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가 말하는 클래식 ③ 민일영 대법관

[중앙일보] 2012.12.14.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884/10168884.html?ctg=

 

 

‘서편제’에 반했다 … 판소리의 희로애락에 빠졌다

 

판소리(중앙일보).jpg

       민일영 대법관이 눈 내린 대법원 앞 잔디밭에서 부채를 펼쳐 들었다. 그는 “법관 생활은

  스트레스의 연속” 이라며 “심란할 때 대금 산조를 들으며 평정심을 찾는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단성사에서 영화 ‘서편제’를 봤는데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저런 소리가 있었다니. 그 나이가 돼서야 판소리를 접한 것을 두고 자괴감이 몰려왔어요.”

 

서울 서초동 대법원 건물 7층. 민일영(57) 대법관의 집무실에는 대금 산조가 은은하게 퍼졌다.

 

 민 대법관은 1993년 개봉한 ‘서편제’로 얘기를 풀어 나갔다. “단성사에 가서 3번 더 봤다”고 했다. 그와 국악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법원 연구모임 ‘민사실무연구회’ 간사를 맡았던 그는 당시 회장이었던 김상원 전 대법관의 허락을 받아 임권택 감독을 송년회 강사로 초빙하기로 결심했다. 영화제작사에 전화를 걸었지만 임 감독이 영화 ‘태백산맥’ 촬영 관계로 지리산에 머물고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민 대법관은 영화 감상평을 A4 4장짜리 손편지에 담아 임 감독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은 임 감독이 흔쾌히 강연 요청을 받아 들였고 한복을 입은 배우 오정해씨도 동행했다. 그는 “오정해씨가 고수(鼓手)가 없어서 난감해 했다. 지금이야 고수가 없으면 소리가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고 기억했다. 그때 그는 결심했다. “저걸(판소리) 꼭 배워야겠다”고.

 

 하지만 밀려드는 업무에 2005년 판소리를 시작했다. 오정해씨가 국립창극단 소속 김학용 명창소개했고, 민요판소리 동호회 ‘소리마루’  에서 판소리를 익혔다.

 

 -판소리의 매력은 뭔가.

 

 “판소리 열두 바탕 중에 전해지는 건 다섯 바탕뿐이지만 그 안에는 인생사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 들어있다. ‘춘향가’에는 사랑과 이별이, ‘심청가’에는 효심이, ‘적벽가’에는 남성의 기상이, ‘수궁가’에는 위기 탈출법이, ‘흥보가’에는 미물(微物)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다.”

 

 -우리 소리에 빠진 이유는.

 

 “판소리의 생명은 변형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장소에 따라 사설(판소리의 가사)이 달라지고 분위기에 맞춰 바꿔 부를 수 있다. 베토벤 교향곡은 베토벤의 생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악보를 쓰지만 판소리는 소리꾼마다 각기 다른 ‘제(소리의 스타일)’를 가지고 있어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민 대법관은 “국악에는 서양음악에는 없는 ‘감칠맛’이 있다”고 했다. 그는 법원에 국악의 감칠맛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청주지방법원장으로 있던 2009년 법조인과 지역 주민을 초청해 판소리 공연을 열기도 했다. 이날 인터뷰에선 “대법관이 된 이후 처리할 사건이 많아 판소리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매일 밤 12시를 넘겨서야 집무실을 나서지만 짬이 나면 재판연구관들과 함께 국악 공연장을 찾아 아쉬움을 달랜다.

 

 

 -국악이 우리와 멀어진 이유라면.

 

 “접할 기회가 부족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했다. 국악도 그렇다. 아는 만큼 들리는데 그 기회가 서양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2만원이면 국립극장이나 국악원에서 완창 판소리를 들을 수 있다. 3~4시간 정도 우리 소리에 흠뻑 빠질 수 있다.”

 

 그의 책상엔 ‘춘향가’ 사설을 정리한 『교주본 춘향가』와 부채가 있었다. 인터뷰 답변에도 판소리 용어를 사용했다. “소리를 하면 ‘이면(裏面)을 살려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춘향가’의 사랑가를 부를 때는 내가 사랑하는 것처럼 불러야 제맛이 살아난다. 그게 이면”이라는 식이다.

 

 -판소리와 재판 사이에 공통점이 있나.

 

 “감정과 배경 등 모든 것을 꿰야 이면을 살릴 수 있다. 재판도 그것과 비슷한 것 같다. 사안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민일영 대법관 추천곡

 

◆판소리= ‘흥보가’ 중 화초장 대목 ,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

 

◆단가(短歌)= ‘강상풍월’, ‘사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