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대법원장 퇴임사
2011.09.24 00:00
이용훈 대법원장님이 6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오늘 퇴임하셨다.
각종 언론매체들은 공과를 놓고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 당부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법원도서관장을 하면서 2년 반 동안, 그리고 대법원에서 2년 동안 지근 거리에서 뵙고 느낀 소감은 당신은 한 마디로 "판사 그 자체(Richter an sich)"라는 것이다.
도서관장보다도 더 신간 법률서적을 꿰고 계시고, 주심 대법관보다 더 대법원 전원합의 안건을 분석, 검토하시고, 퇴임을 정확히 1주일 앞두고도 열성적으로 전원합의를 주재하시는 당신의 모습에 "판사 그 자체(Richter an sich)"라는 표현 외에 달리 무슨 사족을 붙일 것인가. 늘 건강하시길 빈다.
아래는 퇴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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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제14대 대법원장의 임기를 마치고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정든 사법부를 떠납니다. 내 인생의 거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하는 법원을 떠나면서 내 마음 속에 그리던 사법부의 모습을 제대로 이룩하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그러나 사법부는 어느 한 사람의 사법부가 아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러분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전국의 사법부 구성원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했던 지난 6년간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사법부를 만들기 위한 진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이룩한 작은 성과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여러분 모두의 협동적이고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간 사법부의 발전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재임기간 내내 국민이 진정 신뢰하는 사법부를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여 왔습니다. 사법부가 국민을 섬기는 법원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 아래, 사법부의 주인인 국민의 시각과 입장에서 사법부의 변화와 혁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국민의 사법에 대한 신뢰도는 아직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오늘의 사법부 현실과 국민이 여망하는 사법부 사이에는 커다란 틈새가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틈새를 메워 국민의 신뢰를 반드시 얻어 내야 합니다. 국민의 신뢰라는 바탕 없이는 실질적 법치주의의 구현이라는 사법의 목표를 결코 실현할 수 없습니다. 사법부가 국민의 기대와 눈높이에 맞는 변화와 혁신을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에 정의를 바로 세우는 제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자칫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조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초심을 잃지 말고 꾸준히 사법부의 변화와 혁신을 이루어 나가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법관 여러분!
법관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재판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법부의 독립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지난 사법의 역사는 사법부 독립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리나라가 민주화를 제대로 이룩하였다고 하지만, 아직도 사법부의 독립을 위협하는 요소는 도처에 산재해 있습니다.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 내는 것은 법관 여러분 개개인의 불굴의 용기와 직업적 양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법관의 독립을 제대로 지켜 내지 못한다면, 주권자인 국민이 우리 사법부에 맡긴 사법 본연의 임무를 결코 완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사법의 목표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사법부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쟁을 실질적이고 종국적으로 해결하는, 명실상부한 최종 분쟁해결기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법부의 판단이 우리 사회에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정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법부가 이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확고히 자리 잡을 것입니다. 재판이 분쟁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거나 심지어 새로운 분쟁의 씨앗이 된다면, 그것은 국민과 국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재판은 국민의 신뢰와 승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점을 명심하셔서 정의의 최종 선언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사실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 판단은 재판당사자의 장래뿐만 아니라 주변, 나아가 우리 사회와 국가의 미래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제 법관은 단순히 과거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법에 따른 결론을 내리는 것을 넘어서서 개인과 사회의 미래를 창조하는 새로운 역할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법을 다스림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수단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법관 여러분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데에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수결의 원리가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칫 소외되거나 외면당할 수 있는 소수자를 보호하는 것은 사법부에 부과된 기본 책무 중의 하나입니다. 사법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이들이 기댈 수 있는 편안한 언덕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열린 마음으로 이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그 눈물을 닦아 줄 때, 국민들도 우리 사법부를 서서히 신뢰하고 지지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법원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사법부라는 하나의 배에 올라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함께 항해하는 동반자입니다. 사법부가 그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에는 많은 난관과 갈등이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난관과 갈등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 진심어린 소통과 교류를 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화합과 단결 없이는 사법부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법관과 일반직원은 모두 재판작용을 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유기체란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협력하여 나갈 때,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더한층 높아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법부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사법의 미래를 설계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사법제도 전반을 정보화 사회에 알맞게 바꾸어 나가고, 정보화 사회 이후에 도래할 새로운 사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거기에 걸맞은 사법제도는 무엇인지에 대하여서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는 선진국의 사법제도를 모방하거나 추종하는 단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국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사법제도를 고안하여 선진국과 당당히 겨루면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사법부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저는 지난 6년 동안 우리 사법부 안에서 그러한 싹을 보았습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우수한 우리 사법부 구성원들이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법부 구성원 여러분!
저는 6년 전 대법원장에 취임하면서 가슴 속에 품었던 꿈과 소망을 여러분에게 남겨두고 떠납니다.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사법부, 더 나아가 존경받는 사법부를 이룩하고 싶은 저의 꿈과 소망을 여러분이 이루어 줄 것이고,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신임 대법원장께서는 높은 인품과 덕망으로 국민의 신망을 받고 계실 뿐만 아니라 재판실무와 사법행정에도 풍부한 경륜을 가지신 분입니다. 훌륭하신 신임 대법원장과 함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사법부의 새로운 시대를 활짝 열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법원 가족 여러분이 그동안 보여 주신 헌신과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우리 사법부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항상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1. 9. 23.
대법원장 이 용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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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11. 9. 23.자)
의외였던 ‘이용훈의 선택’… 100% 다수의견 지지했다
14대 이용훈 대법원장은 재임 6년간 대법원 최고 판결기구인 전원합의체에서 단 한 번도 소수 의견을 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대법원장이 법원 좌편향 논란의 진원지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실제 사회적 논란이 된 판결에서는 사회 주류 및 대법관 다수와 항상 의견을 같이해온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은 동아일보 법조팀이 이 대법원장 임기 동안 전원합의 사건 95건과 이에 포함된 세부 쟁점 234건을 전수 검색해 심층 분석한 결과다. 이 대법원장은 변호사 시절 수임한 탓에 재판에서 배제됐던 삼성에버랜드 사건(세부 쟁점 5건)을 제외한 모든 전원합의 사건에 참여했다.
분석한 결과 이 대법원장은 에버랜드 사건을 제외한 229건의 세부 쟁점에서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100% 다수 의견을 지지했다. 12대 윤관 전 대법원장과 13대 최종영 전 대법원장은 임기 동안 각각 2건과 1건의 소수 의견을 냈다.
이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전원합의 사건은 95건으로 직전 최 전 대법원장 때의 63건보다 50%(32건)나 늘었다. 전원합의 사건 95건에 포함된 세부 쟁점은 234건으로 최 전 대법원장 때의 124건보다 89%(110건)나 증가했다.
특히 대법관들이 전원합의 사건의 세부 쟁점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 비율도 많이 늘었다. 최 전 대법원장 때는 전체 세부 쟁점 124건 중 38건(30.6%)에서만 대법관들의 의견이 갈렸다. 그러나 이 대법원장이 이끈 전원합의는 세부 쟁점 234건 중 81건(34.6%)에서 대법관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대법원 관계자들은 지난 6년간 전원합의 사건이 크게 늘고 대법관들이 치열하게 다툰 점에 대해 “이 대법원장이 취임 초기부터 전원합의 회부와 난상토론을 적극 독려한 결과”라고 평했다.
이 대법원장이 참여한 다수 의견 중에는 박시환 대법관 등 5명의 진보 성향 대법관과 함께했던 적도 95건 중 11건으로 나타났지만 이 사건들 중 이념적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은 없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