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楊朱)의 사철가
2010.02.16 14:24
주지하는 것처럼, 중국 역사에서 주(周)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아 수도를 호경(鎬京)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긴 BC 770년부터 춘추시대라고 부르고, 그 후 춘추오패(春秋五覇) 중의 하나인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의 3나라로 쪼개진 BC 403년부터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두 시대를 합하여 흔히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르며, 이러한 상태는 BC 221년 진(秦)이 전국을 통일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공자와 맹자로 대변되는 유가(儒家)를 비롯하여, 도가, 법가, 음양가, 묵가, 종횡가 등 각종 사상이 만개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릴 정도였다. 저 마다 입이 달렸으면 나름대로의 사상을 펼쳤다고나 할까. 전국시대에 활약하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술한 책들 중에 유명한 것이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全國策)이다.
전국책은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여러 사람에 의하여 소개되었다. 그 중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 조성기가 쓰고 동아일보사가 출판한 “새롭게 읽는 전국책”(총 2권)이 있다. 책 한 권의 두께가 800 여 쪽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지만,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이 책의 1권에 노자의 제자였던 양주(楊朱)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한 마디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의 신봉자였다. 그답게 여성편력이 화려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그에 관한 부분을 읽다 보면 눈이 갑자기 확 뜨이는 장면이 나온다. 거두절미하고 그 부분(299-300쪽)을 인용해 보면,
“백 년이란 사람 목숨의 최대 한계이므로 백 년을 사는 사람은 천에 하나 꼴도 안 된다. 설사 백 년을 살다 한들....잠자는 시간, 헛생각을 하는 시간, 아프고 병들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시간들을 제하고 나면 정작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자득(自得)한 시간은 조금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동안 무엇을 중점적으로 해야 하느냐. 기회만 있으면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을 즐길 것인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 음악과 여자를 즐겨야 한다....죽은 뒤의 명예 같은 것이야 구더기에게나 주어라.”
이 부분을 읽다 보면 마치 판소리 단가인 '사철가'를 듣는 기분이다. 설마하니 그 옛날 양주(楊朱)가 사철가를 부르지는 않았을텐데...
판소리 단가인 사철가는 1950-60년대에 우리나라 판소리계를 주름잡았던 명창 동초 김연수선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양주(楊朱)가 우리나라의 김연수 선생으로 환생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보다는 아마도 사람의 생각이란 게 예나 지금이나 다 비슷한 때문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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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가는 어떤 소리인가?
국악에 관한 문외한인 내가 사철가에 관하여 아는 지식은 극히 단편적이다. 영화 서편제에서 처음 접한 후 참으로 멋진 소리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판소리 단가를 대표하는 소리라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 후 생각날 때마다 입속에서 흥얼거리기는 하지만, 아직도 정확히는 아는 게 없다. 그러던 차에 인터넷(http://blog.naver.com/gohyh5?Redirect=Log&logNo=80035716355)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보았기에 여기에 옮긴다.
사철가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는 단가 첫 대목처럼 꽃을 보며 봄을 느끼는 계절이 되었다. 봄을 노래한 국악곡이 한두 가지가 아니건만, 유난히 사절가의 첫대목이 귀에 쟁쟁한 까닭은 지난 해 CD로 나온 김연수 명창의 단가의 멋에 아직까지 흠뻑 취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음반은 1969년에 녹음된 것을 다시 CD로 낸 <단가집>인데 여기에는 김연수, 박초월, 박록주, 성우향이 부른 단가의 명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김연수 명창이 부른 '이산저산'은 <사시풍경>이라는 이름으로 맨 처음에 들어 있는데, 무르익은 멋을 한껏 머금었다가 툭 뱉어내듯이 운을 떼는 '이산저산'이 참으로 멋지다.
그런데 김연수 명창이 부른 '이산 저산'은 뿌리깊은 나무 단가 음반에 담긴 정권진의 '이산 저산'이나 영화 <서편제>에서 아름다운 산경치를 배경으로 유봉(김명곤역)이 부르던 '이산 저산'과 달라서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라는 가사를 기대하고 이 음반 을 듣는데, 김연수 명창은 '이산 저산 꽃이피면 산림풍경 너른 곳 만자천흥 그림병풍...'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노래의 제목도 어디서는 노래의 첫 대목을 따서 '이산 저산'이라 하기도 하고 단가사설을 모은 책이나 음반에서는 아를 <사절가>, <사철가> 또는 <사시풍경>이라고 하니, 왜 이렇게 둘쭉날쭉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두 노래를 음반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두 자료를 사설에 바탕을 두어 비교 해 보면 다음과 같다.
[뿌리 깊은 나무]음반에 담긴 정권진의 <이산 저산>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느냐? 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錄陰芳草勝花時)라' 예부터 일러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상풍(寒露霜楓) 요란허여,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黃菊丹楓)도 어떠한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落木寒天)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여 은세계 되고보면, 월백(月白) 설백(雪白) 천지백(天地白)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와,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들어 보소. 인간이 모두가 팔십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에 만반진수(滿盤珍羞)는 불여생전일배주(不如生前一杯酒)만도 못하니라.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마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가지마라 가는 세월 어쩔그나. 늘어진 계수나무 끌어다가 대랑 매달아 놓고 국곡투식(國穀偸食)허는 놈과 부모 불효 하는 놈과 형제화목 못하는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서 "한잔 더 먹소, 들 먹게"하면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세.
[지구 음반]에 담긴 김연수의 사시풍경(이산 저산)
이 산 저산 꽃이 피면 산림풍경 너른 곳 만자천흥 그림병풍 앵가접무 좋은 풍류 세월 간줄을 모르게 되니 분명코 봄일러라.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는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숨심하네.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왓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 데가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옛부터 일렀으니, 작반등산 답청놀이며 피서 임천에 목욕구경 여름이 가고 가을된들 또한 경개 없을 손가 상엽홍어이월화라 중양추색 용산음과 한로상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잖는 황국단풍은 어떠허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되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천산비조 끊어지고 만경인종 없어질적 백설이 펄펄 휘날리면 월백 설백 천지백 허니 모두가 백발의 벗일레라. 그렁저렁 겨울이 가면 어느덧 또하나 연세는 더 허는디 봄은 찾아 왔다고 즐기더라. 봄은 갔다가 연년이 오건만 이내 청춘은 한 번 가고 다시 올 줄을 모르는가. 어와 세상 벗님네들 인생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인수순약 격석화요 공수래 공수거를 집착허시는 이가 몇몇인고. 노세 젊어 놀어 늙어지며는 못노나니라. 놀아도 너무 허망이 허면 늙어지면서 후회되리니 바쁠 때 일하고 한가할 때 틈타서 좋은 승지도 구경하며 할 일을 하면서 놀아보자.
이 두 노래는 네 절기의 아름다운 풍광은 연년마다 어김없이 순환되지만 사람은 한 번 늙어지면 인생의 봄이라 할 젊음이 다시 오지 않으니 세월을 아껴가며 살라는 권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하다. 다만 김연수의 '이산 저산'에는 각 계절의 아름다움을 수식한 문구가 정권진의 '이산 저산' 보다 더 많이 보완되어 있고, 수식어구가 정확하게 들어있다. 그리고 노래의 끝 부분에서 김연수의 '이산 저산'에는 늙기 전에 놀되 너무 허망히 놀면 후회되는 일이 많으니 한가한 틈을 타 노는 것이 좋겠다고 마무리된 반면, 정권진의 '이산 저산' 에서는 불효하고 죄지은 놈부터 저 세상으로 보내 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끼리 넉넉하게 즐겨보자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어 뒷맛이 사뭇 다르다.
그리고 노래의 음악적인 면에서는 두 노래가 거의 유사한데, 김연수 명창의 '이산 저산'은 역시 사설의 발음이 정확하고 사설에 맞는 음악표현이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어 감칠맛이 나고 정권진 명창의 '이산 저산'은 훨씬 담백한 쪽에 가깝다. 두가지 '이산 저산'은 이렇게 부분적인 차이점을 지닌 두 가지의 판으로 남아 있는 셈인데, 요즘은 영화 <서편제> 덕분인지 뿌리 깊은 나무의 것이 더 널리 불리우는 것 같다.
그런데 한명희 저 [우리가락 우리문화]에 소개된 <사절가>글을 보면 이 노래는 1950~60년대에 김연수 명창이 지어 부른 것이라고 되어 있어 '이산 저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연수(호:東草)는 1907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서당 교육을 통해 한문을 배우고 이어 신학문도 경험한 후 다소 뒤늦은 나이인 스물 아홉에 유성준 명창의 문하에 들어 소리 인생을 시작하여 현대 판소리 전승사에 큰 공헌을 남긴 명창이다. 그는 유성준에 이어 송만갑.정정렬 등을 사사하면서 소리 공부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지만 본디 타고난 목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연수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끊임없이 판소리 탐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사설의 전달이 정확하고 극적 표현이 빼어난 소리로 평가받는 '동초제 판소리'를 이루어 냈다.
뿐만 아니라 김연수는 어린 시절부터 쌓은 한문 실력으로 판소리의 사설을 다듬는데 심혈을 기울여 [창본 춘향가]등, 판소리 전 바탕의 창본을 완성하였다. 1962년에는 국립창극단 초대장을 역임하였고, 1964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었으며 그의 제자 오정숙에게 동초제 판소리를 고스란히 전수시켜 그의 소리맥을 이어가게 한 뒤, 1974년 3월 9일, 6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한명희의 글에 의하면 김연수는 작고 하기 얼마 전에 동양방송에서 이 노래를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의 장면을 한명희의 글에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上略)...그가 작고하기 얼마전 당시 동양방송 PD로 근무하던 한명희는 김연수 명창을 모시고 방송 녹음을 했다. 그때 고수 이정업의 반주로 판소리 몇대목과 함께 불렀다. 오랜만에 녹음 하러 온 그의 모습은 다른 때와는 달리 초췌했다. 녹음이 끝난 후 그는 전에 없던 주문을 해 왔다. 방금 녹음한 사절가를 조용히 다시 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녹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쁘다고 총총히 돌아가던 여느때에 비하면 이변에 가까운 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조용한 사무실 한구석에 녹음기를 틀어 놓고 방금 녹음한 사절가를 육중한 침묵과 함께 들었다....(中略)... '인생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이수순약 격석화요 공수래 공수거를 짐작하시는 이가 몇몇인가.'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예 명창의 눈은 지그시 감겼고, 병색으로 창백해진 표정에는 깊은 우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절가가 끝나자 두 명인의 콤비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렇다할 작별의 말도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얼마후에 김연수 명창은 유명을 달리했고, 명창이 작고한 그 다음해에 당대의 명고수 이정업 옹 역시 저승에 가서도 북반주 해 달라던 명창의 권을 좇아서 인지 끝내 타계하고 말았다....(下略)"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기도 한 이 얘기를 읽고 다시 듣는 김연수의 <이산저산>의 느낌은 그전에 듣던 것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글을 통해 김연수의 <이산저산>에 북장단을 맞춘 이정업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다가온다.
이정업은 1908년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와리의 예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해금연주와 줄타기 등의 수업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이 타고난 고수였다고 하는데, 이정업은 1961년에 줄타기 공연 중 사고를 당할 때까지 주로 줄타기 명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이후 그동안 익힌 음악 수업과 경험을 바탕으로 전업 고수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정업은 김연수 명창의 수행 고수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절친했는지, 김연수 명창은 작고하기 전 '내가 죽으면 저승가서 누가 내 소리에 북을 쳐주나, 자네를 데리고 가야겠다' 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더니 김연수 명창이 타계한 지 보름 만에 이정업 명인도 이승을 떠나고 말아, 이 이야기는 국악계의 유명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김연수 명창이 부르고, 이정업 명인이 북을 잡아 녹음을 남긴 '이산저산'은 곡명이 <사시풍경>, 또는 <사절가>, <사철가>로 각각 달리 언급되는 것은 어떤 연유인지 더 연구해 봐야 할 과제로 부각되었지만, 다같이 '이산저산' 으로 시작되는 사절가의 두 가지 판이 있으며, 그 중에 하나는 김연수 명창이 다듬어 남긴 절창이라는 점을 그의 음반을 들으며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정현(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