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僧軸(제승축)
2018.12.14 14:34
山擁招提石逕斜(산옹초제석경사)
洞天幽杳閟雲霞(동천유묘비운하)
居僧說我春多事(거승설아춘다사)
門巷朝朝掃落花(문항조조소낙화)
산이 품에 감싸 안고 있는 돌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니
구름이 감춰놓은 깊은 골짜기에 절이 하나 나오는데,
그곳에 계신 스님이 한 말씀 하신다.
"봄이 오니 일이 많구나. 아침마다 절 문 앞에 떨어진 꽃잎들을 쓸어야 하니!"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任有後(임유후. 1601년-1673)가 지은 시 "題僧軸(제승축. '스님의 두루마리에 쓰다'라는 뜻)"이다.
바야흐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의 계절, 번잡하고 바쁜 일상을 벗어나 산사를 찾는다.
산이 감싸고 있는 돌길은 구불구불 올라가고, 그 길을 따라 구름이 숨겨 둔 깊은 골짜기에 다다르니
수줍은 듯 자태를 감춘 절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 절 문에 들어서자 스님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봄이 되니까 일이 많아 정말 바쁘네.“
무슨 일로 그리 바쁘냐고 물으니,
“아침마다 절문 앞에 떨어져 있는 꽃잎들을 쓰느라 바쁘다오.”
라고 대답한다.
과연 눈에 보이는 꽃잎을 쓰느라 바쁜 걸까?
안거 동안 면벽하고 밀어냈던 번뇌들이 안거가 끝나고 봄이 되니 다시 찾아온 것은 아닐까,
간밤에 부처님 전에 108배, 아니 3,000배를 올리며 끊고자 했던 분별시비의 번뇌가 아침이 되니 다시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쓸면 떨어지고 쓸면 또 떨어지는 꽃잎들처럼,
계속하여 피어오르는 번뇌를 쓸어 담으려 안간힘을 쓰니 어찌 바쁘지 않으랴.
천수경에 나오는 말 그대로
“煩惱無盡誓願斷(번뇌무진서원단)”이다.
*2015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