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과 끈기(태백산2)
2010.02.16 11:30
은근과 끈기
흰눈으로 치장한 太白山,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異狀暖冬으로 冬來不思冬을 노래하던 때인 1999. 1. 7. 절기로는 小寒 다음날인 이 날 새벽 5시20분. 유일사 입구 해발 950미터 지점에 있는 민박집을 나서는데 왜 그리도 추운지.
그 동안 어디에 숨어 있다가 하필이면 새 해 들어 첫 산행을 하는 날, 내 지도반(28기 7반 A조)의 사법연수생들과 마지막 고별등산을 하는 바로 그 날, 제 모습을 보란 듯 드러낸 추위가 얄밉기만 하였다.
그래서일까,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나마 길을 비춰주는 반달과 그 옆의 북두칠성의 아름다운 자태가 서울의 혼탁한 공기에 찌든 일행에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히말라야 원정대를 방불케 하는 옷차림들에는 얼핏 비장함마저 서렸지만, 내일 모레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연수생들의 얼굴은 여전히 천진난만하기만 하였다.
"오늘 넘어야 하는 이 高山峻嶺만큼이나 여러분들의 앞길에도 험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는 말을 하려다 그냥 삼켜버렸다. 이미 以心傳心으로 알고 있을 테니까.
2시간 여의 산행 끝에 천제단 밑 朱木群落地에 도착하였다. 때맞추어 저 멀리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였다.
雪花가 만발한 朱木들, 그 뒤 雲海 위로 떠오르는 태양, 달력이나 연하장에서 흔히 보는 바로 그 광경이 연출되는 순간이었다. 예술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우리 일행보다 먼저 와 진을 치고 있는 이유를 알 만했다.
그 때의 감동을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보지 않고는 결코 느낄 수 없다'는 말로나 대신할까.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넘는 강추위도, 사람을 날릴 듯 세차게 몰아치는 북서풍도, 한 발 또 한 발 내딛는 凡夫들의 발걸음을 멈추게는 못하였다.
누가 오라는 것도,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 성지순례에 나선 구도자들처럼 묵묵히 산을 오르는 연수생들의 은근과 끈기에서 법조계의 밝은 앞날을 기대하였다면 지나칠까?
지난 여름 치를 떨고 악을 쓰며 치악산을 오를 때 "다시는 교수님이랑 산에 안 갈래요." 하던 연수생들이다.
장군단과 천제단(해발 1,566미터)에는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기도에 몰입하여 있는 사람들이 여전하였다. 무심코 기도를 방해하였다가 큰 홍역을 치른 3년 전의 악몽이 생각나, 그들의 심사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조심했다. 그 흔한 '야호'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다.
대신 그저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게 해 달라고 단군할아버지께 빌고 또 빌었다. 금년 중에 아이를 가질 예정인 연수생들에게는 옥동자를 점지해달라고 빌게 하였다. 비록 강요된(?) 기도였지만 기도 순간만큼은 표정들이 진지했다. 분명 효험이 있으리라.
문수봉(해발 1,517m)에 도착하여 최성환 연수생이 애써 준비해 온 따끈한 라면으로 배를 채우니 추위가 한결 가셨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천하가 다 내 세상이라던가, 30년 가까이 곱게 간직하였던 생살(?)을 하필이면 嚴冬雪寒에 첫 등장시킨 權某 연수생을 제외하고는 하산할 생각들을 안 한다.
천연의 엉덩이썰매를 이용하니 내리뫼길은 금방이었다. 엉덩이는 학교 다닐 때 매 맞는 데나 사용하는 줄 았았는데, 의외로 쓸모가 많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경험은 쌓고 볼 일이다.
기념으로 연수생들과 함께 길가의 눈 속에 엉덩이도장을 찍어 놓았는데(크기로는 조병구 연수생의 것이 압권이었고, 예쁘기로는 林某 연수생의 것이 제일이었다),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산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고, 사람 사이에는 만남과 헤어짐이 필연이다. 2년 동안 정말 깊은 정이 들었던 28기 7반 A조 연수생들의 앞날이 창창하길 빈다.
去者必返이런가, 언젠가는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겠지...(1999. 1. 9.)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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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거사
2018.02.04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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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거사
2024.01.14 13:22
2018. 2. 6.에 이어 그 이듬해인 2019. 2. 9.에도 태백산을 올랐다. 그때는 고등학교 친구들인 춘수와 남식이가 동행했었다. 하산 후 귀가 일정을 번개로 변경하여 낙산사에 들러 하루 묵고 다음날 귀경하였다.
[2019. 2. 9.]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24. 1. 13.에 다시 태백산을 찾았다.
근래 눈이 많이 내린 덕분에 그야말로 설산 산행을 제대로 했다.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들은 다 녹아 없었지만, 등산로는 시종일관 눈밭이었다. 이런 눈길은 아이젠만 제대로 하면 맨땅보다 걷기가 훨씬 편하다. 덕분에 무릎도 안 아팠다. 산행 시 으레 붙이던 파스를 안 붙였음에도.
이날은 유난히 날씨가 화창했다.
전날 일기예보에서 최저기온 영하 6도에 초속 8m의 바람이 불어 체감기온은 영하 14도라고 해서 내심 긴장을 했는데, 웬걸 바람 한 점 없는 영상의 날씨가 종일 계속되었다.
날씨가 따뜻하면 찾아오는 불청객인 미세먼지도 없어 금상첨화였다.
급기야 두꺼운 오리털 등산 파카를 벗어 배낭에 넣어야 했다. 그동안 겨울에 태백산을 여러 번 올랐지만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은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등산로가 인산인해였다.
유일사 입구 주차장부터 승용차와 관광버스로 가득 차더니, 산길은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걷는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본래 태백산이 겨울철 설산 산행의 일번지로 명성을 떨치기는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릴 줄은 미처 몰랐다.
아무튼 겨울의 태백산은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산행 후 2022. 7. 에 개관한 태백호텔의 사우나에서 뜨거운 탕에 몸을 녹일 수 있는 것도 새로이 추가된 즐거움 중 하나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유일사 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하자마자 예전에는 없던 태백사(太白寺)라는 곳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름은 절(寺)이지만 실제는 산신기도를 하는 산당(山堂)이다. 비록 태백산이 신령스런 산으로 무속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긴 하지만 이렇게 등산로가 시작되는 초입에 있는 게 어떤지 모르겠다. 이날도 굿을 하는지 요란한 북소리 장구소리가 산행의 첫발을 내디딘 나그네의 귀를 두드렸다. 명색이 국립공원인데 건축허가가 어떻게 났으려나.
이에 더하여 당골광장의 신성한 단군성전 바로 옆에 붙어있는 정체불명의 집은 또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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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텃골
2024.01.14 21:17
會者定離자정리가 아니라 去者必返필반이라구여?
그렇군여.
만난사람 떠나 보낼 거 생각하고 아쉬움에 젖기 보다
돌아 올거라는 긍정적 이별이야 말로
희망의 메세지 였네여.
절케 꽁꽁 얼어붙은 태백산 정상에도 봄이 올것이고여 -
우민거사
2024.01.15 10:29
설 지나고 나면 눈이 더 많이 와서 4월까지 온대유.
힘들지 않으니 함 가보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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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이후로도 태백산 설산등반을 또 한 적이 있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2005, 2. 6.이었다. 조병구, 김영현 두 판사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변호사 한 명이 동행했었다.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흘러 2018년 2월 3일에 다시 눈덮인 태백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도반으로 황진구, 박영호 두 부장판사와 매일경제의 이현정 기자가 참여하였다.
주중 내내 따뜻했던 날씨가 하필 이날 갑자기 추워지는 통에(그것도 매섭게) 다소 힘들었지만,
천지가 온통 흰 눈으로 덮인 태백산의 겨울경치는 여전히 장관이었다.
산행을 시작할 때는 눈발까지 날렸지만 이내 잦아들었다.
겨울 설산등반의 대명사 답게 등산로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산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자동차도로에서나 있을 법한 정체현상이 등산로에서도 발생하여 수시로 걸음을 멈추어야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출발지인 유일사 입구의 고도가 높아 정상인 천제단까지는 두 시간 남짓 걸렸다.
흰 눈으로 치장한 주목들은 예나 지금이나 멋진 자태를 뽑냈다.
등산로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함백산의 웅장한 모습도 한몫 단단히 했다. 그 함백산이 여긴 왜 안 오느냐고 손짓하는 듯했다. 기회가 되면 내년 겨울에는 가겠노라고 독백 아닌 독백을 했다. 마음 속으로.
[함백산]
천제단에는 바람이 몹시 불어 체감온도가 급강하했다.
제단에는 '단군'을 높여 부르는 말인 "한배검"을 붉은 글씨로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예전에는 못 본 것인데, 언제 세워졌는지 모르겠다.
제단 앞에 선 채로 합장을 하고 단군할아버지와 산신령께 간절히 빌었다.
"부디 이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한케 하여 주소서!!!"
전투식량으로 점심을 먹고 태백산 표지석 앞에서 인증샷(갑제1호증)을 찍은 후 하산했다.
하산은 당초 이제껏 인 산을 오를 때면 하던 대로 문수봉을 거쳐 내려가는 코스를 택하려고 했는데,
이날 따라 그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망경사와 반재를 거쳐 당골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였다.
이 코스는 전자보다 시간과 거리를 단축할 수는 있지만,
계속 내리막이라 무릎도 아프고 무엇보다도 능선길을 걷는 문수봉코스에 비하여 멋진 경치를 볼 수 없는 게 흠이다.
당골광장에서는 눈꽃축제를 하고 있었는데, 규모가 너무 작아 실망스러웠다.
당골광장에는 택시가 많아 출발지였던 유일사 입구의 주차장까지 이동하기가 편했고,
당골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보석사우나"는 산행하느라 추위로 언 몸을 목일 수 있는 말 그대로 보석 같은 사우나였다. 흔히 유행하는 말로 "강추"이다.
휴대폰으로 검색하여 찾아간 음식점 "고갈두"도 한양나그네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고갈두"라는 특이한 이름은 "고등어, 갈치, 두부"의 머릿글자를 모은 것이다.
주말이었음에도 귀경길은 세 시간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