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周王)은 어디에(주왕산)
2022.07.14 13:58
주왕(周王)은 어디에
타고난 역마살로 인해 긴 세월 동안 전국을 유람하며 발길이 닿았던 곳 중에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곳들이 더러 있다. 그중 하나가 청송의 주왕산(周王山)이다. 40여 년 전인 초임 판사 시절 친구들 몇몇과 함께 광교에서 단체관광 버스를 타고 갔던 기억이 아스라이 남아 있는 곳이다.
지금과는 달리 예전에는 산행기를 남기지 않았고, 때문에 그 시절에 찾았던 산들은 대부분 망각의 저편으로 넘어갔는데, 주왕산은 그 이름값 때문인지 기억의 한 구석에 늘 남아 있었다. 그 기억 속의 주왕산, 언젠가는 다시 찾을 날이 있으리라는 잠재의식이 깔려 있던 그 산을 마침내 다시 찾았다. 2022. 6. 11.의 일이다.
안동이 고향인 남영찬 변호사(법무법인 클라스의 대표)님이 모든 일정을 주선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주왕산(周王山)
주왕산은 1976년에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해발고도가 720.6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암산(岩山)으로 꼽힐 만큼 멋진 암봉과 수려한 계곡이 절경을 이룬다. 영남 제1의 명승지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주왕산을 가리켜 ‘돌로써 골짜기 동네를 이루어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는 산’이라고 했고, 암벽으로 둘러싸인 산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본래 석병산(石屛山)이라고 불렸다. 그런가 하면 후술하는 주왕(周王)의 전설과 연관지어 주방산(周房山)이라고도 불렸다.
주왕산 일대는 본래 거대한 호수였다고 한다. 그 호수 바닥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육지화되었는데, 약 7천만 년 전 이 퇴적암층을 뚫고 엄청난 규모의 화산이 폭발하면서 뜨거운 화산재가 분출되어 대량으로 쌓이고, 그 화산재 주변에 용암이 응집하면서 거대한 암벽이 형성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를 거치면서 오늘날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러한 지질학적 특성은 주왕산의 바위, 폭포, 계곡, 산세를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국가지질공원으로 등록된 것은 물론, 2017년에는 주왕산을 비롯한 청송군 일대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
그러면 이런 산에 왜 주왕산(周王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
주왕산은 한마디로 신라말에 주왕(周王)이 은거하였던 산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은 본래 중국 당나라 때 살았던 주도(周鍍)라는 사람으로서, 그는 동진(東晉)의 회복을 꿈꾸며 자신을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당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크게 패하고 요동을 거쳐 이곳 석병산(石屛山. 주왕산의 옛 이름)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당나라에서는 신라에게 주왕을 잡아달라고 요청하였고, 주왕은 이곳에서 신라의 마일성 장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패하고 주왕굴에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주왕산에는 주왕의 전설에 얽힌 지명이 많다. 대표적으로 주왕이 쌓았다는 주왕산성이 있고, 군사들을 숨겼다는 무장굴, 주왕의 딸 백련공주의 이름을 딴 백련암, 주왕과 마일성 장군이 전투를 벌일 때 주왕이 대장기를 세웠다는 기암(旗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주왕산 계곡을 주방천(周房川)이라 부르는 것도 주왕과 관련이 있고, 대전사(大典寺) 역시 주왕의 아들인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주왕굴 앞에 있는 주왕암(周王庵)은 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주왕산의 등산은 탐방지원센터에 있는 상의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계곡을 따라 10여 분 올라가면 나오는 대전사(大典寺)에서부터 시작된다.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고찰이다. 절 자체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곳에 있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데, 그 뒤편으로 주왕산의 대표적인 명물인 기암(旗岩. 깃발바위)이 솟아있어 산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암은 곳곳의 빼어난 암석이 눈에 띄는 산인 주왕산에서도 가장 첫 번째로 꼽히는 바위이다. 그 웅장한 자태가 주왕산을 오르고 내릴 때 쉽게 눈에 띈다. 비가 막 그친 직후 뽀얀 안개를 걸친 기암의 모습이 특히 신비스럽다고 하는데, 촌부가 찾은 날은 하늘이 청명하여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그쳤다.
[대전사와 기암]
대전사의 절마당을 관통하여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면 이내 계곡(주방천) 위에 놓인 작은 다리(기암교)가 하나 나온다. 이 다리 앞에서 오른쪽 난 길을 따라가면 ‘주봉(主峯)마루길’이라는 안내문(門)이 세워져 있고, 그 문을 지나면 바로 주왕산 주봉으로 올라가게 된다.
반면에 다리를 건너 주방천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학소대, 급수대, 주왕암과 주왕굴, 용추협곡, 폭포 세 개 등 주왕산의 명소를 만나게 된다. 원점회귀형 등산로라 어느 쪽을 택하든 순서만 바뀔 뿐 결국 다 지나게 된다.
[기암교]
가능한 한 무릎에 부담을 덜 주는 코스를 택한다는 등산의 원칙대로라면, 경사가 급한 길인 주봉마루길로 먼저 올라갔다가 주방천 쪽으로 하산해야 하는데, 그리하면 위에서 든 명소들의 관람 효과가 떨어지는지라 등산객들은 대부분 역순으로 기암교를 건너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는 방향을 택한다. 촌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주방천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걷기가 편하다. 게다가 국립공원답게 곳곳에 상세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길로 들어서서 100m쯤 가면 나오는 아들바위가 재미있다. 바위를 등지고 다리 가랑이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에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새삼 아들을 낳을 일이 없는 촌부는 길에서 주운 돌을 그냥 던져보았지만, 바위에 올리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아들바위]
평탄한 등산로를 미음완보(微吟緩步)하며 걷다 보면 이따금 산철쭉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철이 지났는데도 아직 피어 있는 것들이 있다. 주왕산 수달래이다. 이곳의 안내판에 따르면, 이 꽃을 일명 수단화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물이 붉게 물들어 피어난 꽃(水丹花), 또는 주왕의 목숨이 끊어지고 난 후에 피어난 꽃(壽斷花)이라고 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주왕산 수달래]
다시 전설의 세계로 들어간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주왕굴에서 신라 마일성 장군의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둘 때 흘린 피가 주방천을 붉게 물들이며 흘렀는데, 그 이듬해에 이제껏 보지 못했던 꽃들이 주방천 물가에 흐드러지게 피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해마다 늦은 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주방천에는 아름다운 빛깔의 꽃이 피었고, 이곳 사람들은 이를 보고 주왕의 넋이 깃든 꽃(수단화)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수달래에 얽힌 이야기를 곱씹으며 걷다 보면 계곡 위로 작은 다리(자하교)가 하나 나타난다. 주 등산로는 이 다리 왼쪽으로 난 길이지만, 다리를 건너가면 주왕암과 주왕굴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산객의 발길을 이끈다.
다리 아래로 보이는 주방천의 맑은 물, 계곡 양옆의 녹색의 숲, 그리고 그 중앙의 암봉(岩峰)이 서로 잘 어울려 나그네의 시선을 빼앗는다. 선계(仙界)가 따로 없다.
주제넘게 어느 옛 시인의 흉내를 내본다.
흰 구름 푸른 내가 골골이 잠겨 있고
초하(初夏)에 물든 방초(芳草) 봄꽃도곤 더 좋아라
[자하교에서 바라본 풍광]
자하교를 건너 400m 정도 가면 주왕암(周王庵)이 나타난다. 통일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절이다(일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 때 눌옹<訥翁>이 지었다고도 한다). 계곡에 지은 암자인 까닭에 절의 규모는 자그마하다. 차라리 아담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그런데 절 마당에 있는 평상에 떡과 사탕과 찻물이 놓여 있다. 오로지 산객을 위한 주지스님의 배려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작은 배려로 큰 감동을 주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지향하여야 하는 건강한 공동체 아닐까.
[주왕암과 떡]
주왕암에서 좁은 협곡에 설치한 계단을 따라 30m 정도 올라가면 주왕굴이 나온다. 높이 5m, 길이 2m의 작은 굴이다. 주왕이 은거하다 죽은 자연동굴로, 지금은 내부에 산신상(山神像)이 조성되어 있어 주왕암의 산신각(山神閣) 역할을 한다. 주왕굴 옆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겨울이면 얼어붙어 빙하가 만들어져 장관이라는데, 여름의 길목인 6월에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주왕도 없고, 빙하도 없는 주왕굴을 찾은 나그네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담아가려나. 눈에는 보이지 읺는 그 무엇이 촌부의 발길을 붙잡는 듯한 이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주왕굴]
주왕굴에서 주왕암으로 돌아와 절 앞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완만한 산길을 올라가면 나무데크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주왕산의 바위 봉우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거대한 바위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멋진 풍경이다.
신라 37대 선덕왕이 후사가 없어 김주원이 차기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상대등 김경신이 한발 먼저 왕좌를 차지하는 바람에 김주원이 주왕산으로 피신해 절벽 위에 대궐을 짓고 식수를 얻기 위해 두레박으로 계곡의 물을 퍼 올렸다는 급수대(汲水臺)도 보인다. 급수대는 주상절리(柱狀節理)가 발달한 곳이다,.
[병풍바위와 급수대]
전망대에서 산길을 따라 다시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시루봉 앞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서 위쪽으로 아치형의 학소교를 지나면 거대한 바위가 세로로 갈라진 듯한 틈으로 나무데크길이 이어진다. 신비의 공간 용추협곡(龍湫峽谷)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용추폭포(주왕산 제1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바위틈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의 풍경이 이색적이다. 폭포에서 물이 떨어져 고여 있는 물웅덩이에는 자갈이 깔려 있고, 물이 워낙 맑아 그 속에서 물고기 떼가 노는 모습이 보인다.
[학소교]
[용추협곡과 용추폭포]
용추폭포를 지나 800m를 더 올라가면 절구폭포(주왕산 제2폭포) 가는 이정표가 객을 맞는다. 주등산로에서 벗어나 이정표를 따라 200m 정도 들어가자 절구폭포가 나왔다.
바위벽을 타고 떨어지는 2단 폭포인데, 마치 조각가가 공을 들여 조각한 느낌을 준다. 1단 폭포 아래에는 선녀탕이라 불리는 돌개구멍이 있고, 2단 폭포 아래에는 물웅덩이인 폭호(瀑湖)가 있다.
[절구폭포]
절구폭포에서 다시 주등산로로 돌아나와 위로 조금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으로 난 길이 주왕산 주봉을 올라가는 주등산로이고, 왼쪽으로 올라가면 용연폭포(주왕산 제3폭포)가 기다린다. 용연폭포를 다녀오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폭포 의 풍광이 멋지기 때문에 나그네의 발걸음은 당연히 그리로 향한다.
대전사에서 3.4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 폭포 역시 바위벽을 타고 흐르는 2단 폭포인데, 폭포의 크기가 가장 크다(떨어지는 물줄기기가 두 개여서 ‘쌍용추폭포’라고도 불린다). 주등산로에서 왼쪽으로 나무데크길을 따라 들어가 상단폭포를 먼저 본 다음 하단폭포까지 내려가 돌아 나오도록 길이 나 있다.
이 폭포는 무엇보다도 상단폭포 주변에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세 개의 작은 하식(河蝕)동굴이 있는 게 특이하다. 일부러 만들려고 해도 쉽지 않을 기묘한 모습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자연이 연출한 드라마를 보는 둣하다. .
[용연폭포의 상단과 하단]
용연폭포에서 돌아 내려와 앞서 언급한 삼거리에서 주봉으로 향하는 후리메기 삼거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리메기 삼거리까지는 약 1km 정도로, 이곳은 여전히 평탄한 길로 소나무숲이 울창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우리의 슬픈 근대사를 만나게 된다.
전국의 산을 다니다 보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연료로 사용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의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하느라 나무껍질을 벗긴 상흔이 남아 있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어 가슴이 아픈 적이 있다.
이 주왕산 깊은 산속에서도 송진을 채취하느라 껍질이 벗겨진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소나무들을 만나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상처는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1960년대에 생긴 것이다.
비록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곧이어 6.25 전쟁의 참화를 겪어 나라 경제가 매우 어려웠던 시절, 이곳 주왕산의 울창한 소나무들이 송진을 헌납해야 하는 고초를 겪은 것이다.
소나무의 아픈 상흔을 보고 있노라니 촌부가 여주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 초반, 교실의 난로에서 땔 솔방울을 주우러 전교생이 학교 근처의 산을 헤매던 때가 생각난다.
지금의 어린 초등학생들에게는 먼 나라의 동화 같은 이야기겠지만, 그런 시절을 겪고 이겨내며 이룩한 경제성장으로 오늘의 부유한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역사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언필칭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외계인들일까.
후리메기 삼거리에서 주봉까지는 2.5km이다. 처음 500m는 여전히 평탄한 길인데, 그 다음부터는 경사로가 이어진다. 다행스럽게도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오르는 데 힘이 크게 들지는 않는다.
잠깐 숨을 돌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근래 보기 드물게 맑은 하늘이 흰 구름과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를 연출한다.
[주봉 올라가는 길]
대전사에서 출발하여 6.6km 거리를 4시간 30분(중간의 점심식사 시간 포함) 걸려 도착한 주왕산의 주봉은 의외로 소박하다. 커다란 자연석에 ‘주왕산 주봉 720m’라는 글씨가 새겨진 표지석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앞 공터에 산객들이 앉아서 숨을 돌리는 벤치가 길게 놓여 있는 게 전부이다.
주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주왕산이 정작 주봉에서는 전설이 비켜 간 듯하다. 한양 나그네에게는 그 꾸밈없는 소박함이 오히려 좋다. 다소 억지스런 전설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좋지 않은가.
[주왕산 주봉]
주봉에서 대전사로 이어지는 2.3km의 내리막길은 많은 부분이 급경사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6.6km를 돌아온 길을 2.3km로 단축하여 내려가려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앞레서 언급하였듯이 정상적인 등산이라면 대전서에서 역으로 이 길로 주봉에 올라 후리메기 삼거리쪽으로 돌아 내려가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인터넷의 주왕산국립공원 안내 사이트에도 그렇게 산행을 하는 것이 “주왕산 산행코스 중 가장 일반적인 코스로 잘 정비된 탐방로를 따라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음”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내리막길이 급경사인 대신 중간에 전망대들이 설치되어 있고, 시야 장애가 없는 까닭에 상행길에 밑에서 쳐다보기만 했던 주방천 주위의 거대한 암벽들을 위에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 또한 즐거움이다. 비유하자면, 상행길에는 나무만 보았다면 하행길에는 숲을 보는 셈이다.
[하산길의 전망대에서 본 주방천 주위의 암벽들]
1시간 30분 걸려 하산을 끝냈다. 다 내려와 뒤를 돌아보니 이제껏 내려온 길이 주봉으로 오르는 ‘주봉(主峯)마루길’이라는 안내문(門)이 객을 전송한다. ‘또 올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만일 다시 오게 되면 이 길로 오르마’ 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글을 맺으며
주왕산을 간 김에 안동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서둘러 주산지를 찾았다. 수령 100년이 훨씬 넘은 왕버들이 호수의 물속에서 자라면서 수면 위로 뻗어 나와 신비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 곳을 이른 아침에 찾아 물안개까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2022. 6. 12.
그런 선경(仙境)을 보겠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잠을 설치고 찾은 주산지는 촌부에게 실망, 아니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아니 이럴 수가! 올해 들어 계속되는 가뭄에 주산지의 상당 부분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호수 속에 있어야 할 버드나무가 땅바닥에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차라리 잠이나 더 잘걸... 뒤늦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하긴 세상만사가 다 내 뜻대로 된다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주산지]
귀경길에 학봉종택(鶴峯宗宅)과 봉정사(鳳停寺)를 들렀는데, 이 글의 성격상 그 이야기는 생략한다.
모든 여정을 빈틈없이 짜고 함께 하며 안내해 주신 남영찬 변호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한다. 발바닥에 유리가 박혀 있는 상태였다는 사실을 그 후에 알게 되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끝)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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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22.07.14 22:43
주왕산을 이 보다 더 잘 소개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
우민거사
2022.07.14 22:48
차고 넘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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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텃골
2022.07.15 06:58
후덥지근한 칠월의 아침 찌뿌둥한 기분으로 일어났는데
거사님과 주왕산 한바퀴 돌고나니 두다리는 가쁜하고
기분은 어이 이리 상쾌한지요.
주왕산
오래전에 스치듯 지나긴 했으나 이렇게 다시 보니
주왕산의 절경을 직접 걷는듯
상큼한 정취에 빠져듭니다. -
우민거사
2022.07.17 15:30
산이 있고 길이 있으면,
아니 길이 없어도
어디든 주유천하를 하실 교수님께서도
다시한번 왕림하실 만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교수님의 낭만과 정취가 깃든 발자취를 남겨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지하에 잠들어 있는 주왕이 깨어나 반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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