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충격(판소리와 나)
2010.10.06 22:24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펀제를 보고 문화적 충격(서구문화에 젖어 정작 우리 것을 너무 몰랐다는 자괴감)을 받은 후
판소리를 배워 보겠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다 2005년이 되어서야 입문하게 되었다.
민요판소리 동호회인 소리마루에 다니면서 명창 김학용선생님(국립창극단 부수석)한테 귀동냥으로 배우기를 5년, 아직은 여전히 초보자 단계이지만, 어떻든 우리 조상들의 애환이 그대로 녹아 있는 우리의 소리를 한다는 자부심만은 늘 지니고 있다.
아래는 2010. 10. 5. 동아일보 eTV에 방영된 내용이다.
우리 소리의 보급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
http://etv.donga.com/view.php?code=station&idxno=201010050037142
[보도 내용]
“엄청난 문화적 충격”민일영 대법관
등록 2010.10.05.
(박제균 앵커) 사법부의 최고기관인 대법원 하면 딱딱하고 엄숙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분들 많으실 텐데요. 한 대법관이 흥겨운 우리 가락을 배우고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어 화제입니다.
(구가인 앵커) 벌써 5년째 민요와 판소리를 익혀 왔다는 민일영 대법관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민 대법관의 특별한 판소리 사랑을 이정은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
서울 연지동의 한 빌딩 사무실. 늦은 저녁 불을 밝힌 작은 공간에서 판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민일영 대법관은 민요와 판소리 동호회인 이 곳 `소리마루`에서 꾸준히 소리 연습을 해 왔습니다.
춘향전의 한 대목인 쑥대머리에서부터 창부타령, 진도아리랑까지 다양한 우리 가락이 이어집니다. 민 대법관은 경쾌하고, 때로는 애끓는 선율을 막힘없이 풀어냅니다. 창극 도중에는 능청스러운 대사를 던지기도 합니다.
그가 이 곳에서 소리 연습을 시작한 것은 2005년. 소리마루가 설립된 직후부터 초창기 멤버로 함께 활동해 왔습니다. 2007년 심청전 공연에 `충청도 봉사`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민 대법관 인터뷰) 1993년에 서편제라는 영화를 봤어요. 근데 거기서 판소리 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야, 저걸 꼭 배워보고 싶다...
서편제의 임권택 감독과 배우 오정해 씨와의 인연으로 알게 된 이 동호회에서 민 대법관은 진지하고 성실한 회원으로 통합니다. 국립창극단 부수석인 김학용 선생에게 개인 수업을 받았고, 소리꾼들이 득음을 하기 위해 깊은 산 속에서 시도하는 이른바 `산 공부`도 두 차례 다녀왔습니다.
(민일영 대법관 인터뷰) 30분만 하게 되면 아마추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완전히 가 버려요. 목이 가서 소리가 안 나와요. 그걸 억지로 소리를 내기 위해서 배에다 힘을 줘서 소리를 내려고 하면 온몸이 쑤시고 엄청 힘들어요.
민 대법관은 사법연수원의 제자들과 후배 법조인들에게 틈날 때마다 우리 가락의 소중함을 강조합니다. 지난해 청주지방법원장으로 있을 때는 명창을 초청해 판소리 공연 행사를 열었고, 그 공연에서 직접 한 소절을 뽑기도 했습니다.
(김 재관 소리마루 사무국장) 공직에 계신 분들이 우리의 음악에 대해서 직접 몸소 실천을 많이 하셔야 하는데 그런 분들이 많지 않으셔서 아쉬움이 많은데, 대법관님은 이걸 직접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직접 본인이 참여해서 배우시기도 하고 공연도 배우시고....
민 대법관이 가장 좋아하는 곡은 흥보가 중의 화초장. 4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흥보가를 완창해 보는 것이 꿈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락을 더 연마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을 이루기는 쉽지 않습니다. 쏟아져 들어오는 대법원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연습시간을 내기가 빠듯하기 때문입니다.
(민 대법관 인터뷰) 대법관이 된 이후로는 업무에 쫓기다 보니까 도저히 배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오고가는 차 안에서 테이프를 듣는 것으로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격무 속에서도 우리 소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끈을 놓지 않는 민 대법관. 그가 가슴 속에서 끌어내는 한국의 가락이 가을과 함께 깊어갑니다.
동아일보 이정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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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西施)와 판소리
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때 오나라와 월나라는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싸웠다. 그래서 널리 알려진 대로,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臥薪 : 와신) 월나라 왕 구천(句踐)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고, 부차에게 패한 구천은 쓸개를 핥으면서(嘗膽 : 상담) 복수를 다짐하여 역시 그 뜻을 이루었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까지 탄생시켰다.
그 때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미인계를 사용하였는데, 이 미인계에 등장하는 인물이 서시(西施))이다.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에서는 미인의 대명사로 불린다. 오나라 왕 부차한테 패한 월나라 왕 구천의 충신인 범려(范蠡)가 서시를 훈련시켜 호색가인 부차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 전해진다.
서시는 본래 중국 절강성 어느 나무꾼의 딸이었다. 마을의 서쪽에 사는 시(施)씨 성을 가진 여인이라 서시라고 불렸다. 그 마을의 동쪽에도 역시 시(施)씨 성을 가진 추녀가 살았는데, 동쪽에 산다고 하여 동시(東施)라고 불렸다. 추녀인 동시는 동네의 예쁜 여인들의 행동과 자태를 흉내 내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애썼다. 때문에 서시는 동시에게 자연히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는 서시처럼 되기 위하여 늘 서시의 행동을 관찰하고 따라 했다. 지병인 가슴앓이가 있었던 서시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갑자기 통증을 느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본 동시는 그것이 바로 서시가 남들한테서 미인으로 칭송받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여 자기도 가슴을 움켜쥐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돌아다녔다. 그렇지 않아도 못생긴 동시가 얼굴까지 찡그리며 다니니 오죽했겠는가. 동네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동시를 더욱 멀리하였다. 마을의 부자는 동시의 이런 모습을 보고 굳게 대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은 처자를 이끌고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동시효빈’(東施效嚬)이라 하여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박재희 지음, 『3분 古典』, 도서출판 작은씨앗, 2010, 152-153쪽 참조].
Ⅱ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대학에 다닐 때까지, 아니 그 후 사회인이 되어 한동안 활동하기까지 내가 배우고 접한 문화는 대부분 서구문화 일색이었다. 비록 공연 내내 꾸벅꾸벅 졸망정 비싼 돈(‘거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을 주고 오케스트라나 뮤지컬 혹은 발레를 보아야 교양인이었다. 우리의 감성에는 맞지 않아도 헐리우드나 프랑스에서 만든 세칭 ‘고상한 영화’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어야만 문화인이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모르면 천하의 무식쟁이로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1977. 8. 16. 엘비스 프레슬리(Elvis Aron Presley)가 갑자기 죽었을 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가 아니 어떻게 그를 모를 수가 있냐고 외계인 취급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서구문화는 한 마디로 서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 시절을 보낸 나에게 1993년 단성사에서 상영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판소리, 우리에게 이런 소리가 있었다니! 영화 속의 판소리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런 소리, 그것도 우리 조상들의 혼이 그대로 녹아 있는 소리를 이제야 처음으로 접하다니... 끝없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누구인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혼돈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판소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때 나는 판사, 변호사, 대학교수 등이 모여 대법원판례를 중심으로 민사재판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는 모임인 민사실무연구회라는 학술단체의 간사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 연구회는 매월 개최되어 학술발표 및 토론을 하는데, 매년 12월에는 송년회를 겸하여 사회 각계의 저명인사를 초빙하여 강연을 듣는 것이 관례였다.
영화 서편제가 상영된 1993년의 12월, 나는 회장님(김상원 대법관님)의 허락을 받아 영화 서편제의 임권택 감독님과 주연배우 오정해씨를 초빙하였다(생면부지의 분들이라 임권택 감독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내 어렵게 승낙을 받았다. 당시 새 영화 태백산맥을 지리산에서 촬영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초빙에 응해 주신 데 대하여 지금도 새삼스레 감사한 마음이다).
임권택 감독님이 서편제 영화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게 들려주었고, 이어서 오정해씨(본래 판소리 명창이다)가 판소리의 눈대목(판소리 한 바탕 중 특히 많이 불리는 대목을 일컫는다) 몇 군데를 직접 구연하였다. 영화와 달리 육성으로 직접 판소리를 들으니 소름이 끼쳤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배워야 한다."
마음속으로 새삼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그 후로도 임권택 감독님과 오정해씨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지만, 정작 판소리를 배우는 것은 이런 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2005년 5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작하게 되었다.
이제는 소리판을 사실상 떠난 오정해씨가 명창 김학용선생님(현재 국립창극단 부수석)을 소개하여 주었고, 김학용 선생님이 지도강사로 계신 민요판소리 동호회 ‘소리마루’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귀동냥으로 배우기를 5년, 아직은 여전히 초보자 단계이지만, 어떻든 우리 조상들의 삶의 애환과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는 우리의 소리를 한다는 자부심을 늘 지니고 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주위 사람들에게도 판소리를 배워 볼 것을 권한다.
이제 서구문화, 서양음악은 나에게는 더 이상 서시(西施)가 아니다.
내가 청주지방법원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6월, 명창 김학용 선생님을 비롯하여 강승의 선생님, 김재관 선생님 등을 초빙하여 청주지방법원 강당에서 판소리 공연을 하였다(춘향가, 심청가, 흥보가의 눈대목).
이 때 법원 직원들보다 오히려 인근 주민들이 더 많이 와 대성황을 이루었다. 대부분 판소리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었음에도 무대 위의 소리꾼과 더불어 같이 울고 같이 웃으며 너무도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무대의 위와 아래가 혼연일체가 되는 소리판, 그것이 바로 판소리의 진면목인 것이다.
나도 공연의 마지막 순간에 무대 위로 불려가 흥보가 중 화초장 대목을 불렀는데, 그 바람에 팬클럽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 후로도 기회가 되면 이 화초장을 즐겨 부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