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민둥산)
2010.02.16 12:37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거북바위대사(龜岩大師) 보시게
작년 가을에 통도사에 다녀와 한 조각 글을 띄우고 어느 새 1년이 흘렀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이지만, 그 때 통도사에서 느꼈던 감흥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네. 요새는 어떻게 지내시나? 소식이 뜸하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고 있다네. 나 역시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 보니 연락을 못했네 그려.
나는 지난 주 일요일(10월 21일)에 정선에 있는 민둥산에 다녀왔다네. 우리나라에서 넓은 억새밭이 있는 3대 명산(영남알프스 사자평, 정선 민둥산, 포천 명성산) 중 유일하게 못 가 본 곳이라, 법원도서관 산악회의 정기산행지로 택한 것이라네. 더구나 정선은 沐雨公의 고향으로, 대사나 나에겐 이런저런 인연이 있는 곳이 아닌가.
그나저나 “정선” 하면 강원도에서도 오지라는 이미지가 뇌리에 박혀 있어 참으로 먼 곳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번에 막상 가보니 민둥산 입구까지 2시간 40분밖에 안 걸리더군. 아침 7시 10분에 서초동에서 떠났는데 민둥산 밑 증산마을에 9시 50분에 도착하였다네. 경부고속도로(서초동-신갈), 영동고속도로(신갈-남원주), 중앙고속도로(남원주-제천), 38번국도(제천-영월-증산)를 차례로 이용하였는데, 제천에서 영월까지 4차선 자동차전용도로가 생겨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네.
증산에는 민둥산 억새꽃 축제(기간 9.28.-10.28.)를 알리는 애드벌룬이 높이 떠 있고, 먹거리장터가 서 있었네. 축제가 올해로 12회째를 맞이하다 보니 제법 짜임새를 갖추어, 주차장이나 화장실이 잘 정비되어 있더군. 지방자치가 실시된 후 전국적으로 각종 축제가 열리면서 변모된 모습이 아닐까 싶으이. 주차장은 전국에서 몰려온 차들로 붐볐다네.
등산로는 증산초등학교(정선군 남면 무릉리) 앞에서 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서 시작되었는데, 금방 갈림길이 나오더군. 왼쪽은 완경사길이고 오른쪽은 급경사길인데, 사전 답사를 다녀온 산악회장의 안내에 따라 완경사길을 택하였지.
민둥산은 해발 1,119m인 제법 높은 산이건만, 출발지 고도가 높아서인지 오르막길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네.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라 푹신한 흙길을 걷는 감촉도 참으로 좋았다네.
더구나 등산로의 양옆으로 30m를 훌쩍 넘는 전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마치 소풍을 온 기분이었지. 아마도 인공적으로 조림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어느 산을 가든 숲이 우거진 것이 참으로 보기 좋으이. 중간에 ‘깔딱고개’라고 이름 붙일 만한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산에서 그 정도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이 숲 사이 길을 쉬엄쉬엄 한 시간 정도 올라가니까 등산로와 林道와 만나는 지점에 간이매점 쉼터가 나오더군. 잠시 쉬면서 과일 한 쪽을 입에 넣고 다시 산을 오르는데, 경사가 한결 더 완만해져 어려운 줄 모르겠더라고.
여기서부터는 이제까지의 전나무 일색에서 자작나무, 참나무 등 활엽수가 보였다네. 산의 아래쪽에 침엽수가 있고 위쪽에 활엽수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네. 내 상식으로는 그 반대여야 맞을 것 같은데... 아무튼 여기까지는 민둥산이 아니네.
그 활엽수가 어느 순간 안 보이고 대신 나타난 억새밭, 민둥산은 말 그대로 민둥산으로 나무는 없고 온통 억새밭이었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남북으로 나 있는데, 주말의 북한산을 온 것으로 착각할 만큼 사람이 많아, 남쪽에서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올라간 산 정상에는 발 들여놓을 틈이 없을 정도였네. 정선군에서 마련해 놓은 정상의 쉼터는 이미 만원이었지.
출발지에서 정상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였네.
정상에서 사방으로 보이는 억새밭 전경의 멋짐을 어떻게 표현해야 그대에게 느낌이 전달될까. 어쭙지않게 그려 내느니 직접 가서 느껴 보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네. 영남알프스의 사자평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넓은 이 억새밭(약 20만평)이 생긴 경위는 예전에 산나물이 많이 나오라고 매년 한 번씩 불을 질러 왔기 때문이라고 하더군. 계속되는 산불에 나무는 대부분 없어지고 억새만 자란 셈이지.
이곳의 억새밭은 중간에 다른 잡풀이 거의 섞이지 않고 억새만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네. 사람이 들어가면 묻힐 정도로 키가 큰데다 촘촘하게 밀집하여 있어 길이 아니면 헤쳐 나가기가 어려울 정도이지.
그런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아무데나 들어가 짓밟으면 억새밭이 망가질 것을 염려해서인지, 정선군에서 등산로의 좌우로 목책을 세워 등산로로만 다니게 만들어 놓았더군. 그래도 사진을 찍거나 휴식을 취할 만한 공간은 군데군데 있다네.
아무튼 바람이 불면 키 큰 억새들이 바람 따라 일렁이는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라네(따로 첨부한 동영상을 보시게).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고복수 선생이 부른 이 노래는 어째서 제목이 “짝사랑”일까? 억새가 춤을 추는 모습에서 슬피 우는 가을을 떠올리고, 조각달이 비치는 강물에서 떠나간 짝사랑의 님을 그리는 것일까?
누구는 억새다운 억새로는 이곳이 전국 제일이라고 하더라만, 글쎄 그 정도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네.
민둥산 정상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진기한 풍경은 돌리네(Doline)이네. 석회암 지대에 발달한 침식지형인 카르스트(Karst)에서 관찰되는 원형(또는 타원형)의 움푹 파인 땅을 말하는 것이지.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물에 녹아 땅이 파이는 것이라더군. 강원도에 석회암동굴들이 많이 생긴 것과 마찬가지 원리라네. 정상의 북쪽 사면에 이 돌리네 지형이 있는데, 그 곳에도 예외 없이 억새가 만발하여 있더군. 석회암동굴은 많이 봤어도 이 돌리네 지형은 나도 이번에 처음 보았다네.
정상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능선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도 역시 억새밭이더군. 북쪽의 지억산(1,117m)과 동쪽의 발구덕 마을(고랭지채소 재배단지가 있네)로 갈리는 갈림길에서 발구덕 마을쪽으로 방향을 잡아 하산하였는데, 이정표를 따라 다 내려오고 보니 처음 출발할 때 완경사길과 급경사길로 갈리던 바로 그 지점의 급경사로 내려온 것이더군. 결국 원점회귀형 등산을 한 셈이지.
돌고 도는 게 인생 아니겠나?
귀경길에 화암동굴에 들렀다가 실망만 했네. 화암동굴은 본래 천연의 석회암동굴인데 그 옆에 금을 캐던 갱도를 연결시켜 놓고 그곳을 통하여서만 들어가게 해 놓았더군. 천연의 동굴을 보러 간 사람들더러 인공의 금광갱도를 억지로 보라 하니 이거야 원... 게다가 그 갱도는 또 왜 그리도 긴지...정확히 10년 전에 화암동굴을 처음 찾아갔을 때 느꼈던 감회를 다시 느끼기는커녕 “앞으로 또 올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만 하였다네.
구암대사,
이 가을이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한번 보세나 그려.
2007. 10. 30.
凡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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