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雪(신설)
2018.12.09 10:47
新雪今朝忽滿地(신설금조홀만지)
況然坐我水精宮(황연좌아수정궁)
柴門誰作剡溪訪(시문수작섬계방)
獨對前山歲暮松(독대전산세모송)
오늘 아침 첫눈이 내려 홀연히 천지를 덮은지라
황홀해서 넋을 잃고 수정궁에 앉았다오.
그 누가 사립문을 섬계처럼 찾아오랴
세모에 앞산 소나무를 나 홀로 마주하네
조선 중종대의 문신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지은 “新雪(신설)”이라는 시이다.
글씨체는 예서 죽간체(竹簡體).
이 시 3구에 나오는 섬계는 그에 얽힌 아래와 같은 고사가 재미있다.
고대 중국 동진 때 문신 왕헌지(王獻之 348-388. 왕희지의 아들이기도 하다)가 산음 땅에 살 때 일이다. 밤에 큰 눈이 내렸다. 문득 잠이 깬 그는 창을 열고 펑펑 내리는 눈을 보았다. 둘러봐도 사방은 고요하다. 들뜬 마음에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문득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안도(戴安道 326-396)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다짜고짜 작은 배를 띄워 밤새 섬계로 배를 저어갔다. 아침에야 배가 대안도의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부르지 않고 그냥 발길을 돌렸다. 하인이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 혼자 흥이 나서 왔는데, 흥이 다해서 돌아간다. 굳이 만날 것이 있는가?"
이 시를 지은 시인도 밤새 곱게 내린 눈을 혼자 앉아 바라보다 괜시리 마음에 흥이 일었나 보다. 하지만 아침에 느닷없이 찾아와 사립문을 두드릴 왕헌지 같은 친구가 없으니 어쩌겠나. 허전한 대로 그냥 세모에 앞산 사철 푸른 소나무나 바라볼밖에.
*2016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