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탁 시.jpg

 

竺僧前立當吾門(축승전립당오문)

梵宮真相眉棱尊(범궁진상미릉존)

古琴大軫長八尺(고금대진장팔척)

嶧陽老樹非桐孫(역양노수비동손)

 

천축(=인도)의 고승이 문 앞에 서 있는 듯하고

불국토의 존귀한 불상처럼 눈썹뼈가 위엄 있고 숭고하네

이 오래된 거문고는 길이가 팔 척이나 되는데

역양의 오래된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지 어린 나무로 만든 게 아니다

 

   이 시는 이하(李賀. 791~817)가 지은 '청영사금가(聽穎師琴歌. 영사스님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 중 네 구절을 명말청초(明末靑初)의 서화가 왕탁(王鐸. 1592~1652)이 행서로 쓴 것을 다시 임서(臨書)한 것이다.

  글씨체는 행서

 

 

   이하(李賀. 791~817)는 당나라의 시인으로 기이한 상상력과 강렬한 이미지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사용된 적이 없고 쉽게 연상하기 어려운 비유를 들거나 새로운 말을 지어내 시에 즐겨 썼다그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한 까닭에 이하(李賀)의 시는 주()가 없이는 읽기가 어렵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위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간단히 감상해 본다.

 

別浦雲歸桂花渚(별포운귀계화저이별하는 포구의 구름은 계수나무 물가로 돌아가고,

蜀國弦中雙鳳語(촉국현중쌍봉어촉나라 거문고 줄 위에서는 한 쌍의 봉황이 속삭이듯 하네.

芙蓉葉落秋鸞離(부용엽락추란리연잎 지는 가을날 외로운 난새가 떠나가는 듯하더니,

越王夜起遊天姥(월왕야기유천모월왕(=구천 勾踐)이 밤중에 일어나 천모산을 거니는 듯하네.

暗珮清臣敲水玉(암패청신고수옥허리 장식을 숨긴 청렴한 신하가 옥을 두드리는 듯하고

渡海蛾眉牽白鹿(도해아미견백록바다를 건너는 미인이 흰 사슴을 이끌고 가는 듯하다

誰看挾劒赴長橋(수간협검부장교그 누가 보았는가칼을 품고 장교로 달려가 악룡을 베던 주처(周處)의 용맹함을.

誰看浸髮題春竹(수간침발제춘죽그 누가 보았는가머리카락을 적셔 봄 대나무에 피눈물로 시를 쓰던 아황과 여영의 슬픔을.

竺僧前立當吾門(축승전립당오문정신을 차려보니 인도 고승(영사 스님)이 내 문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고,

梵宮真相眉稜尊(범궁진상미릉존사찰에 모신 진짜 법상처럼 눈썹뼈가 위엄차고 숭고하구나.

古琴大軫長八尺(고금대진장팔척) 스님이 타고 있는 이 거문고는 그 길이가 여덟 자나 되고,

嶧陽老樹非桐孫(역양노수비동손역양의 오래된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지 그 어린 자손 나무가 아니라네.

涼館聞弦驚病客(양관문현경병객서늘한 객관에서 거문고 소리를 들은 병든 나그네가 깜짝 놀라,

藥囊暫別龍鬚席(약낭잠별룡수석약주머니도 잠시 잊은 채 용수초 돗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네.

請歌直請卿相歌(청가직청경상가이 위대한 연주는 모름지기 재상쯤 되어야 청해 들을 수 있는데

奉禮官卑復何益(봉례관비부하익나처럼 낮은 봉례관 따위가 감상의 시를 지어 올린들 무슨 보탬이 되랴

 

   시인은 영사(穎師) 스님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 찬탄해 마지않는다시인은 고승(竺僧), 불상(梵宮真相). 명품 나무(嶧陽老樹)를 동원하여 스님의 거문고와 그 연주를 신비하고 성스런 존재로 묘사한다.

 

   ‘역양노수비동손(嶧陽老樹非桐孫)’은 거문고와 관련된 유명한 글귀로훌륭한 거문고는 평범한 재목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견딘 명품 나무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중국에서 거문고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는 나무는 산동 지방의 역산(嶧山일대에서 나는 오동나무가 특히 유명한데영사 스님이 지금 연주하고 시인이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거문고는 그중에서도 천년 영기를 품은 고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최고의 거문고이기에이를 연주하는 영사 스님의 거문고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인간 세계와 신선 세계를 잇는 소리여서연주를 함에 따라 소리가 미묘하게 변하여때로는 바람 같고때로는 용이 울부짖는 것 같고때로는 맑은 샘물이 흐르는 것 같고때로는 봉황의 울음소리 같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다 보니 마치 서역에서 온 고승이 집 앞에 서 있는 것 같고숭고한 불상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다.

 

   시공을 넘나드는 시인의 감상이 불현듯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서늘한 객관에서 거문고 소리를 들은 병든 나그네(=시인)는 그만 그 소리에 매혹되어 병을 잊은 채 약봉지를 내려놓는다그리고 새삼 감탄한다고관대작이나 청해 들을 수 있는 이 멋진 소리를 미관말직의 하찮은 나그네가 듣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2026년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