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의 단상

2019.10.14 00:32

우민거사 조회 수:152


  추석이 지나고 벌써 한 달이 흘렀다. 한로(寒露)도 일주일 전이었다. 정말로 유수(流水) 같은 세월이다.
  그 흐르는 물처럼 빨리 스쳐가는 나날 속에 가을이 익을 대로 익어간다. 농촌 들녘에는 벼 베기가 한창이고, 봄부터 소쩍새가 울면서 기다린 국화들이 만개를 하며 고운 자태를 뽐낸다. 


  광화문 민심과 서초동 민심이 끝없이 갈리고 대립하며 갈등을 빚어내는 목하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몸과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 서울을 벗어나 찾는 금당천변의 우거(寓居)는 촌부에게는 영원한 안식처이다. 금당천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여명(黎明)의 풍경은 가히 선경(仙境)이다. 이제는 두터운 겉옷을 거쳐야 할 정도로 어침 기온이 쌀쌀하지만, 선경 삼매경에 젖어 미음완보(微吟緩步)로 걷는 뚝방길은 찬 공기마저 잊게 한다. 아직 일부가 남아 있는 길가의 코스모스는 어찌 그리도 곱고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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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천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이 ‘희망의 나라’라는 어느 노랫말이 떠오른다.  

  그렇다. 산천경개가 좋은 데다, 가을이 무르익어 금풍(金風)이 삽삽하니, 어찌 희망의 고을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부정의인지, 무엇이 공정이고 무엇이 불공정인지를 따지는 분별지심은 멀리 하고[일찍이 부설거사(浮雪居士)가 갈파한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放下. 분별과 시비를 다 놓아버려라)'는 이를 이름인가],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한’ 희망의 고을을 여명 속에서 바라볼 뿐이다. 그곳이 지척에 있어 노를 저어갈 것도 없으니 금상첨화이다.


  촌노(村老)의 발걸음이 느릿느릿하다 보니 점차 사위(四圍)가 환해지고 황금벌판이 눈에 들어온다. 올 가을에는 유난히 태풍이 잦았지만, 그 신고(辛苦)를 이겨낸 들녘은 풍요롭기 그지없다. 머지않아 삭풍한설이 몰아치면 메마르고 황량한 대지가 되겠지만, 그것은 그 때의 일이고 지금은 그저 바라보는 범부(凡夫)의 가슴을 넉넉하게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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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같아서는, 촌자(村子) 혼자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온 백성의 가슴이 다 전국 황금들녘의 기운을 듬뿍 받아 넉넉하고 평안해 지면 얼마나 좋으랴 싶은데, 민심이 갈기갈기 찢어져 나날이 황폐화되고 있는 판국에 그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마침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기러기 한 쌍의 울음소리가 촌부를 환상에서 깨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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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나설 때는 분명 주위가 어둑어둑한 새벽이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개와 고양이가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냐며 꼬리를 치며 짖어댄다. 아침이 밝은 게 언제인데 왜 여태 밥을 안 주냐는 시위이다. 지난주에 사온 닭들도 가세한다.
“야, 이놈들아, 나도 아직 아침 안 먹었어!”
소리쳐 본들 그들이 어찌 알랴. 서둘러 먹이를 챙겨 주고 촌부도 민생고를 해결한다. 그러고 보니 진즉부터 속이 출출했다. 세상사 모든 것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던가. 다만, 촌부의 혼밥이니 거창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일찍이 공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飯水(반소사음수)하고 之(곡굉이침지)라도 矣(낙역재기중의)니,

貴(불의이부차귀)는 我(어아)에 雲(여부운)이라."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팔을 베고 누워도 그 가운데 또한 즐거움이 있으니,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부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

 
 그나저나 오늘 밤에는 지난 추석에 날씨가 흐려 못 본 보름달을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래야 야은(冶隱)  선생을 흉내내는 일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할 텐데...  


臨溪茅屋獨閑居(임계모옥독한거)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시냇가에 초가집을 짓고 홀로 한가롭게 지내니

밝은 달과 맑은 바람에 흥취가 절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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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밤 귀경길 고속도로 위로 보름달이 구름을 뚫고 휘영청 떠올랐다. 비록 비가 온 후는 아니지만,  광풍제월(光風霽月)이 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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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13. 구름 사이에서 빛나는 보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