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 찾아 삼만 리(발트 3국과 러시아)(1)
2016.08.08 22:49
하늘 찾아 삼만 리(1)
올해 들어 유난히 하늘이 뿌옇기만 하다. 도대체 푸른 하늘을 볼 수가 없다. 스모그로 뒤덮인 것이다. 아침에 우면산에 가서 강북 쪽을 바라보면 남산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한강다리를 건널 때 강 건너 맞은편이 안 보일 때도 적지 않다. 예년에 비해 황사가 자주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황사가 드문 여름에도 상황이 다르지 않은 것을 보면 원인은 분명 다른 데 있다.
그래서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미세먼지인데, 그 미세먼지가 갑자기 올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인가. 미세먼지의 비율이 중국에서 날아오는 것과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것이 거의 반반이라고 한다. 6월 초에 중국 북경에 다녀온 사람의 전언에 따르면 북경 하늘이 서울보다 훨씬 푸르다고 한다. 기가 막힌다.
급기야 정부에서 각종 대책을 수립하여 발표하였지만 선뜻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언론에서는 정부대책이 근본은 빠지고 변죽만 울린다고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미세먼지를 발생시키는 주범 중의 하나인 석탄화력발전소를 줄이고 LNG 등 친환경 연료를 사용하는 발전소를 늘리는 방안에 대하여는 전기료가 오른다고 반대하는 소리가 들린다. 손도 안 대고 코를 풀자는 것인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말이다. 지금도 명동과 신촌에서는 문 열어놓고 에어컨 트는 상점이 대다수라고 한다. 전기료가 도대체 얼마나 저렴하길래.
어찌 해야 하나? 산소주머니를 사서 가지고 다녀야 하나? 답답하기만 하다.
흔히 발트3국으로 불리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는 사실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1991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였기 때문에 신생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들이다.
현재는 비록 유렵연합(EU)에 가입되어 있지만, 아직은 개발로 인한 때가 묻지 않은 청정지역이라 산소주머니를 걱정할 필요 없이 마음 놓고 푸른 하늘을 감상하며 숨을 크게 쉴 수 있는 곳이다.
거기에 더하여 유서 깊은 유적들이 많아 봄부터 미세먼지에 시달려 온 범부(凡夫)에게는 실로 매력적인 여행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길을 떠났다. 아미치스((Edmondo De Amicis)의 소설 속 마르코는 ‘엄마 찾아 삼만 리’를 떠났지만 실생활 속의 범부는 ‘하늘 찾아 삼만 리’를 떠난 것이다.
(주)하나투어의 8박10일짜리 단체여행상품이 제공하는 일정에 맞추어 2016. 6. 29. 오후 1시 10분 모스크바행 러시아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발트3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아직 없기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환승해야 한다.
인천공항에서 모스크바공항까지 비행시간이 8시간 30분인데도, 우리나라보다 시차가 6시간 늦은지라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한 현지 시각은 오후 4시 15분이다. 러시아 현지가이드 송정호씨가 공항에 나와 있었다. 그는 러시아 생활이 6년째로 현재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언어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비행경로]
인구가 1억 5천만 명이나 되고 면적이 지구의 1/8을 차지하는 거대한 나라인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의 국제공항이 풍기는 첫 인상은 ‘낙후’였다. 환승을 위한 입국장은 두 개만 가동하여 혼잡하였고, 직원들은 불친절한데다 X레이 검색대가 툭하면 멈춰 짜증을 유발한다. 세계 각국의 유명 국제공항마다 환승객의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판에 동구권 여행을 위한 환승에 적격인 모스크바 공항은 기존의 환승객들조차 내칠 지경이다.
목적지별 비행기의 출발시각과 탑승구(Gate)를 알리는 전광판은 공항 전체 상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일정구역의 것만 표시하기 때문에 구역별 전광판을 돌아다니며 확인해야 한다. 나도 한 전광판만 보면서 기다리다 자칫 리투아니행 비행기를 놓칠 뻔하였다. 인천공항이 아님을 깜빡한 것이다. 그리고 탑승구가 수시로 바뀐다는 것도 명심할 일이다.
전광판이 LG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아니면 삼성전자의 초고화질(SUHD) TV인 게 눈에 띈다.
리투아니아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4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공항 면세점(별로 크지 않다) 구경도 하고 식당에서 저녁식사도 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모스크바공항]
[모스크바공항 환승 입국장]
[모스크바공항의 식당]
밤 8시 45분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Vilnius)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역시 러시아항공이다. 빌뉴스까지 비행시간은 1시간 20분. 기내식으로 햄과 오이 등을 넣은 샌드위치 형태의 빵이 나왔는데, 이미 저녁을 먹은 데다 맛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밤 10시 20분 빌뉴스공항에 도착하였는데, 위도가 높아(북위 54.4도) 그 시각에도 거리는 여전히 환하다. 11시가 넘어야 어두워진다. 그리고 새벽 3시면 날이 밝는다. 빌뉴스공항은 시골공항이나 다름없다.
유로파 씨티(Europa City)라는 호텔(3성급)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나니 밤 12가 넘었다. 그렇게 ‘하늘 찾기’ 여행의 첫날이 지나갔다.
[리투아니아]
[빌뉴스공항]
[유로파 씨티 호텔]
2016. 6. 30.
트라카이성은 리투아니아가 국위를 떨치기 시작한 14세기 초에 당시 수도였던 트라카이를 지키기 위하여 세운 성이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까지 영토를 넓히고 1410년 폴란드와 연합하여 독일의 튜튼기사단과 벌인 그룬발트 전투(=잘리기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리투아니아의 전성기를 이룩하여 리투아니아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비타우타스(Vytautas. 1392-1430) 대공(大公)이 죽을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
수도를 빌뉴스로 옮긴 후에도 리투아니아의 지배층은 한 동안 이 풍광이 아름다운 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최고 수심이 50m인 갈베(Galve) 호수 한 가운데 마치 물에 떠있는 듯한 이 성은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비타우타스 공작을 비롯한 여러 공작들의 삶과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과 중세 시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트라카이성의 전경]
[트라카이성 안쪽 광장에 있는 고문도구]
[트라카이성의 내부]
트라카이에는 200여 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있는데, 그 중 트라카이성이 있는 갈베 호수가 가장 크다. 성 안에 있는 유물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갈베 호수에서 요트를 타고 성 주위를 돌면서 보는 풍광이 참으로 아름답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과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성, 그리고 잔잔하기 그지없는 넓은 호수가 삼위일체가 되어 연출하는 풍경이야말로 백미 중의 백미이다. 흰 뭉게구름은 왜 그리도 멋지던지.
겸재 정선이 환생하여 이곳의 진경산수를 그린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필설로 다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서울에서는 실종된 저 푸른 하늘~~~!!
[갈베 호수의 요트와 푸른 하늘]
트라카이성 인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우리 일행뿐이었는데, 잠시 후 다른 단체손님이 들어왔다. 그들도 모두 한국인이다.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국가들과 발트 3국을 함께 엮은 여행상품을 이용하는 관광객들이다. 이후의 일정에서도 이런 사람들과 여러 번 조우하게 된다. 식사를 나온 연어스테이크가 일품이었다.
식사 후 2009년 유럽의 문화도시로 선정된 빌뉴스의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유럽여행의 7-8할은 성당을 구경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럽에는 유서 깊은 성당들이 많은데, 발트 3국 또한 그러하다.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등 각종 양식의 건물들이 가득 찬 빌뉴스에도 성 오나 성당, 빌뉴스 대성당(소련 지배 시절 인물화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카지미에라스 성당(소련 지배 시절 무신론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성 베드로 바울 성당 등 유서 깊은 성당들이 즐비하다(성당이 26개 있다. 리투아니아는 국민의 80%가 가톨릭 신자이다).
그 중 고딕 양식의 성 오나 성당(1502년 건립)이 가장 아름다워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 원정길에 이 성당을 보고 손바닥에 얹어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고 했을 정도이다. 그런 나폴레옹이 정작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회군하는 길에 성당 내부를 파괴하고 갔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성 오나 성당]
[카지미에라스 성당]
빌뉴스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성 오나 성당은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축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런데 이 건물뿐만 아니라 앞서 본 트라카이 성을 비롯하여 뒤에 나오는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 그리고 러시아의 페쩨르부르그, 모스크바에 있는 그 많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거의 다 파괴와 복원을 되풀이한 것들이라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최근까지 말이다.
파괴된 문화재를 복원한다고 하면 거의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며 파괴된 대로 그대로 두는 것이 최고의 보존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런 건축물들이 파괴된 폐허 상태 그대로 있어도 그걸 보러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오겠냐고! 대원군은 경복궁을 복원했어도 되지만 현재의 우리 세대는 황룡사를 복원하면 안 된다는 논리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고!“

성 밖에서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인 ‘새벽의 문’에는 문루에 해당하는 2층에 검은 마리아상을 조각하여 둔 것이 눈길을 끈다. 리투아니아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바르보라 라드빌라이테(Barbora Radvilaitė)를 흠모한 한 장인이 그녀의 모습을 성모 마리아의 얼굴로 성화시켰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새벽의 문]
빌뉴스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게디미나스성(城)이다. 게디미나스(Gediminas, 1275?-1341) 대공이 리투아니아의 수도를 트라카이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었다고 한다. 서울의 남산 쯤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그리 높지 않은데 관광객들을 위해 후니쿨라(Funicular.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는 전차로 유료이다)를 설치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날씨가 워낙 화창하여 걸어서 올라갔으면 더웠을 것이다.
[게디미나스성으로 오르내리는 후니쿨라]
정상에는 게디미나스 대공이 1409년에 세운 탑이 있다. 탑 안으로 들어가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붉은 색 지붕의 고풍스런 건물들, 그 뒤에 녹색 숲이 연출하는 지평선, 그 위의 파란 하늘이 창을 통해 삼위일체로 시야에 들어온다. 거기에 시내를 관통하는 빌뉴스강도 한 몫 한다. 서울과 대비되는 너무나도 평화스런 정경이다.
300만 명이 채 안 되는 인구가 국토면적 65,300㎢에 사는 리투아니아(수도 빌뉴스에는 60만 명이 산다), 이곳 사람들도 우리처럼 아옹다옹하며 살까? 무엇이 제대로 된 삶인지 헷갈린다.

[게디미나스성에서 내려다본 빌뉴스 구시가지 전경]
자유시간(단체여행임에도 이번 여정에서는 가는 곳마다 자유시간이 여유 있게 주어져 좋았다. 여행사 입장에서는 비용을 아끼려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사진만 찍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에 그야말로 자유롭게 시가지 구경을 하면서(치안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세풍 도시의 고즈넉함과 여유를 맘껏 즐겼다.
호박상점들이 많아 아름다운 호박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이드의 말대로 그 중 “Amber Qeen”이라는 상점(라트비아의 리가에도 있는 것을 보면 체인점인 듯하다)이 질도 좋고 가격도 비싸지 않아 말 그대로 가성비가 괜찮다.
[빌뉴스의 구시가지]
[빌뉴스 구시가지의 골목길]
2016. 7. 1.
[샤울레이의 십자가 언덕]
이곳에 십자가를 처음 세우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로 추정된다. 그 후 소련 지배 당시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이나 아무런 소식 없이 실종된 사람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하나 둘씩 이곳에 십자가를 세우면서 급속도로 십자가가 늘어났다.
종교를 부정한 소련이 군대를 동원해 몇 번이나 불도저로 깨끗하게 밀어버렸지만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밤을 새워 십자가를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인구의 80%가 가톨릭신자인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무신론에 저항한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다.
입구의 상점에서 갖가지 형태의 십자가를 판매한다. 가톨릭신자인 집사람도 세 개를 구입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하는 글귀를 써넣어 그 언덕에 세웠다. 정확한 전체 갯수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절대 숫자로 3개가 늘어난 셈이다.
샤울레이를 떠난 버스가 끝없이 이어지는 너른 초원을 계속 북쪽으로 달린다. 오가는 차가 별로 없어 한가하건만, 그리고 과속 단속 장비도 설치되어 있지 않건만, 시속 100km를 결코 넘지 않는다. 차 없는 도로에서는 빠른 속력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인에게는 다소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초원 위에 가끔 보이는 농촌 주택은 빌뉴스에서 본 집들과 다를 게 없다. 적어도 이방인의 눈에는 빈부격차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풍경은 러시아 땅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 라트비아(Latvia)
모르는 사이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로 들어섰다. 발트 3국 모두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한 까닭에 국경을 넘을 때 검문이라는 것이 없고, 풍경이 비슷하다 보니 휴대폰에 뜨는 문자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경을 넘을 때마다 자동으로 외교부에서 비상 시 연락할 영사관 전화번호를 알려 주고, 이동통신사에서 통신요금 안내를 해 주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IT 강국 대한민국의 발달한 정보통신기술과 서비스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라트비아는 면적이 64,600㎢, 인구가 약 200만 명으로 리투아니아와 비교하면 면적은 거의 비슷하고 인구는 다소 적다. 종교적으로 가톨릭국가인 리투아니아와는 달리 루터교인과 러시아정교인이 많지만, 이역만리 극동에서 온 이방인에게는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라트비아에서 처음 간 곳은 바우스카스(Bauskas) 지방의 룬달레(Rundale) 궁전이다. 샤울레이 언덕으로부터 1시간 40분 걸리는 곳이다.
18세기에 러시아의 안나 이바노브나(Anna Ivanovna) 여왕의 연인으로 부와 권력을 쥐었던 에른스트 요한 폰 비론((Ernst Johann von Biron) 공작이 이탈리아의 건축가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 후술하는 페쩨르부르그의 여름궁전을 건축한 건축가이기도 하다)를 시켜 지은 여름궁전이다(비론은 이 궁전을 짓는 도중 이바노브나 여왕이 죽자 시베리아로 쫓겨나 20여년 유배생활을 하고 돌아와 이 궁전을 완성했다).
1795년 이 지역을 러시아에 편입한 예카테리나(Ekaterina) 여왕이 이번에는 이 궁전을 자신의 연인인 주보프(Prince Zubov) 공작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래서인지 첫 주인인 비론과 그의 가족들 초상화 외에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화도 걸려 있다. 러시아의 여자 황제를 연인으로 둔 남자들이 궁전을 짓고 또 소유하게 된 역사가 흥미롭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가 아니라 ‘남자 팔자 뒤웅박 팔자’인 셈이다.
이 궁전은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전쟁 등으로 파괴되고 방치되어 있다가, 1972년부터 30여 년 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궁전 안에 들어가려면 신발 위에 비닐덧신을 신어야 한다. 그만큼 청결에 신경을 쓴다. 내부 사진을 찍으려면 2유로를 내고 촬영권(노란 스티커)을 사야 한다.

그런가 하면 내부를 전부 하얗게 장식한 무도회장도 있다. ‘하얀 방’이라는 이름의 이 방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모든 벽면과 장식을 하얀색으로 꾸몄다고 한다.
그 밖에 주제별로 구성된 각 방마다 강한 원색과 파스텔 톤으로 꾸민 색채의 화려함이 감탄사를 자아낸다. 당시 이 궁전의 주인이 중국에 관심이 많았던지 중국 도자기 전시실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하얀 방]
[중국 도자기 전시실]
이 궁전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는데, 바로 장미정원이다. 궁전 뒤뜰에 마련된 이 정원에는 세계 각지의 장미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갖가지 종류의 나무로 조성된 정원이 이어진다. 정원이 하도 넓어 땡볕 아래 걷기보다는 관광객들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전동차에 탑승하여 먼저 한 바퀴 도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 후에 그 중 마음에 드는 곳을 천천히 걸으며 감상하면 된다. 빨간 장미정원, 하얀 궁전, 파란 하늘이 연출하는 멋진 풍경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장미정원]
룬달레 궁전에서 나와 근처 숲속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아름다운 궁전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가, 나름 예쁘게 꾸민 식당이다. 메뉴는 닭고기 요리. 나는 육식을 멀리하기 때문에 집사람이 서울에서부터 준비해 온 햇반과 김치로 대신하였다.
[룬달레 궁전 부근의 식당]
식사 후 1시간 30분 걸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에 도착하였다. 리가는 ‘발트해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이다. 현재 인구는 80만 명 정도이다. 발트 3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13세기 독일인들이 건설[독일 브레멘의 대주교였던 알베르트(Albert) 대주교가 1201년 리가만에 배를 댄 것이 리가 역사의 시작이다. 이 도시는 오랫동안 번갈아가며 주변 강국들의 지배를 받아온 역사 탓에 독일식, 러시아식, 스웨덴식 건물들이 병존한다.
종교적으로는 독일의 영향으로 현재 개신교의 루터교 신자들이 제일 많지만, 유럽의 도시답게 볼 만한 성당이 많고, 곳곳에 공원도 자리하고 있다. 도심을 관통하는 다우가바(Daugava) 강은 폭이 넓고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유속도 빠르다.
[바그너 거리의 표지판]
[브레멘 음악대 주인공들의 조형물]
리가는 유럽의 명사들에게 사상적 예술적 동기를 부여한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유럽 건축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미하일 아이젠스타인(Mikhail Eisenstein. 리가 태생의 유대인이다)이 설계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은 유럽 전체에서 최고로 평가되며, 역시 리가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세르게이 아이젠스타인은 세계 영화사에서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함 포템킨’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구시가지의 건축물들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시청 앞 광장에 있는 검은머리전당과 그 뒤에 있는 베드로 성당, 피요트르 대제 동상 자리에 세운 자유의 여신상, 삼형제 건물, 17세기 스웨덴 군인들이 지은 화약탑과 그들이 머물던 병영, 제이콥 성당, 돔 성당 등이다.
검은머리전당은 리가를 거점으로 무역활동을 한 중세 한자동맹 상인들이 세운 건물이다. 이 건물을 사용했던 검은머리길드는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해온 미혼 상인들이 결성한 무역 조합으로, 이집트 출신의 한 흑인 성인을 수호신으로 여겨 건물에 그 성인의 얼굴을 장식했다.
시청광장의 한쪽에 있는 화려한 외부장식의 이 건물은 상인들이 리가에 머무는 동안 여관이나 연회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2차 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80%가 파괴되고 독일의 잔재라는 미명하에 소련 정부가 완전히 철거해 버린 것을 2001년 리가 건설 800주년을 기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새로 복원하였다.
[검은머리전당]
리가 시내에는 성당의 높은 첨탑이 많이 보이는데, 그 첨탑마다 서 있는 금빛 찬란한 수탉 모양의 풍향계가 리가의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13세기 리가 상인들의 헌금으로 건설된 베드로 성당의 꼭대기에 서 있는 금수탉이다.
발트해안의 항구로 무역도시인 리가에서 풍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 성당에 가장 먼저 수탉 모양 풍향계가 생겼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한 것과 관련하여 베드로와 수탉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고 한다.
또한 닭이 어둠을 내쫓고 새벽을 부르는 신령한 동물이라는 이 지역의 토속신앙과도 연결되어 리가의 성당 높은 첨탑에는 어김없이 수탉이 올라가게 되었다.
베드로 성당은 리가의 중요한 랜드마크로서 현재는 미사를 드리는 성당으로서의 역할보다는 높은 첨탑 위에서 구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의 역할이 더 크다.
[베드로 성당]
리가 시내 한가운데 있는 ‘자유의 여신상(Brīvības piemineklis)’은 오랜 지배의 역사에 맞서 싸운 라트비아인들의 투쟁의 흔적을 잘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잠시 독립을 이루었던 1935년에 조성된 42미터 높이의 이 푸른색 여신상은 라트비아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밀다(Milda)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국민들의 성금으로 완성된 이 여신상은 라트비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소련에 의해 시베리아로 끌려가거나 독립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라트비아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람들의 헌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있는 ‘세자매 건물’과 견줄 만한 ‘삼형제(Trīs brāļi) 건물’은 리가에 있는 석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기간 동안 만들어진 집 세 채가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오른편 흰 건물이 15세기에 세워진 가장 맏형으로, 왼편으로 갈수록 나이가 한 세기씩 젊어진다. 현재는 라트비아 건축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른편 흰 건물 앞을 지나가는데 거리의 악사 두 명이 우리 일행을 보더니 애국가와 아리랑을 연주한다. 집사람이 아리랑 연주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는데 보기 좋다. 이런 곳에서 애국가와 아리랑 연주를 들을 줄이야. 연주가 끝나고 돈통에 돈을 넣었음은 물론이다.
[삼형제 건물과 그 앞의 악사들]
[17세기 스웨덴 군인들이 세운 화약탑]
리가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건물들이 많다. 앞서 기술한 대로 리가 태생의 유대인 미하일 아이젠스타인의 설계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르누보 양식은 유럽적인 소재에 국한하지 않고 이집트, 이슬람, 자연 등 다양한 요소들을 일반 건물에 과감히 차용한, 당시로는 획기적인 건축양식이었다. 이는 새로운 예술양식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었고, 리가는 브뤼셀, 헬싱키 등과 함께 19세기 말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적인 도시로서 명성을 떨쳤다.
매우 화려한 외관의 이 건물들은 현재 학교, 관공서, 아파트 등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대로이건 골목길이건 리가의 거리를 걷다 보면 이런 다양한 형태의 건물들을 볼 수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이런 건축물들을 찾지 않더라도 꽃장식을 한 거리 자체가 아름답고, 중심가 광장에는 노천카페와 상점들이 즐비하여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이런 저런 것을 둘러보며 구경을 하는데, 파란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까지 친다. 대개 오후 4시부터 6시 사이에 하루 한번 정도 일어나는 현상이란다.
광장의 기념품과 옷을 파는 노변상점에서 비를 피하며 쏟아지는 굵은 빗방울을 보면서 ‘이제 관광은 끝났네’ 하고 체념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개고 다시 화창해진다. 열대지방에서나 볼 스콜을 북위 56.6도의 리가에서 경험할 줄이야. 멀리 극동에서 온 촌부에게는 부럽기만 한 리가의 맑은 공기를 유지하는 데 이런 소나기가 한 몫 하는 것은 아닐까.
이 날 저녁은 한식이다. 교민이래야 손꼽을 정도로 적은 곳인데도 한식당이 한 군데 있어 반갑다. 식당 이름은 ‘설악산’(SORAKSAN).
저녁 메뉴는 육개장, 불고기, 빈대떡. 빈대떡은 맛이 좋았으나 아쉽게도 다른 두 가지는 환영을 못 받았다. 나야 불고기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고, 육개장이라도 먹어볼까 했는데(내용물 중 고기는 빼고) 맵고 짠 데다 국물 색깔이 너무 검어 그만 식욕을 떨어뜨렸다. 함께 나온 밥을 반 공기 쯤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수저를 놓았다.
이역만리 리가에서 서울의 육개장 맛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겠지만, 아무튼 아쉬웠다. 특히 다음날 점심에 먹은 풍성한 중식과 비교가 되어 씁쓸하다. 덕분에 호텔로 돌아와 근처 쇼핑센터에 가서 빵을 사다 먹는 것으로 저녁을 보충해야 했다.
[한식당 설악산]

2016. 7. 2.
모닝콜이 예정되어 있는 7시보다 한 시간 일찍 눈이 떠졌다. 그래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호텔 주위로 산책을 나갔다.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다. 차도 거의 안 다니고 이따금 산책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새벽 3시면 환해지는 곳이건만, 급할 게 없다 보니 일찍 돌아다니지 않는 것 같다. 숲이 우거진 주택가의 거리는 마치 오래 전 독일 본(Bonn)에 살던 때의 아침거리를 연상케 하였다.
아침 식사 후 40분 걸려 시굴다(Sigulda)로 이동하였다(리가에서 북동쪽으로 53km). 시굴다는 1973년 라트비아 최초로 지정된 국립공원인 가우야(Gauja) 국립공원 안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산이 없고 온통 평야지대인 발트3국에서 낮을망정 산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 지역을 관통하는 가우야 강과 어울려 자연경관이 뛰어나 ‘라트비아의 알프스(또는 스위스)’로 불리기도 한다. 때문에 라트비아에서 리가 다음으로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시굴다로 가는 길의 가로수는 온통 적송이다. 가늘면서도 일직선으로 높게 자란 적송들이 왕복 2차선 도로의 양 옆을 따라 숲을 이루고 있다. 높이만으로 보면 훌륭한 재목감이지만 굵기가 가늘어(아마도 햇빛을 받기 위해 서로서로 키 크기 시합을 벌인 듯하다) 기둥감은 못 된다.
[시굴다의 적송 가로수]
시굴다에는 1214년 리가 대주교의 거주지로 건립된 투라이다(Turaida)성(城)이 있다. 1776년 파괴된 후 방치되었다가 20세기 중반에 복원되었다. 라트비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성안에는 특이하게 루터교회가 있고(원래는 성당이었다), 빨간 벽돌이 인상적인 돈존탑이 있다. 이 탑 꼭대기에 올라가면 굽이굽이 흐르는 가우야강과 그 주변의 숲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데, 밀림 숲 속을 흐르는 아마존강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밖에 성안 건물 곳곳에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전시해 놓았다. 성 전체가 풍기는 이미지가 마치 인디아나 존스의 해리슨 포드가 찾아가는 고성을 꼭 닮아 나도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었다.
[루터교회]
[투디아나 존스의 민리슨 포드]
[돈존탑에서 내려다본 가우야강의 모습]
본래 라트비아 언어로 ‘신의 정원’이라는 뜻의 ‘투라이다’라는 말에 어울리게 경내에는 석조물이 놓여 있는 푸른 초원과 꽃밭으로 넓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눈이 시리도록 맑고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그 아래에서 녹색의 향연을 펼치는 푸른 초원이 주는 자유와 여유를 만끽하였다.
어느 시인은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고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시달릴 세사도, 골치 아픈 번뇌도 없다. 그냥 맑고 푸른 자연과 한양나그네가 있을 뿐.
투라이다 성 근처에 구트마니스(Gutmanis)라는 사암 동굴(길이 19m, 너비 12m, 높이10m)이 있어 잠시 들렀는데, 산이 없다 보니 동굴도 귀한 라트비아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멋진 동굴이 널려 있는 한국에서 온 나그네에게 그 자체로는 그리 관심을 끌 만한 곳이 못 됐다.

[투라이다의 장미 이야기와 묘비]
투라이다 성을 나와 근처 중식당에서 점심을 풍성하게 먹은 후 에스토니아의 페르누를 향해 출발했다. 라트비아에서 에스토니아로 넘어갈 때도 역시 국경 검문의 절차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에 국경을 넘는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에스토니아로 들어서자 가로수가 흰 자작나무로 바뀌었기 때문에 나라가 달라졌음을 느끼게 한다. 나그네를 환영하는 듯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다.
[에스토니아 하늘의 흰 구름]
[에스토니아]
原來我輩在鍾情(원래아배재종정)
浮世得君雙眼明(부세득군쌍안명)
知否生平好遊事(지부생평호유사)
天敎看海有今行(천교간해유금행)
본래부터 우리는 다정다감하였기에
뜬세상에서 그댈 만나 반갑기 그지없었는데
내가 떠돌기를 좋아함을 그대는 모르는가
바다를 구경하라고 하늘이 귀양 보낸 거라네
[스시 호텔]
방 정리를 대충 하고 호텔 로비에서 시내 지도를 구해 택시를 타고 구시가지로 나갔다. 밤 11시는 되어야 어두워지는데다 치안도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해서 집사람이랑 둘이 시내구경을 나선 것이다. ‘발트해의 진주’로 불리는 탈린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탈린의 구시청사와 그 앞 광장]
구 시청 앞의 광장[라에코야(Raekoja) 광장]에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1422년에 개설되어 지금까지
영업을 한다는 약국이 그곳에 있다 하여 찾아보았으나 눈에 안 띈다. 노천카페의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 모퉁이를 돌면 나온다고 한다. 가르쳐 준대로 가서 이리저리 찾았으나 오리무중이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에게 물었더니 맙소사 바로 옆에 두고 찾았다. 업은 아기 3년 찾는다더니...
28년 전인 1988년 독일에서 법관연수를 하던 시절, 벨기에 브뤼셀에 가서 오줌싸개 동상을 찾다가 못 찾아 지나가던 경찰관한테 물었더니 바로 옆의 동상을 가리키며 저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허탈해했던 기억이 새롭다.
어렵게 찾은 약국이 저녁 6시면 문을 닫는 바람에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다음날은 일요일이라 역시 문을 안 연다. 결국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약국은 벽에 붙은 간판만 보는 것으로 만족할 밖에. 인연이 거기까지인 것을 어쩌랴.
[700년 된 약국]
광장을 중심으로 골목길이 여러 개 있는데, 어느 골목을 가든 예쁘고 분위기가 좋다. 그 중 이름 모를 골목길의 한 아름다운 카페 밖에 내놓은 테이블에서 차 한 잔 하며 낭만을 즐기려 했으나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올 생각을 안 해 그냥 일어섰다.


지도를 들고 물어물어 톰페아((Toompea)성(城. 현재 국회의사당)이 있는 톰페아 언덕에 올라갔다. 1219년 덴마크인들이 이곳에 진출한 이후 최초로 지은 성당인 톰(Toom) 성당이 있고, 특이하게 러시아정교의 알렉산더 네프스키(Alexander Nevsky) 성당(1900년 건립)도 있으며, 여러 나라의 대사관들도 있는 고급주택가이기도 하다.
[국회의사당]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
톰페아 언덕에는 전망대가 두 곳 설치되어 있어 필수적인 관광코스이다. 당연히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곳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시가지 모습, 특히 구시가지 쪽은 얼핏 체코의 프라하를 연상케 한다. ‘작은 프라하’라고 하면 지나칠까? 붉은 지붕의 각종 건물들과 성당의 첨탑들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다.
탈린이 발트해안의 항구도시인지라 여객선과 화물선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도 보인다. 그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데 항구 쪽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면서 소나기가 쏟아지는 광경을 연출한다. 뜻하지 않은 구경거리이다.
[톰페아 언덕에서 내려자본 탈린의 구시가지 전경과 소나기 쏟아지는 모습]
리가에 삼형제 건물이 있다면 탈린에는 세자매 건물이 있다. 지난밤에는 보지 못했던 건물이다. 나란히 서있는 세자매 건물은 15세기 건물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고, 지금은 호텔로 사용된다. 숙박요금은 현대식 호텔보다 비싼데 시설은 반대로 불편하다고 한다. 그래도 중세의 분위기를 느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세자매 건물]
자유시간에 탈린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문을 연 지 150년 되었다)에 들어갔다. 구 시청 앞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영화에서 보는 고풍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창가에 장난감 기차가 왔다 갔다 하고 있고, 놀이공원의 360도 도는 허니문카를 닮은 작은 기구가 빙빙 돌고 있다. 유명 카페답게 손님들로 붐비는데,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창가에서 신문을 읽고 있어 시선을 끈다.
[탈린에서 가장 오래 된 카페. 1864년 개점]
구 시청 앞 광장에 있는 고풍스런 건물의 식당에서 점심(음식 맛은 건물을 못 따라갔다)을 먹은 후 12시 30분 러시아의 페쩨르부르그를 향해 출발했다. 대개 6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국경 통과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지 몰라 서두른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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