하자꾸나.
짚 방석 내지 마라 낙옆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솟아 온다
아이야, 박주산채(薄酒山菜)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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